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194 년]

 ⊙ 曹操

 흥평(興平) 원년(194) 여름, 조조(曹操)는 다시 서주(徐州)를 침공했다. 그러면서 가던 길에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친구였던 장막(張邈)이 군사(軍師)였던 진궁(陣宮)과 모의해서 여포(呂布)를 받아들이는 반역을 했기 때문에, 영지(領地)였던 연주(兗州)의 대부분이 여포(呂布)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은 또 그때, 장막(張邈)은 여포(呂布)가 원소(袁紹)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에 만나서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원소(袁紹)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원소(袁紹)는 조조(曹操)에게 장막(張邈)을 칠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지만, 그러나 또 조조(曹操)는 그런 장막(張邈)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막(張邈)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오로지 원소(袁紹)의 명을 받은 조조(曹操)가 자신을 치러올 것으로만 생각했고, 그 불안감이 또 여포(呂布)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론적으로는 조조(曹操)를 배신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런데 그 장막(張邈)과 조조(曹操)는 아주 옛날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고, 그것은 또 <누군가 먼저 죽는다면, 살아 남은 사람이 그 죽은 사람의 가족을 돌봐주기>로 약속까지 했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랬으므로 그 장막(張邈)의 배신은 조조(曹操)에게는 바로 충격 그 자체였고, 그래서 또 조조(曹操)는 급히 연주(兗州)로 다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여포(呂布)와 일전(一戰)을 벌였는데, 하지만 결과는 청주군(靑州軍)의 대 참패였고, 그리고 그 싸움에서 조조(曹操) 또한 큰 화상(火傷)을 입었다.

 하지만 또 그때, 다행히도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그리고 하후돈(夏候惇) 등이 본거지를 지켜냈고, 그리고 또 그때는 비황(飛蝗-메뚜기 떼 등의 피해)으로 인한 황해(蝗害)로 기근(飢饉)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병량(兵糧)이 고갈되었던 여포(呂布)가 군사를 먼저 물렸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겨우 귀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원소(袁紹)가 기회를 보다가 원조(援助)를 신청해 왔는데, 그러나 정욱(程昱)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조조(曹操)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또 그해 가을, 메뚜기 떼와 한발(旱魃-가뭄)로 인해서 곡물의 가격이 치솟아서(1石에 50余万錢이나 되었다고 함) 그 일대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人肉)까지 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서주(徐州)에서는 도겸(陶謙)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유비(劉備)가 그곳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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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막(張邈)> ?-195년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동류군(東留郡)의 태수(太守). 동평군(東平郡) 수장(壽張) 출신. 자(字)는 맹탁(孟卓), 장초(張超)의 형. 삼국지에서는 여포전(呂布傳)에서 부전(付傳)되고 있다. 그리고 동탁전(董卓傳) 인용 한말명사록(漢末名士錄)과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전(黨錮傳)에 의하면, 그는 한(漢나라)의 8준(俊=八厨) 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그만큼 뛰어났었다는 의미임) 그리고 젊었을 때는 협객으로 불리며 기질이 아주 강했고,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었으며,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것도 잘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와도 사이좋게 잘 지냈고, 두뇌도 명석했던 데다 덕행(德行)으로도 이름이 났기 때문에, 관계(官界)에 곧 알려졌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삼공부(三公府)에 초빙을 받았고, 성적이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아서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된 후, 동탁(董卓)에 의한 명사(名士) 우우책(優遇策-후히 대접하는 정책)의 일환(一環)으로서 진류군(陳留郡)의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董卓傳)

 참고: 그는 원소(袁紹), 허유(許攸), 하옹(何顒), 오경(伍瓊)들과 함께 <분주(奔走)의 우(友)>라고 불렸던 계(契)를 만들었다.(袁紹傳)

 아무튼 그 후, 원소(袁紹)를 맹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었을 때, 그는 조조(曹操) 등과 함께 참가했다.

 참고: 장홍전(臧洪傳)에 의하면, 그는 거병 후에 산조(酸棗)에서 자신의 아우와 공주(孔伷) 등, 일부 제후(諸侯)들과 함께 회맹(會盟)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대부분의 제후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고: 당시, 동탁(董卓)의 휘하에 있었던 정태(鄭泰)의 말에 의하면 <그는 서재(書齋)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했다.

 그러자 참다 못했던 조조(曹操)가 먼저 거병했고,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포신(鮑信)과 함께 조조(曹操)를 응원하며 자신의 부하였던 위자(衛玆)을 조조(曹操) 군에 합류시켜서 보냈다. 하지만 조조(曹操)는 서영(徐榮)에게 졌고, 위자(衛玆)도 그때 전사했다.
그리고 그 후, 산조(酸棗)의 연합군은 병량 고갈로 해산했다.(後漢書)

 그런데 또 그 이전, 원소(袁紹)가 연합군의 맹주가 되었을 때, 원소(袁紹)가 거드름을 피우며 사치(奢侈)를 부렸던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원소(袁紹)에게 자중할 것을 간언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원소(袁紹)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그는 곧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조조(曹操)가 나서서 원소(袁紹)를 설득했고,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그 조조(曹操)를 은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장막(帳幕)은 원소(袁紹)로부터 도망쳐 왔던 여포(呂布)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원소(袁紹)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또 장막(張邈)은 여포(呂布)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조조(曹操)를 의심하게 되었다. <언젠가,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의 친교를 우선해서 나를 살해하러 올지도 모른다!>

