1 生涯

 1.6  絶頂期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목표로 '도버해협'에 접한 도시 '불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 도버해협(영:Strait of Dover)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영국해협'의 최 협부(狹部)
  '프랑스'에서는 '칼레해협'(Pas de Calais)으로 불린다


                       

                       


  * 불로뉴(Boulogne-sur-Mer)

 '프랑스' 북서쪽에 있는 항구도시.
 보양지이며, 어업의 중심지.
 1905년 8월, 세계 최초의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다. (불로뉴 선언)

 ※ 그리고 참고로 '불로뉴의 숲'은 '프랑스 파리' 서쪽 교외에 있는 대공원이다.
     그곳은 파리 시민들의 휴식처로, 경마장과 장미원, 연못 등이 있다.


 <廳舍>
                       

           
 그러자 '영국'은 그 대응책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서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다.
           


 * 제3차 대불대동맹(Third Coalition, 1805년 4월 11일-1806년)


 '나폴레옹1세'가 지배하던 '프랑스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유럽제국'이 결성했던 동맹이다.
 

혁명 후의 '프랑스'에 대항했던 것으로는 3번째였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대항했던 것으로서는 최초의 동맹이었다.

 
<동맹>

 
1803년 5월 '영국'은 '아미앵의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 ※
 여기서 '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의 단락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후 '영국'은 '해상봉쇄'를 전개해서 '프랑스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자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영국본토'에의 침공 작전을 계획했고
 이어서 '도버해협'에 접해 있는 '불로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러자 '영국'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1805년 4월 11일에 각국과 동맹을 결성했다.
 
다만, 그때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또 그때 '
제3차 대불대동맹'에 참가했던 국가는 '영국(아일랜드 포함)'과
 '오스트리아제국(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러시아제국'과 '나폴리왕국' 스웨덴왕국'이었다.

 < 뒤의 이야기는  차후에 설명함 >


 그리고 그때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손길은 항상 뻗혀져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상태로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영국'에게서 빼앗았던 '하노버(Hannover-독일북부)'를 '프로이센'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 하노버(Hannover)

 '라이네 강'가에 있는 '북쪽 독일'의 주요 도시 중 하나.
 '니더작센 州'의 都이기도 하다.
 인구는 515,948명(2004년).
 


<하노버 중앙 역>


 

    

                                                                      <라이네 강>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 '영국침략'에 나서지만, 그러나 그때도 '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해군'에게 또 다시 완패(트라팔가르 해전)했고, 그로 인해서 '영국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패전에 대한 결과를 당연히 인정하려들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패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이해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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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작: 나폴레옹의 대관식-황후가 되는 '죠제피누'에게 스스로 관을 하사하고 있는 '나폴레옹'>



  1 生涯

  1.5  皇帝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즉위식을 거행해서 <프랑스인민의 황제>에 취임했다. (프랑스 제1제정)
 그러자 '프랑스'의 '영웅'이 독재(獨裁)적인 통치자가 되었다는 그 사건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 프랑스제국의 성립에 대한 배경 설명  (※ 뒤의 이야기는 차후로 미룸)


 1804년 '프랑스'의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반(反)혁명'을 두려워하고 '프랑스혁명'이 계속되기를 바라던 국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서 '프랑스 황제'에 등극했다.
 (다만 기권은 70% 이상)

 하지만 당시까지 '
나폴레옹 정권'은 '통령정부시대'부터 일관했던 정권이었고, 또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배경으로 했던 '군사(軍事)국가'였다. 그래서 그 '나폴레옹'이라는 존재와 함께, 그가 어떤 전쟁에서든 계속해서 이긴다는 것이 그 정권존속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과 '오스트리아' 또는 프로이센(Pruisen)과 러시아 등, 이른바 '유럽 열강'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것은 단지 '나폴레옹'의 절대화와 권력강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그 혁명이 자국들에 미치는 공포에 더해서, 군사 면에서의 위협까지도 더해지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 열강들은 조속히 '대불대동맹'을 결성하고는 그 제국에의 대항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프랑스' 국내에 있어서도 황제의 탄생에 의한 '프랑스 제국'의 출현은 '프랑스혁명'으로 '루이16세'를 처형했고, 또 '공화제'를 세웠던 것에 대해서 역행했던 것이어서, 친(親) 자코뱅파의 반발까지도 부르게 되었다.



