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페리뇬(Catherine-Dominique de Perignon, 1754년 5월 31일-1818년 12월 25일)

 프랑스혁명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페리뇬 후작.


               




 그는 1804년에 나폴레옹에 의해서 임명된 4명의 명예원수 중 한명(다른 3명은 켈레르만과 세류리에, 르페브르)이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혁명전쟁에서 피레네전선(대 스페인전)에서 활약했었고, 그 후에는 5백인회의의 의원으로 선출되어서 스페인대사에 취임했다.

 그는 1799년에는 노뷔 전투에 참가해서 부상을 당했고, 포로가 된 후 프랑스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최초의 원수 중 한사람이 된 후
 1806년에 파르마와 피아센트 兩州의 총독(知士)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08년에는 나폴리의 총독으로서, 나폴리 왕 죠악키노1세(뮤라)의 본거지에서 나폴리방면 군을 지휘하는 등 중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는(노뷔 전투 이후) 활약하지 않았다.

 그는 그 후에 서서히 부르봉 왕가에 접근했고, 마침내 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에 격노했고, 워털루 전투 직전에는 장관명부에서 삭제했으며, 계급도 박탈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왕정복고 때 루이18세에 의해서(1816년) 원수에 복귀했다.

 <평가>

 
그는 나폴레옹의 원수로서는 전장에서의 활약보다 과거의 명성과 정치적인 배려에 의해서 임명되었던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거의 활약이 없었던 원수 중 한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옷슈 또는 오셰(Louis Lazare Hoche, 1768년 6월 24일-1797년 9월 19일)

 프랑스혁명 기의 군인.



 



 <생애>

 
그는 1768년 馬夫의 아들로 몬트르이유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784년에 16세의 나이에 병졸로 입대했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벌써 프랑스 근위대의 하사가 되어있었다.
 1789년 7월 14일, 혁명이념과 국민의회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그는 바스티유습격 때 민중 측에 가담했다.
 그해 8월, 프랑스근위대의 해산과 함께 국민위병대에 군조로 다시 입대했다.
 그리고는 10월의 베르사유 행진에도 참가했다.

 ※ 베르사유 행진은 1789년 10월 5일, 여성 중심의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궁전까지 행진해서 루이16세를 연행했던 사건이었다. 10월 행진 또는 10월 사건이라고도 한다.

 1792년 4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종군해서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그 후 북부전선의 공위전과 네이르윈덴 전투에도 참가했고
 1793년 3월에는 그 공으로 중령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반혁명용의자로 체포되었다.
 (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단케르크 수비대에 轉屬되었고, 이어서 단케르크 공방전에서 큰 무훈을 올리고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또 훈공을 거듭했고, 그 1개월 후에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어서 26세의 나이로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에는 군대를 인솔해서 프로이센군과 싸웠으나 카이저-스라우테른 탈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곧 심기일전해서 12월에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라인 강 西岸을 확보했다.

 그리고 94년, 카루노에 의해서 파면되었지만, 그러나 곧 이탈리아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또 산-쥬스트 휘하 장군의 고발에 의해서 니스에서 체포되었고, 파리로 이송되었다.



                 
                                                         <산 쥬스트>
                                     


 그리하여 그는 불과 그 일주일 전에 결혼했던 16세의 부인을 두고서 당분간 감옥생활도 해야 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만났던(근처 방) 조세핀과 곧 애인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5월 16일, 그는 처형 직전에 있었지만,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발발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서부방면 군으로 전임을 받아서 방데반란 진압에 파견되었다.
 
그리고는 부임하자마자 관용정책을 취해서 반란군을 와해시켰다.

 1795년 6월 15일, 영국의 지원으로 왕당파부대가 퀴베론(Quiberon-프랑스서부 브르타뉴 지역권, 퀴베론반도 남단 해안도시)에 상륙하자 그는 그것을 격퇴했고, 그 대부분을 포로로 획득했다.



        
                                                              <퀴베론 반도>
                                                        


 그리하여 1796년 7월까지 방데지방의 평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동년, 그는 또 아일랜드원정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2월에 브레스토 항을 출발했지만, 그러나 폭풍우 때문에 함대가 뿔뿔이 흩어져서 실패로 끝났다. 그 다음에 그는 또 1797년 2월에 군사령관에 취임했고, 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몇 건의 전과를 올렸다.

 그 후에 그는 왕당파의 세력이 의회로 확장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군대를 파견해서 파리를 포위했다.
 그 결과 그는 전쟁대신에 추대되었지만, 그러나 단기간으로 끝냈고, 이어서 폴 바라스의 부패에 항의해서 사직했다. 그 후 그는 군대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못했다. 그리고는 1797년, 30세의 나이로 戰地였던 베츠라에서 병사했다.(그에는 또 독살설도 있다)





프랑스의 군인, 원수.