 194년, 조조(曹操)는 다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의 본거지를 비우게 되었다. 그러자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의 부장(部將)이었던 진궁(陣宮)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조조(曹操)의 영지(領地)를 빼앗을 수 있는 호기(好機)입니다> 그러자 또 그때, 조조(曹操)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우 장초(張超)도 거들고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장막(張邈)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고는 여포(呂布)를 맞이했고, 그것으로 조조(曹操)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장막(張邈)과 여포(呂布)는 아주 단기간에 조조(曹操)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를 대부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급보를 들었던 조조(曹操)가 원정 처에서 군을 되돌려서 달려왔지만, 그러나 그것조차 물리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그리고 하후돈(夏候惇)이 지키고 있던 3성(城)의 공략에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또 조조(曹操)의 급소를 찌르는 일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근이 들어서 양자는 일시적으로 휴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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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劉備

 194년, 조조(曹操)가 물러난 후, 도겸(陶謙)은 유비(劉備)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추천했고, 그것은 인정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도겸(陶謙)은 병이 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서주(徐州)를 유비(劉備)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러나 또 친교가 있었던 진등(陣登)과 공융(孔融) 등이 설득을 해오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그리고 또 그때, 유비(劉備)는 정현(鄭玄)의 추천을 받아서 북해군(北海郡) 출신의 손건(孫乾)을 종사(從事)로서 맞이했다.

 그 후, 조조(曹操)에게 패했던 여포(呂布)가 서주(徐州)로 들어왔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고는 이어서 공격을 해왔던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개월쯤 후, 하비(下丕)의 수장(守長)이었던 조표(曹豹)란 자가 유비(劉備)를 배신하고는 여포(呂布)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유비(劉備)의 처자(妻子)가 그 성내에서 인질이 되어버렸는데,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서주(徐州)로 다시 돌아와서 여포(呂布)와 화의하고는 스스로 소패(小沛)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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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飛

 194년, 유비(劉備)가 원술(袁術)과 대치하고 있었을 때, 장비(張飛)는 본거지였던 하비(下丕)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비(張飛)는 그곳에서 도겸(陶謙)의 신하였던 조표(曹豹)와 대립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여포(呂布)까지 하비(下丕)를 공격해서 유비(劉備)의 처자(妻子)를 인질로 삼았고,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여포(呂布)와 화해했다. 하지만 여포(呂布)가 다시 공격해 오자 하는 수
없이 조조(曹操)에게로 달아났다.

 그 후, 장비(張飛)는 조조의 여포(呂布) 토벌군에 유비(劉備)와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공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로 조조(曹操)보다 높은 직급이었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비(劉備)는 다시 조조(曹操)를 떠났고, 이어서 차례로 원소(袁紹)와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그러자 그때도 장비(張飛)는 유비(劉備)를 호위하며 각지를 전전(轉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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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孫策

 194년, 손책(孫策)은 원술(袁術)에게 자기 아버지의 군대를 돌려달라고 요구해서, 천 명 정도의 강군(强軍)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수(數)는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주치(朱治)와 황개(黃蓋) 그리고 한당(韓當)과 정보(程普)라고 하는 중핵(中核)의 무장들이 속해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도 그들은 원술(袁術) 군의 일부였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재능만으로도 원술(袁術)을 충분히 긴장시키고 남았다.

 

 그 후, 손책(孫策)은 강동(江東)에서의 자립을 모색했고, 그 사이에도 인재를 모으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 결과, 그는 장굉(張紘)이라거나 장소(張昭) 같은 지모사(知謀士)들과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능조(凌操) 같은 무용(武勇)을 뽐내던 맹자(猛者)들을 모을 수가 있었고, 그러자 또 그의 주위에는 항시 인재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그 시기에, 원술(袁術)과 양주(揚州) 자사(刺史)였던 유요(劉繇)는 그 양주(揚州)의 지배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책(孫策)은 자신을 보좌하고 있었던 주치(朱治)의 권유도 있었고 해서, 스스로 원술(袁術)에게 당시, 그 유요(劉繇)와 대치하고 있었던 숙부(叔父) 오경(吳景)의 원군(援軍)으로 갈 것을 신청했다. 그러자 원술(袁術)은 손책(孫策)의 소 병력으로는 강동에서 자립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원술(袁術)의 본거지를 떠나게 되었던 손책(孫策)은 역양(歷陽)이란 곳에서 오경(吳景)의 군과 합류했고, 그곳에서 또 주유(周瑜)와 재회했다. 그러자 또 그 주유(周瑜)는 손책(孫策)에게 병력이나 군(軍)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강동(江東) 제패(制覇)에 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또, 손책(孫策)이 그 역양(歷陽)에 도착하기 전, 많은 수의 군사들이 손책(孫策)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는 군사가 약 5천 명 정도로 불어나있었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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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呂布