 그 일례로, 그리고 또한 이미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이 '나폴레옹'을 '인민의 영웅'이라고 기대해서 <보나파르트> 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으로 있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 하고 있었던 'Beethoven'은, 그에 실망을 해서 '나폴레옹'에게 헌상할 생각이었던 '메시지'도 파기했고, 또한 곡명도 <영웅>으로 변경했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물론, 그리하여 '베토벤'은 당연히 '나폴레옹'에게의 곡 헌정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화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설이 많다.


 * 교향곡 제3번 내림 마장조<英雄>



 작품 55 <원제(伊):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
영웅 교향곡-어떤 위대한 사람을 추억하며 바친다>

 위 작품은 '
Beethoven'이 작곡 했던 3번째의 교향곡으로, 1803~1804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또 '
영웅' 외에 '이탈리아어'의 원제에서 유래하는
 '영웅교향곡'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많이 있다
 'Beethoven'의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


< Eroica Beethoven title-3번 영웅 >

<베토벤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함>

            

 

 그리고 또 그 대관식에는 ‘교황 피우스7세'(앞에서 설명되었음)도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나폴레옹'의 계산에 의했던 것으로
 그것은 또 당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하사받는 것은 의례적인 것이었다고는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 '나폴레옹'은 교황의 눈앞에서 스스로 왕관을 쓰는 것으로 해서
 교회를 정치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 후 '나폴레옹'은 '각료'나 '대신'에 많은 정치가, 관료, 학자 등을 등용했고
 그러나 자신이 군인이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국방대신'만 군인으로 등용했다.



 

 

 

 

 

 

 


 




< Napoléon Bonaparte - 1.5  皇帝 나폴레옹-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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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

 <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리고 또 '노예제도의 부활'로 인한 '산-드망' 흑인들의 반발로 인해서, 1803년 11월 '프랑스군'은 그들에 大敗했다.
 
그리고 또 1804년 1월 1일에는 '쟌-잭 데사리누'가 지도하던 '프랑스령' '산-드망'은 '아이티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아이티 혁명)



  * 데사리누(Jean-Jacques Dessalines. 1758년 9월 20일~1806년 10월 17일)


 '아이티'의 독립운동 지도자.
 독립 후 최초의 통치자였으며, 1805년에는 스스로 '잭 1세'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도 '아이티 건국의 아버지'로 경애(敬愛) 받고 있다.
 '
아이티혁명'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산-드망'에서 '트산 르베르츄르'의 부하로 활약했다.
 1802년에 '트산'이 구속되면서 반란군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재 봉기(蜂起) 했다.
 
1803년 11월 18일 ‘베르티엘’의 싸움에서 '나폴레옹'이 파견했던 ‘드나치안-마리-죠제프 드 로살보’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804년에 독립을 선언해서 국명을 '아이티'로 변경했다.

 ※ '아이티'는 선주인(先主民)이었던 '타이노(Taino-'쿠바' 등 '카리브 해'에 널리 퍼져있는 원주민)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무라토'<스 : mulato - 혼혈(흑인과 백인과의 혼혈-'카리브 해'와 '브라질'에서는 주민구성에 큰 위치를 점하고 있다)>와 흑인장교들에 의해서 의회로부터 총독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을 모방해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을 장악하자 그 보복으로 백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도 나중에는 북부의 ‘앙리 크리스토프’와 남부의 ‘아렉산들 페션’ 등의 세력에 압박을 받아서 1806년에 암살되었다.





 ** 앙리 크리스토프(Henry Christophe, 아이티어:Anri Kristof-1767년 10월 6일~1820년 10월 8일)


 
 '아이티'의 군인
 1807년 2월 17일 '아이티 국'(북 아이티)의 대통령이 되었고
 1811년 3월 26일 '아이티왕국' 국왕 즉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1820년 10월 8일에 자살했다







 ** 알렉산들 페션(Alexandre Sabes Petion-1770년 4월 2일~1818년 3월 29일)


 아이티의 군인
 '남 아이티공화국'의 대통령(1806년~1818년)






  ** 아이티혁명(프: Révolution haïtienne, 1791년-1804년)


 서반구(西半球)에서 일어났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반란 중에서 가장 성공했던 혁명이었다.
 그로 인해 '자유 흑인의 공화국'으로 '아이티'가 건국되었다.
 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이티'는 '산=드망'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그 혁명에 의해서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을 선조로 했던 사람들이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상태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당시, 많은 '노예반란'이 있었지만, 그러나 '산=드망'의 반란만이 성공을 했고, 그로 인해 전 국토를 항구적으로 해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티'는 근대사 중에서 첫 '흑인공화국'이며 '프랑스식민지'로부터 '직접자치'로 이행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머지 상세한 것은 생략함)