 * 산-씰(Laurant Gouvion-Saint-Cyr, 1764년 5월 13일-1830년 3월 17일)

 


 

 <약력>

 
1. 성장내력과 관직에 오름

 
그는 로레누(Lorraine)지방의 토울스(Tours)에서 피혁가공업을 영위하던 일가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그 후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싫어해서 집을 떠나 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어학과 수학 그리고 繪畵와 제도 등을 배운 후, 화가를 지망해서 이탈리아에서 2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俳優를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샤토브리앙의 기록에 의함)


                                       <로레누 위치도>                                          
          
     <토울스>



 ** 사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1768년 9월 4일-1848년 7월 4일)

 프랑스 · 빈체제 하의 정치가.
 작가로서도 알려졌다.(자세한 것은 생략함)



 




 그 후, 그는 프랑스혁명 후였던 1792년에 군인이 되려고 공화국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군인으로서의 적성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었던 높은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해서 중용이 거듭되었고, 이어서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장관에까지 승진했다. (그 즈음부터 그는 드제이, 네이, 다브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네이와 다브와는 마음이 맞아서 나중에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2. 나폴레옹 시대

 그 후로도 그는 주로 라인 및 이탈리아방면에서 활약해서 유능한 사단장으로서 이름을 높였지만, 그러나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까닭에 나폴레옹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또 나폴레옹 역시도 그때는 그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던지 그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또 그 결과로 한직으로 돌려져서 더 이상의 승진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1807년의 폴란드전에서 다시 기용되었고, 이어서 충분한 역량을 선보여서 그 다음해에는 카타르냐에서 제7군단의 지휘를 맡아서 활약했다.



            
             <카타르냐>
                                            

 그 후로도 그는 포로츠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등 무훈을 올렸고, 그로써 나폴레옹은 그를 재인식하고 1812년에는 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전쟁의 후반이었던 드레스덴 전투에서는 서툰 솜씨를 보였고 (그 싸움에서 그를 포위전에 기용했던 나폴레옹은 나중에 “그를 攻勢에 투입했던 것은 나의 실수였다” 라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 후의 드레스덴 방위 전에서는 천성의 수완을 발휘해서 탄약과 식료가 다할 때까지 3개월을 참아낸 뒤에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3. 그 후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그는 나폴레옹을 외면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 뒤에는 임시정부에 참가해서 공화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이어서 두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는 또 네이의 처형재판 때는 그를 구해보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평가되어서 전쟁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군의 개혁과 재편성에 착수했지만, 그러나 보수반동 때문에 2년 만에 좌절했다.
 그리고 1821년까지는 모든 직무를 물러났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회상록과 戰史논문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4. 인물상

 그는 다른 나폴레옹의 원수들과 비교한다면 지명도가 낮지만, 그러나 군인으로서는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다브나 맛세나에 필적한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그는 방어전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었고, 그래서 나폴레옹도 후에<그는 과연 방어전에 관해서는 제1인자였다. 물론 공격에 관해서는 내가 더 우수했지만...> 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그 思想(평생 그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과 경력이 말해주듯 활약했던 장소가 한정된 감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폴레옹이 그를 잘 다루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냉정침착하고 감정에 흐르는 일 없이 청렴결백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표정하고 냉담해서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고 알아보려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 주위사람들(특히 상사들)과도 자주 충돌해서 <스파르타인> 또는 <氷人> 또는 <梟-올빼미> 등의 별명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점은 또 다브도 비슷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친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그는 여러 가지 奇行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서 <전투 후에 僧院에 틀어박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든지, 또는 <대오를 이탈해서 마음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등의 에피소드도 남겼다.

 하
지만 그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던 것 같고, 그래서 <1813년 전쟁에서 그가 기용되었을 때, 그는 장병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그와 함께 환영받았던 원수로서는 다브와 네이 그리고 오쥬로가 있었다)



 




 *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년 10월 23일-1847년 5월 29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인. 제국 원수.
 나폴레옹1세가 임명했던 26명의 원수 중 제일 마지막으로 임명되었던 사람.
 그것도 1815년 백일천하 때였다.




 그는 프리틀란트 전투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그러나 워털루에서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너무 잘 따랐던 것이 오히려 해(패인)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 이틀 전의 리니 싸움에서 이겼던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을 기병 35000명으로 추격하도록 나폴레옹으로부터 명받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그가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서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워털루 근처에서 포성이 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명령을 고집했고, 그로 인해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주력군과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또 프로이센군은 워털루로 향할 수가 있어서, 결국에는 Wellington이 인솔하고 있던 영국군에게는 유력한 원군으로 참전하는 결과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저녁때까지도 우세하고 있었던 프랑스군은 패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단, 그때 그루시가 이끌었던 그 병력은 주력군이 패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하나 없이 귀환했으며, 그것은 또 파리를 지키고 있던 육군대신 다브 원수가 급히 수습을 해서 연합군이 밀어닥치는데 대한 억제효과는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상황은 끝났고, 그리고 1840년 12월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파리로 귀환했을 때, 그 式典에는 그도 함께 참석을 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곳에 함께 참석을 했던 나폴레옹이 임명했던 원수 중에는 솔트와 우디노 그리고 몬세이도 있었다.




<이상, 나폴레옹 기의 원수 27명에 대한 소개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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