 그렇게 해서 유비(劉備)에게로 도망을 갔던 여포(呂布)는 유비(劉備)의 환대를 받으며 서주(徐州)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얼마 후에 유비(劉備)와 원술(袁術)이 싸우게 되었고, 그러자 또 원술(袁術)은 여포(呂布)에게 유비(劉備)의 배후를 급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장비(張飛)와 조표(曹豹)가 대립하던 동안 유비(劉備)의 본거지였던 하비(下丕)를 점령했고, 그 후 서주(徐州) 자사(刺史)를 자칭했다. 그러자 또 졸지에 갈 곳이 없게 되었던 유비(劉備)는 여포(呂布)와 화해하고는 소패(小沛)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원술(袁術)은 무장(武將) 기령(紀靈) 등에게 삼천의 병력을 주어서 유비(劉備)를 다시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얼른 여포(呂布)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여포 군(呂布軍)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나왔지만, 그러나 여포(呂布)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유비(劉備)를 도우기로 결정했다. <만약에, 원술(袁術)이 유비(劉備)를 이기게 된다면 원술(袁術)은 태산(泰山)의 세력들과 합류하려 할 것이다. 만약에 또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포위를 당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비(劉備)를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 기령(紀靈) 등은 여포(呂布)의 출현에 공격을 중지했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두 진영의 장수들을 안둔(安屯)에 모은 후에 화해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유비(劉備)는 나의 아우요. 그러므로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소. 하지만 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서로 화해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요!> 그리고는 창을 들어서 진영의 문 앞에다 꽂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화살을 쏘아서 저 창을 맞출 것이니 잘들 보시요! 그리고 내가 단 한발에 저 창을 맞춘다면 군사들을 물리시오! 그러나 내가 (저 창을 맞출 자신이 없어서) 이 활을 당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마음대로 해도 좋소!> 하지만 여포(呂布)가 쏜 화살은 보기 좋게 명중했고, 그러자 또 그에 경악했던 장군들은 곧 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또 그 후, 여포(呂布)는 유비(劉備)를 공격했고, 그 결과 소패(小沛)는 여포(呂布)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도주했고, 그 후 조조(曹操)를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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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陶謙

 194년, 조조가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도겸(陶謙)은 조표(曹豹)와 유비(劉備)를 내보냈지만 졌다. 하지만 그때, 조조(曹操)의 본거지에서는 장막(張邈)과 장초(張超) 형제가 여포(呂布)와 진궁(陣宮)과 손을 잡고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철수했다.

 그 결과, 도겸(陶謙)은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병이 깊어져 있었던 상태였고, 또 아들이었던 도상(陶商)과 도응(陶應)의 자질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서주(徐州)를 유비(劉備)에게 물러주고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향연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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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傕

 흥평(興平) 원년(194년)에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이 이각(李傕)과의 관계를 모색했지만, 이각(李傕)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자 마등(馬騰)은 쌍방을 중재하러 왔던 한수(韓遂)와 공모해서 장안(長安)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각(李傕)은 그것을 물리쳤다. 그러자 또 그 마등(馬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익주(益州)에서 공격해왔던 유언(劉焉) 군도 이각(李傕)은 물리쳤고, 그 중에서 또 이각(李傕)을 암살하려고 했던 유언(劉焉)의 장남 유범(劉範)이 도망을 가자 추격해서 살해했다. 그리고 또, 그에 공모했던 유언(劉焉)의 차남 유탄(劉誕)도 처형했으며, 4남(男)이었던 유장(劉璋)도 붙잡아서 죽였다.

 그런데 이각(李傕)이 마등(馬騰) 등과 싸우고 있었을 때, 동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에게 이각(李傕)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자 이각(李傕)은 헌제(獻帝)의 이름으로 당시, 조조(曹操), 원소(袁紹)와 대립하고 있었던 원술(袁術)과 공손찬(公孫瓚) 그리고 도겸(陶謙) 등에게 각각 작위를 내려서 제휴를 도모한 다음에,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당시,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성내(城內)를 분할해서 따로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뿐인 통치였고, 그래서 그들은 도둑조차도 잡지 못했으며, 기강이 문란해져서 병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할거하면서 백성들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또 그런 이유 등으로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으며, 그러자 또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져서 아버지가 자식을 먹고, 아들이 아버지를 먹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다 또 거리에는 온통 사람들의 뼈와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 찼고, 도로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곳을 떠나가서 얼마 후에는 삼보(三輔-長安 부근 關中)의 인구가 격감했다.