<산 도밍고의 전투-아이티 독립전쟁 中 ('프랑스'의 용병 '폴란드군'과 '아이티 반란군'의 전쟁)>



 


 

 

 




 < 1.4  統領 나폴레옹-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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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

 
 <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리고 또 한편, 식민지에서는 1801년 7월 7일에 ‘트산 르베르츄르'가
 ‘산-도밍고(Saint-Domingue: 카리브해. 현 아이티 공화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 트산 르베르츄르(Franc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 Toussaint Breda)


 생년미상(1739년부터 1743년)-1803년 4월 7일)
 '
프랑스혁명기'의 '아이티' 독립운동지도자
 ‘쟌-잭 데사리누‘ 등과 함께 '아이티'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산-도밍고>


 그리고 또 '스페인령'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카리브 해. 도미니카 공화국)’를 침공한 후
 전(全) '에스파뇰라(Hispaniola, La Espanola-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두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섬을 통일했고
 거기다 자치헌법까지 제정해서 흑인노예의 해방을 실시하고 있었다.






 
                                               <에스파뇰라 섬>


 그러자 '나폴레옹'은 ‘산-드망(도밍고)’의 재정복을 위해서 자신의 의제(義弟)였던 '루크레르 장군'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자 '루크레르'는 그곳에서 열병(熱病)과 게릴라전에 고전했으면서도, 기만전술을 사용해서 ‘트산’을 포획했고
 이어서 그를 '프랑스'로 보냈다.



  *루크레르 또는 레크렐(Charles Victor Emmanuel Leclerc)


 1772년 3월 17일 - 1802년 11월 2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기의 군인
 '나폴레옹·보나파르트'의 여동생 '포리누'의 최초의 남편
 자산가의 집에서 태어나서 군인이 되었고, 프랑스혁명전쟁으로 공적을 올려서 승승장구했다
 '
나폴레옹'과는 '툴롱 전'에서 만났고, 전투에서 모두 이겨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797년에 ‘포리누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
 1801년 10월, 산-드망(현재의 아이티)에 전임되어, 흑인반란의 진압에 임했다
 
그는 현지의 실력자였던 ‘트산 르베르츄르’를 굴복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그 후에 기만전술로 '트산'을 잡아서 '프랑스'로 송환했다
 
그리고 또, 그는 '트산' 포박 후 '나폴레옹'에게 그 섬에 있던 흑인의 반수(半數)를 말살할 수 있도록 서간으로 호소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곳의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해서 황열(黃熱)병에 걸렸고, 이어서 <검은 토사물을 내뱉고> 병사했다 


 


  그러자 나중에 그 ‘트산’은 옥중(獄中)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또, 
1803년 4월에는 '아메리카합중국'에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매각했다.


 * 프랑스령 루이지애나(프: La Louisiane, 영: Louisiana)


 '북아메리카' '누벨프랑스'의 1 관할지역의 이름이다.

 * 누벨프랑스(또는 뉴 프랑스=프: Nouvelle-France, 영: New France)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북미대륙'에서의 '프랑스 식민지'를 말함
 당초에는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과 '뉴펀들랜드 섬' 그리고 '아카디아<現 노바스코샤(Nova Scotia)>' 뿐이었지만, 점차 '오대호' 주변과 역사적인 '루이지애나'에도 확대되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프랑스'가 지배를 하고 있었을 때, 그 지방을 탐험했던 '프랑스'의 탐험가 '라·살'에 의해서 (프랑스국왕 '루이14세'에 연관되어) '루이지애나'라고 이름 붙여졌다.



 ** 라 살(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



 1643년 11월 24일-1687년 3월 19일
 '프랑스인' 탐험가이며 '아메리카 합중국'과 '캐나다'의 '오대호' 지역 '미시시피 강'과 '멕시코 만'을 탐험했고 '미시시피베이슨(Mississippi basin-미시시피 일대의 아주 넓은 지역)' 전체를 '프랑스령'으로서 주장해서, 그곳을「루이지애나」라고 이름 붙인 인물이다 