 그런데다 또 이각(李傕)은 동료였던 번조(樊稠-韓遂와는 동향의 친구)를, 마등(馬騰) 등과 싸웠을 때, 포획했던 한수(韓遂)를 놓쳤다(또는 놓아줬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그러자 서량(西涼)에 대항할 수 있었던 강력한 인재를 잃게 되어 군(軍)도 약체화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서로 오가면서 주연을 연다든가 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 곽사(郭汜)가 자주 이각(李傕)의 집에서 잤기
때문에, 그래서 곽사(郭汜)의 처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서로 떼놓기 위해서 이각(李傕)을 중상모략 했고, 그러자 또 그때부터 곽사(郭汜)는 이각(李傕)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 후, 이각(李傕)은 재빨리 헌제(獻帝)를 확보하고는 곽사(郭汜)와 싸웠고, 그리하여 서로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거리에는 시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는데, 그러자 또 그것을 보다 못했던
동료 장제(張濟)가 두 사람을 중재해서 화의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헌제(獻帝)를 동쪽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그에 동의했고, 이어서 헌제(獻帝)는 곽사(郭汜)와 양정(楊定) 그리고 양봉(楊奉) 동승(董承) 등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지만, 그런데 또 그 도중에 곽사(郭汜)의 마음이 변해서 헌제(獻帝)를 장안(長安)으로 다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이각(李傕)은 장제(張濟)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해서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다시 홍농(弘農)에서 싸우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곽사(郭汜)는 헌제(獻帝)를 확보하지 못해서 물러났고, 그 결과로 헌제(獻帝)는 황하(黃河)를 건너서 낙양(洛陽)으로 다시 귀환했다.

 하지만 그 후, 군세(軍勢)를 잃은 헌제(獻帝)와 이각(李傕)은 쇠퇴(衰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어서 198년 4월에 배무(裵茂), 단외(段煨)에게 토벌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이각(李傕)의 삼족(三族)이 멸해졌으며, 그리고 또 에피소드로, 그는 사교(邪敎)에 빠져서 언제나 무녀(巫女)들과 함께 사신(邪神)의 제사를 올렸고,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자신이 대사마(大司馬)에 올랐을 때도 그는 무녀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곽사(郭汜)도 그 후로는 쇠퇴했고, 그리고는 197년에 조조(曹操)가 보냈던 배무(裵茂)에게 추격을 당했다. 그런데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오습(伍習)이 배신함에
따라서 미(郿)에서 살해당했다. 그러자 그 후, 그의 머리는 조조(曹操)에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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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외(
段煨)> ?-209년

 후한(後漢) 시대의 무장. 정치가. 양주(凉州) 무위군(武威郡) 출신. 동탁(董卓)의 부장(部將).

 초평(初平) 2년(191년)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손견(孫堅)에게 호진(胡軫)과 여포(呂布) 등은 패했고, 엽웅(葉雄=華雄)은 전사했다. 그러자 그 손견(孫堅)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단외(段煨)는 동탁(董卓)의 명을 받아서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이어서 화음(華陰)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단외(段煨)는 그곳에서 농업을 장려하고 약탈을 삼가는 등, 통치를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동탁(董卓)이 죽고 나서도 그는 그곳에서 몇 년은 더 지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흥평(興平) 2년(195년) 겨울, 이각(李傕)과 곽사(郭汜)의 난(亂)을 피해서 헌제(獻帝)가 그곳 화음(華陰)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자 그때 영집장군(寧輯將軍)이 되어 있었던 단외(段煨)는 헌제(獻帝)에게 의복 등을 제공하며 정중히 맞이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 헌제(獻帝)를 호위하고 있었던 후장군(後將軍) 양정(楊定)과 그는 사이가 나빴는데, 그러자 결국 그 양정(楊定)이 공격해옴에 따라서 그것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그는 헌제(獻帝)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헌제(獻帝)와 백관(百官)들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후,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단외(段煨)를 구원(救援)하고자 양정(楊定)을 협공했기 때문에, 양정(楊定)은 형주(荊州)로 도주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이각(李傕)의 부하였던 가후(賈詡)가 동향(同鄕) 출신이란 연고로 그에게 의지해왔다. 그러자 단외(段煨)는 그를 우대했고, 얼마 후 가후(家後)는 장수(張繡)에게로 떠났다. 그러자 또 단외(段煨)는 가후(賈詡)의 남은 식솔들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건안(建安) 3년(198년), 알자복사(謁者僕射-관직명 중 하나이며 光祿勳=九卿) 배무(裵茂)가 이각(李傕) 토벌에 나서자 그도 참가해서 이각(李傕)을 주멸(誅滅)했다. 그런 다음 입조(入朝)해서 대홍려(大鴻臚)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지만, 그러나 건안(建安) 14년(209년)에 그는 사망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단외(段煨)는 사실(史實)과 같게 낙양(洛陽)으로 가려던 헌제(獻帝)를 화음(華陰)에서 모셨다. 그 후, 조조(曹操)에게 져서 도망을 갔던 이각(李傕)을 토벌해서 그 머리를 취했으며, 아울러서 이각(李傕)의 일족 노유(老幼) 200명도 포획해서 허도(許都)에 있던 조조(曹操)에게 헌상했다. 그러자 그는 그 공으로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지만, 그 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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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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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193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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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初平) 4년(193年) 경, 원술(袁術)이 조조(曹操)가 주둔하고 있던 연주(兗州)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원술(袁術)은 미리 공손찬(公孫瓚)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유비(劉備)와 서주(徐州) 목(牧)이었던 도겸(陶謙)을 파견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의 협력을 받아서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곡정(匤亭)의 싸움-그러나 광정(匡亭)이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그러자 패했던 원술(袁術)은 유표(劉表)에게 배후를 차단당했고, 그러자 또 본거지였던 남양군(南陽郡)을 버리고 수춘(壽春)으로 도망갔다.

 참고: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도겸(陶謙)이 조조(曹操)의 부(父)였던 조숭(曹嵩)과 제(弟) 조덕(曹德)을 포함했던 조 씨(曹氏) 일족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몇 가지의 추리가 있어 소개하면 또 다음과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서무제기본문(魏書武帝紀本文)에 의하면, 조숭(曹嵩)은 퇴관(退官)해서 돌아갔는데, 그때 동탁(董卓)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그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해서 낭야(瑯耶)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도겸(陶謙)이 습격해서 살해했다.

 2. 삼국지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 주(注) 세어(世語)에 의하면, 조숭(曹嵩)은 그때 태산군(泰山郡)의 화현(華縣)에 있었는데, 그러자 조조(曹操)가 조숭(曹嵩)을 만나러 가려 했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도겸(陶謙)이 군을 이끌고 앞질러가서 살해했다.

 3. 삼국지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 주(注) 오서(吳書)에 의하면, 도겸(陶謙)은 조숭(曹嵩)이 영내(領內)를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장개(張闓)를 호위로 붙였다. 그러나 그들이 태산군(泰山郡)의 화현(華縣)과 비현(費縣) 사이를 지났을 때, 갑자기 장개(張闓)가 조 씨(曹氏)의 막대한 재산에 눈이 멀어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는 재산을 전부 챙겨서 달아났다. 그래서 조조(曹操)는 도겸(陶謙)에게 책임을 묻고자 그를 공격했다.

 아무튼, 그러자 가을, 그에 한(恨)을 품었던 조조(曹操)는 복수전(復讐戰)을 결의했고, 이어서 서주(徐州)를 침공했다. 그리고는 도겸(陶謙)의 성(城) 십 수개(數箇)를 빼앗았고, 팽성(彭城)에서도 대승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그 성민(城民) 수만(數萬)을 죽였으며, 그 외에도 살아 있는 것은 모두다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 시체들로 인해서 사수(泗水)가 막혔다고 하며, 그것으로 또 조조(曹操)의 평가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이 조조(曹操)에게 공격당하자 전해(田楷)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러자 전해(田楷)와 유비(劉備)가 그를 도우러 달려갔고, 그 후 유비(劉備)는 도겸(陶謙)의 영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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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손찬(公孫瓚)> 3

 그 즈음, 조정에서는 공손찬(公孫瓚)을 전장군(前將軍) 역후(易侯)에 봉한다는 뜻을 사자(使者) 단훈(段訓)을 파견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나 공손찬(公孫瓚)은 그 단훈(段訓)을 협박해서 유우(劉虞)와 함께 그 일족을 처형해버렸다.(그러나 단, 劉虞의 長子였던 劉和만은 그때 袁紹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
유우(劉虞-?부터 193년)는, 후한(後漢)의 황족(皇族-家系는 劉氏)이었고, 자(字)는 백안(伯安),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종실(宗室)이었던 동해공왕(東海恭王) 유강(劉彊=光武帝의 長男)의 말예(末裔)였고, 조부 유가(劉嘉)는 광록훈(光祿勳)을 지냈던 사람이었으며, 부(父) 유서(劉舒)는 단양(丹陽) 태수(太守)를 지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위(魏)의 중신(重臣)이었던 유엽(劉曄)은 그의 먼 친척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는 명족(名族)의 혈통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공정청렴(公正淸廉)했던 명군(名君)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명사(名士)들과 백성들의 인망(人望)을 한 몸에 모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일례(一例)로, 중산(中山) 태수(太守)였던 장순(張純)이 오환(烏桓)의 구력거(丘力居)와 제휴해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은 그를 유주(幽州) 목(牧)에 임명하고는 그 진압을 맡겼다. 그러자 그때, 이미 그의 인망(人望)을 듣고 있었던 구력거(丘力居)는 싸우지도 않고 귀순했고, 그러자 또 장순(張純)은 선비족(鮮卑族)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선비족(鮮卑族)에서도 그의 인망(人望)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장순(張純)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때, 유우(劉虞)는 칼 한번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인망(人望)으로만 그 반란을 진압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자 그는 원소(袁紹)와 한복(韓馥)의 추천으로 황제 즉위를 권유받았던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자신의 야심 없음을 이유로 그것을 거절했고, 오히려 한조(漢朝)의 영광을 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유주(幽州)에서 세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손찬(公孫瓚)에게는 방해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또한 공손찬(公孫瓚)의 세력 증대를 몹시 위구(危懼)했는데, 그러자 또 그 결과, 그는 193년에 공손찬(公孫瓚)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이민족(異民族)들을 규합해서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런데 바로 그 공손찬(公孫瓚)과의 결전을 바로 목전에 두었을 때, 그의 종사(從事)였던 정서(程緖)가 다음과 같이 진언을 했다. <공손찬(公孫瓚)의 악행(惡行)과 과실은 명백하지만, 그러나 처벌의 명목(名目)이 없고, 그리고 전쟁의 승산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공격을 중지하시고 무위(武威)만 나타내신다면 공손찬(公孫瓚)은 저절로 항복을 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군(軍)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이유로 정서(程緖)를 참수했다. 그러자 유우(劉虞) 군은 곧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사이에 또 그 작전은 공손찬(公孫瓚)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 성 주위에 둘러 세우는 것으로 방패를 삼았다. 그러자 또 유우(劉虞)는 <죽일 사람은 오직 백규(伯珪-公孫瓚의 字) 한명!>이라고 지시했고, 그에 군사들은 성을 공략하다가 모두다 지쳐버렸다.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공손찬(公孫瓚)은 유우(劉虞)의 진영에 화공(火攻)을 걸었고, 그러자 유우(劉虞) 군은 공손찬(公孫瓚)의 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괴멸되었다.