 ** 루이14세(Louis XIV de France)


※ 참고로 소개함

 1638년 9월 5일-1715년 9월 1일
 재위:1643년-1715년
 '부르봉 朝' 제3대의 '프랑스 왕'. '루이13세'의 장자.
 왕비는 '스페인 왕' '훼리페4세'의 딸 '메리·테레즈(마리아·테레사)'.
 '부르봉 朝' 최성기(最盛期)의 왕이었으며, 태양왕(Roi-Soleil)으로 불렸다.
 아버지의 사후,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재상 '마자란(마잘린)'의 보좌로 '후론드의 난'을 진압했다.(다음 '노스트라다무스' 참조)
 1661년에 친정을 개시하면서 '콜 베일'을 등용해서 중앙집권과 중상주의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전쟁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서 '귀속(歸屬)전쟁' '네덜란드 침략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 결과 '절대군주제'를 확립했으며 '베르사유궁전'을 건설하는 등 문화의 융성도 보았으나, 그러나 치세 후반의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과 '스페인계승전쟁'에서 고전하면서, 만년에는 막대한 전비(戰費)조달과 방만 재정(財政)으로 '프랑스'를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원래 그 영역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남북(南北)은 '오대호(五大湖)'에서 '멕시코 만'까지 그리고 동서(東西)는 '애팔레치아산맥'에서부터 '로키산맥'까지 광대하게 퍼져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관리상으로는 '아칸소 강'에서 북쪽의 '업·루이지애나(프: Haute-Louisiane)'와 '로우·루이지애나(프: Basse-Louisiane)'로 나뉘어져 있었다.
 현대의 '아메리카합중국 루이지애나 주'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역사적인 지역의 이름을 승계했다.
 그리고 1682년에 '라·살'이 그 지역을 탐험했고, 그에 따라서 '프랑스'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사람도 재원도 모두 부족했기 때문에 큰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7년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던 1763년에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해서 동쪽을 '영국'에 서쪽은 '플로리다'와 교환해서 '스페인'에 할양되었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는 '비밀조약'으로 서쪽 영토를 되찾았지만, 그러나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1803년에 <아메리카합중국에의 양도(루이지애나 매수)>를 결정해서 프랑스의 지배는 끝났다.
 그 후 '미국'과 '영국'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서 체결되었던 '1818년의 조약'에 의해서 북위 49 도선보다 북쪽에 있던 부분을 '영국령 캐나다'에 편입해서 오늘날에는 '앨버트 주'와 '서스캐처원 주'의 일부가 되고 있다.



 ** 루이지애나의 買收 <프랑스 입장에서는 매각>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210만km가 넘는 영지를 1,500만 달러(현금 11,250,000 달러+당시의 借入金 3,750,000 달러를 消滅해서)로 매수했던 사건이다.

 <개요>

 당시, 佛領 '루이지애나'는 주로 '미시시피 강' 유역의 광대했던 영지로 현재의 '아이오와' '아칸소' '오클라호마' '캔자스' '콜로라도' '사우스다코타' '텍사스' '뉴멕시코'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미주리' '미네소타' '몬태나' '루이지애나' '와이오밍'의 15주에 해당되었다.
 그러자 그때,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제퍼슨'은 그곳이 '미시시피 강' 하구에 위치해 있어, 물류의 거점으로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2일(율리우스력) / 4월 13일(태양력) - 1826년 7월 4일
 제3대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수도 워싱턴 D.C에서 취임연설을 했던 최초의 대통령이다
 (상세한 것은 다음으로 미룸


 


 그래서 그는 그곳을 영유(領有)하고 싶다는 생각에 1802년 '파리'로 특사를 파견해서 그곳을 매수하고 싶다는 뜻을 '프랑스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집정 하에서 '영국'과는 적의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만약에 '영국'이 '캐나다'에서 그곳으로 침공해왔을 경우 멀리 떨어져있는 본국에서 그것을 방위하는 것은 무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때 '나폴레옹'은 오히려 그것을 매각해서 얻는 이익으로 전비(戰費)를 충실히 하고 또 그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도 가까워질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서 아주 파격적인 가격이었던 1500만 달러에 그곳을 '미국'에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03년 4월 30일 '루이지애나' 매각에 관한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후 '미국'의 영토는 그로 인해서 당시의 두 배가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현재에도 '미국' 전영토의 23%에 상당하고 있다)