 그 후, 유우(劉虞)는 결국 공손찬(公孫瓚)에게 붙잡혔고, 그러자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명(救命)에 나섰지만, 그러나 공손찬(公孫瓚)은 그를 시장(市場)에다 내놓고 끌고 다닌 후에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자가 만약에 정말로 황제가 될 몸이라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유우(劉虞)는 끝내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일로 유주(幽州) 사람들은 공손찬(公孫瓚)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그리고 또 그때까지 유우(劉虞)를 믿고 있었던 북방의 오환(烏桓)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무튼, 그 침공의 획책을 먼저 했던 것은 명백히 유우(劉虞)였기 때문에, 그래서 공손찬(公孫瓚)의 공격은 예방전쟁(豫防戰爭)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일로 해서 원소(袁紹)와의 대립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유우(劉虞)의 신하들과 유화(劉和) 그리고 원소(袁紹)의 부하였던 국의(麴義)가 연합해서 공격을 걸어왔고,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포구(鮑丘)의 싸움>에서 패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공손찬(公孫瓚)은 역경성(易京城)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이미 10년분의 병량(兵糧)이 확보되어 있었던 데다 아주 튼튼했던 견성(堅城)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 1년 정도의 대치 끝에 병량(兵糧)이 고갈되었던 국의(麴義)와 유화(劉和)가 먼저 철수하려고 했다.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추격해서 대파했다.

 그러자 또 이번에는 원소(袁紹)가 직접 대군을 인솔해서 공격을 해왔고, 그에 또 공손찬(公孫瓚)은 성외(城外)에 있던 장연(張燕)과 공손속(公孫續)과 힘을 합쳐서 원소 군(袁紹軍)을 물리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그런데 또 그 밀서를 가지고 성을 나갔던 밀사(密使)가 원소(袁紹)에게 포획됨으로 해서 그 작전은 누설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공손찬(公孫瓚)은 출격을 개시했고, 이어서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그 후, 원소(袁紹)는 전풍(田豊)과 저수(沮授)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지하에 땅굴을 팠다. 그리고는 그 길을 따라서 군사를 투입시켰고, 이어서 역경(易京)을 공략했다. 그러자 최후를 예감했던 공손찬(公孫瓚)은 성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妻)와 막내 등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는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때가 건안(建安) 4년(199년) 3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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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겸(陶謙)이 궐선(闕宣)과 결탁해서 태산군(泰山郡)의 비현(費縣)과 화현(華縣)을 약탈했다.

 참고: 궐선(闕宣)은 황제를 자칭했던 종교지도자였으며, 삼국지의 위서무제기(魏書武帝紀)에 의하면, 조정으로부터 조조(曹操)에게 그를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왔고, 그 후 도겸(陶謙)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 후,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았던 도겸(陶謙)은 수십(數十) 개의 성을 빼앗겼고, 팽성(彭城)에서도 싸워서 패했다. 그러자 그때, 수만(數萬)의 사망자가 났으며, 그 시체들로 인해서 사수(泗水)가 막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의 도겸전(陶謙傳)에 의하면, 조조(曹操)는 그때 남녀 수십(數十) 만 명을 살해했고, 심지어는 개나 닭 등, 살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결과로 사수(泗水)의 물이 막혔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병량(兵糧) 부족으로 조조(曹操)는 그곳에서 철수했다.

 ⊙
이각(李傕) 등이 실권을 장악했던 조정으로부터 유표(劉表)는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荊州) 목(牧)에 임명되었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원술(袁術)과 조조(曹操)가 싸우게 되자 유표(劉表)는 원술(袁術)의 양도(糧道)를 차단했고, 조조(曹操)를 지원했다.

 그 후, 장제(張濟)가 식량부족으로 형주(荊州)의 양성(穰城)을 공격했지만, 날아 왔던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그러자 유표(劉表)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장제(張濟)는 식량이 부족해서 형주(荊州)에 왔는데, 그런데도 내가 예(禮)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張濟)는 하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그때, 주인을 잃었던 장제(張濟) 군을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장제(張濟) 군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유표(劉表)에게 복종했다고 한다.

 그 후, 조조(曹操)와 원소(袁紹)는 서로 적(敵)이 되었고, 유표(劉表)는 계속해서 원소(袁紹)를 도왔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장제(張濟)군의 장수(張繡)와 힘을 합쳐서 조조(曹操)와 싸우게 된다.<삼국지(三國志)의 무제기(武帝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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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왕광(王匡)> 생몰불명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공절(公節).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출신. 그는 소위 젊었을 때 황금을 돌같이 봤던 성격으로 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던 협객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채옹(蔡邕)과도 친교가 있었으며, 대장군 하진(何進)의 휘하에 있다가 서주<徐州-그러나 노필(盧弼)은 三國志集解에서 연주(兗州)를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군수물자의 보급 등 후방을 담담했다.

 참고:
채옹(蔡邕)은 중국 후한 때의 문인, 서예가, 학자였으며, 생몰년은 133년부터 192년. 자(字)는 백개(伯喈)였고, 시문에 능했으며, 수학과 천문 그리고 서도와 음악 등에도 뛰어 났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고안했으며. 저서로는 <채중랑집(蔡中郞集)>과 <독단(獨斷)> 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었다. 영제(靈帝)의 고문(顧問)을 지냈으며, 딸 채문희(蔡文姬)는 시인(詩人)이었고, 본명은 채염(蔡琰)이었다. 그리고 비백체(飛白體)의 창시자였다.

 중평(中平) 6년(189년), 하진(何進)이 살해 당하자 그는 낙향해서 평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후, 하내(河內)군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초평(初平) 1년(190년), 제후들에 의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조직되자 그도 참가해서 군을 하양진(河陽津)에 주둔시켜 두고는 동탁 군(董卓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탁 군(董卓軍)의 교묘한 협공을 받아서 거의 전멸하는 대패를 맛봤다.

 그 후, 그는 태산(泰山)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군사를 다시 모아서 진류(陳留) 태수(太守) 장막(張邈)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동탁(董卓)이 보냈던 화친(和親)의 사자가 하내(河內)로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위였던 집금오(執金吾=宮中의 警備를 맡았으며, 近衛長官) 호모반(胡母班)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소(袁紹)의 명을 받아서 부득이 그를 죽였다.

 


 


 [191 년]

 ⊙ 초평(初平) 2년(191년), 흑산군(黑山軍)의 반란을 계기로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에 의해서 동군(東郡)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 시기에 많은 인재들이 조조(曹操)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즈음에 조조(曹操)는 호모반(胡母班)의 유족(遺族)들과 손잡고 왕광(王匡)을 살해했다.

 ⊙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해산(解散)한 후, 원소(袁紹)는 원술(袁術)과의 대립이 깊어졌다. 그러자 각 제후들은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맹약들을 맺었고, 그때 원소(袁紹)와 동맹을 했던 사람들은 조조(曹操)와 유표(劉表) 그리고 한복(韓馥) 등이었고, 원술(袁術)과 동맹을 맺었던 사람들은 손견(孫堅)과 공손찬(公孫瓚) 그리고 도겸(陶謙)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헌제(獻帝)를 반대했고, 그래서 당시 대사마(大司馬)였던 유우(劉虞)를 다시 옹립하려고 계획했지만, 그러나 그에는 또 원술(袁術)과 공손찬(公孫瓚)이 강하게 반발했다.

 191년, 원소(袁紹)는 계략으로 한복(韓馥)에게서 기주(冀州) 목(牧=州牧=刺史)의 지위를 양도(讓渡) 받았고, 그것은 또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봉기(逢紀)가 원소(袁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결과였다고 한다. <공손찬(公孫瓚)에게 한복(韓馥)을 공략하라고 명하면, 한복(韓馥)은 필시 겁을 먹을 것이므로 바로 그때에 사자를 파견해서 이해득실을 따져주면, 그는 필시 기주(冀州)를 양도하게 될 것입니다>

 ⊙ 손견(孫堅)이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있었을 때, 원소(袁紹)가 주우(周喁)를 다시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보냈다. 그러자 원술(袁術)과 원소(袁紹)의 대립은 깊어지게 되었다. 그 후, 각 제후들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과의 동맹을 맺었고, 그 후에 또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은 주우(周喁) 등을 몰아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손찬(公孫瓚)의 종형제(從兄弟)였던 공손월(公孫越)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 191년 또는 192년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유표(劉表)를 공략하라고 시켰지만, 손견(孫堅)은 실패하고 죽었다.

 


 [192 년]

 ⊙ 조조(曹操)가 흑산군(黑山軍)의 본거지를 공격해서 휴고(眭固)와 흉노(匈奴)의 어부라(於夫羅)에 대승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여름 4월에는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살해 당했으며,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도 청주(靑州)에서 왔던 황건군(黃巾軍)에게 살해되었다.

 참고: 앞의 글과 중복되는 것이 많지만, 연대순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다시 소개합니다.

 그리고 또 그때, 포신(鮑信) 등이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맞이했다.
 그 후, 조조(曹操)는 청주(靑州)의 황건 군(黃巾軍)을 항복시켰고, 청주병(靑州兵=靑州軍)을 결성했다.