<매수대상 지역은 녹색 부분 - 지도와 구분은 20세기 말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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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16 19:11   좋아요 0 | URL
나폴레옹에 관한 깊이있는 실화와 미국 역사에 엃힌 일화등 소설이 아니면 거의 접하기 힘들어 보이는 정보들을 잘 보고 들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많이 흘러 보냈기에 더 이상 불 필요해진 지식이 되어질 수도 있지만, 자녀가 성장하고 청소년기를 지나갈 때 꿈을 가지게 될 나이가 되면 적어도 위인전에 등장했던 사람들에 대해 객관적 시각으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 때 이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 쯤 해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위대하다는 것의 의미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를 현실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나폴레옹 이외에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고, 선택했던 인물들은 꽤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의 초심의 자세를 견지했더라면.. 최후의 죽음이 허무하다고 말 할 수 없겠지요^^. 꿈을 가진자는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지만, 욕망을 꿈꾸자는 큰 것을 꿈꾸고 싶어 하기에 세상의 중심에 올라 갔다가 그곳에서 추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욕망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인생의 순리를 이야기 할 때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해 줄 것 같습니다^^ 여자는 여자 답게, 남자는 남자 답게 그 속에서 여자도 당당한 여성으로써 자아 의식을 지니고 힘차게 나아 갈 수 있는 것이 현대 물결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이점들 중의 하나가 되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 한들, 그것을 지키려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추락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황제의 자리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엄동화 2011-03-17 14: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고마우신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글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에 저는 다만 감사 외에는 더 드릴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2세를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마음 또한 저절로 느낄 수가 있었으며, 그래서 또 <반이법> 님께서는 아주 훌륭하신 어머니이실 것이란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그리고 또한, 욕망에 대한 경계의 말씀도 잘 뵈었습니다. 아무튼, 장문의 댓글과 관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려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길 기대하면서,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



 <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리고 또 '프랑스'의 산업이 다시 부흥하게 되면서 그로인해서 그 시장(市場)이었던 '위성국'이나 '보호국'들에 대해서 지배와 정비가 진행되었지만, 그러나 전부터 '적'의 관계에 있었던 '영국'을 다시 그 해외시장의 패권분쟁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또, 이미 1803년 4월에 '몰타(Malta-지중해 중앙에 있는 섬)'의 관리권을 둘러싸고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해 5월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1세'의 조정도 실패했던 데다가 또 체결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아미앵의 화약’조차 '영국'에 의해서 파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양국은 강화한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전쟁상태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알렉산드르1세(Александр I)
   본명은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Aleksandr Pavlovich Romanov
   1777년 12월 23일-1825년 12월 1일


 Alexander I of Russia. 본명은, '알렉산드르·파브로비치·로마노프'
 '로마노프 朝' 제10대 '러시아황제'(재위:1801년-1825년) 및
 '폴란드입헌왕국' 초대국왕(재위:1815년-1825년) 및
 '핀란드대공국(大公國)' 초대대공(재위:1809년-1825년)
 러시아황제 '파벨1세'(또는 파베르1세-Pavel Petrovich Romanov, 1754년 10월 1일-1801년 3월 23일. 상세한 것은 생략함)와 황후 '마리아·후드로브나'(Maria Feodorovna, 1759년 10월 25일. 상세한 것은 생략)의 제1황태자.

 부제(父帝-'파베르1세'는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함. 그때 '알렉산더1세'가 일조했다고 여겨짐) 암살 후에 제위(帝位)를 계승했고, 당초에는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지향하고 개명(開明)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전쟁'을 거친 후였던 치세 후반은 강권(强權)적인 반동(反動)정치로 변했다.
 외교정책에서는 '나폴레옹1세' 실각 후에 열렸던 '빈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연기(演技)했고, 이후 '유럽'에 있어서의 '군주주의' '정통주의'적인 '반동체제'의 확립에 진력했다. 그리고 또 '크리스트교 윤리관'에 근거하는 '신성동맹'을 결성해서 '유럽제국'의 모든 '자유주의운동'이나 '국민주의운동'의 탄압에 협력했고, 그 외에도 '오스만제국'에 대한 '對 이슬람 십자군'을 꾀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 중 '러시아제국'은 '핀란드'와 '폴란드'를 획득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는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괴기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국내외의 힘든 정세가운데서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사태를 추진하려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이윽고 1802년 8월 2일 '1791년 헌법'을 개정해서 스스로를 종신통령(종신집정)으로 선포하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또 1804년에는 의회의 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서 세습으로 자신의 자손에게 그 자리를 잇게 하는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 1791년 헌법(프:Constitution de 1791) - 1791년 9월 3일에 제정되었던 '프랑스' 최초의 헌법



 <制定의 經緯>

 1789년 6월 9일의 '테니스코트의 맹세' 이후, '국민의회'는 '헌법제정'의 의지를 표명했고, 거기다 7월 9일에는 '국민의회'를 <입헌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로 개칭해서, '입헌체제의 확립'에 착수했다.

 


 ** 테니스코트의 맹세(또는 球戱場의 맹세-serment du jeu de paume)

                                                                         

  


                        

 <개요>

 '프랑스혁명' 발발 직전의 사건이며, 의결방법을 둘러싸고 분규(紛糾)했던 '삼부회(三部會-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설명은 생략함)'에 대해서 제1신분(승려)과 제2신분(귀족)의원들이 회의장을 폐쇄하려고 했기 때문에 1789년 6월 20일 다수파의 제3계급(身分-평민)이 중심이 되어서 '베르사유궁전'의 '球戱場(jeu de paume)'의 코트에 모여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로 맹세했던 사건이다. 그때의 지도자는 '미라보(우)'와 '아베·시에예스(앞에서 설명되었음)'

 

 
 *** 미라보(우)백작(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


 1749년 3월 9일-1791년 4월 2일
 '프랑스혁명' 초기의 지도자. 일반적으로는 단지 '미라보'로 불린다.
 애칭(愛稱)은「정략(政略)의 미라보」
 귀족 출신이었으면서도 '삼부회'의 제3신분 의원에 속했다. '라 파이엣트' 등과 함께 부르주아적인 입장에서 초기의 혁명을 지도했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 개방적인 서민성으로부터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인기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한중간에 병사(病死)했다. 그리고 그의 死後 '루이16세'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폭로되면서 그 내용들이 반혁명적이었다고 해서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또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국민의회'에서의 큰 줄(통로)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왕실(王室)은 곧 혁명의 진전(進展)에 대해서 불안으로 몰렸고, 그것은 또 당시 왕비였던 '메(마)리·앙투아네트'의 친가였던 '오스트리아'에로의 '국왕일가망명미수사건'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사건은 결국, 국왕과 왕가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실추시켜서 혁명의 새로운 급진(急進)화를 유도했고, 그리하여 또 그 후의 '8월10일 사건'과 더 나아가서는 '루이16세'와 '메리·앙투아네트'의 '기요틴'에 의한 처형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사건의 배경>

 당시의 '프랑스'는 거듭되던 전쟁과 기근으로 재정이 파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때까지는 과세를 면해왔던 제1신분(승려)과 제2신분(귀족)에게도 과세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루이16세'는 새로운 과세 제도를 제정하기 위해서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자 그에 반발했던 제1신분과 제2신분 자들은 '삼부회'에서 '분리심의(分離審議)'와 '신분별(身分別) 투표'를 하자고 주장했고,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합동심의'와 '개인별 투표'를 주장했던 제3계급(평민)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리하여 독자적으로 심의를 진행시키려 했던 제3계급에 '파리'의 일반시민들과 하급승려 등이 합류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그들은 '국민의회'를 자칭했다. 그러자 마침내 제1신분 의원들은 제3계급의 심의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러나 그것에 위협을 느꼈던 왕제(王弟) '아르투아伯'(샤를10세-부르봉朝 최후의 프랑스 국왕)이 그 제3계급의 회의장을 폐쇄했다.

 <참고로 그 '테니스코트의 맹세'의 무대가 되었던 옥내 코트가 있던 건물은 '베르사유 시내'에 현존하고 있다-아래 그림은 그 내부>

                                             

                       
 그러나 7월 14일의 '바스티유습격사건(설명은 생략함)'을 계기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인권선언>이 채택되었고
거기다 또 <성직자 기본법>의 제정 등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야
1791년 9월 3일 첫 헌법이 제정되게 되었다.

 <내용)

 이 헌법에서 '프랑스'는 '입헌군주제'이며 '왕권신수설'은 폐기되고 '국왕'은 <국민의 대표자>라고 해서 세비(歲費)를 받는 일개 관리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입법의회'는 '1원제'로 7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임기는 2년, 선거권은 납세액에 의한 '제한선거(制限選擧)권'으로 했다. 그래서 그 때문에 당시,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들이나 빈민들은 정치로부터 배제되게 되어 그들의 불만을 샀다.

 <그 後>

 그 내용은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타협의 산물이었으며, 혁명의 혼란에 대한 그 종식이 목적이었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헌법에 따라서 10월에는 '입법의회'가 조직되었지만, 그러나 혁명의 혼란 속에 유명무실했고, 거기다 마침내 1792년 8월 10일 '튈르리궁전'의 습격에 의해서 헌법은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했을 즈음에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성숙해있던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라도 지키려했던 결과였다> 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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