 ⊙ 공손찬(公孫瓚)은 그때 원술(袁術)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192년에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이 대립하게 되자 그는 원술(袁術)의 요청을 받아서 유비(劉備)를 고당(高唐)에, 단경(單經)을 평원(平原)으로 그리고 또 서주(徐州) 목(牧)이었던 도겸(陶謙)을 발간(發干)에 각각 주둔시켜서 원소(袁紹)를 압박했다.

 그런데 그 즈음에, 평원(平原) 출신의 유평(劉平)이 유비(劉備) 휘하에 들었던 것에 불쾌감을 느껴서 자객을 파견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러자 또 그에 감동했던 자객은 자신의 일을 유비(劉備)에게 전부 말해주고는 다시 돌아갔다.(魏書에서)

 ⊙
원술(袁術)이 연주(兗州)에 있던 조조(曹操)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원소(袁紹), 조조(曹操), 유표(劉表) 연합군에 대패했다. 그런데다 또 유표(劉表)에게 배후까지 차단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본거지였던 남양군(南陽郡)을 버리고 양주(揚州)로 도망가서 수춘(壽春)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 이각(李傕)이 장안(長安)으로 들어갔고, 원술(袁術)과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원술(袁術)은 좌장군(左將軍=陽翟侯)에 임명되었다.

 그 후,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의 유아(遺兒)였던 손책(孫策)에게 양주(揚州)를 공략시켜서 여강(廬江) 태수(太守)였던 육강(陸康)과 양주(揚州) 자사(刺史)였던 유요(劉繇)를 토벌했던 등, 세력을 확대했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은 그 획득했던 영토를 자신의 장군들에게 모두 분배시켜 버렸다. 그러자 손책(孫策)은 그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것은 또 나중에 원술(袁術)을 배신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바로 그 시기에 아직 어렸던 육적(陸績=陸康의 子)이 원소(袁紹)를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원소(袁紹)가 그에게 밀감(蜜柑)을 주었고, 그러자 또 육적(陸績)은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주려고 몸 속에 숨겼다. 그러자 또 원소(袁紹)가 그것을 알고는 그를 매우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24효(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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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책(孫策)> 175年–200年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장군. 자(字)는 백부(伯符). 시(諡)는 장사환왕(長沙桓王). 오군(吳郡) 부춘(富春) 또는 오군부춘(吳郡富春-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손견(孫堅)의 장자(長子). 아우는 오(吳)의 초대황제 손권(孫權).

 19세 때, 그는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자 원술(元述) 군에 흡수되어 있었던 손견(孫堅) 군 1000여명을 모아서 군(軍)을 만들었고, 그 군세로 유요(劉繇)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그 후, 그는 원술(袁術)로부터 독립해서 크게 활약했지만, 그러나 또 건안(建安) 5년(200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았고, 그때의 부상으로 인해서 향연 26세에 죽었다. 그러자 그의 후계는 동생이었던 손권(孫權)으로 정해졌고, 나중에 그 손권(孫權)에 의해서 그의 시(諡)는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약진(躍進)의 눈부심으로 인해서 소패왕(小覇王)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그의 모(母)는 오부인(吳夫人=吳景의 姉)이었고, 동생은 손권(孫權) 외에 손익(孫翊), 손광(孫匡)이 있었다. 그리고 이모매(異母妹)에 손부인(孫夫人=劉備의 妻)이 있었고, 정처(正妻)는 불명이다.
그리고 또 첩(妾) 또는 처(妻)에 대교(大橋)가 있었다.

 참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대교(大喬)라고 했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정처(正妻)였다고 되어 있다.

 자(子)는 손소(孫紹), 그 외에 딸 세 명은 각각 고소(顧邵=顧雍의 長子), 육손(陸遜), 주기(朱紀=朱治의 次子)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그는 항상 용모단정(容貌端正=容姿端麗)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소년 때는 동년(同年)의 주유(周瑜)와 사귀었고, 그 우정은 그가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우정을 세인들은 <단금(斷金)의 교(交)>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 오서(吳書)의 손파노토역전(孫破虜討逆傳) 강표전(江表傳)에서는 <의동단금(義同斷金=金도 자를 만큼의 義理)>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은 또 원래는 역경(易經)의 <二人同心 其利斷金=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금(金)도 자를 수 있는 힘이 생긴다>이란 말에서 유래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는, 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자, 잠시 동안 강도(江都)로 이주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손견(孫堅)의 군사들이 모두 원술(袁術)의 군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의 곁에는 그 강도(江都)에서 만났던 여범(呂範)과 일족이었던 손하(孫河)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는 원술(袁術)의 권유로 단양군(丹陽郡)의 태수(太守)였던 오경(吳景)에 의지하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러나 그 단양(丹陽)의 수령(首領)이었던 조랑(祖郞)에게 대패하고는 원술(袁術)에게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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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손찬(公孫瓚)> 2

 그 후, 공손찬(公孫瓚)은 군웅(群雄)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는 원소(袁紹)와 대결하기 위해서 원술(袁術)과 손을 잡았지만, 그러나 그 원소(袁紹)와의 싸움에서 그는 자신의 종제(從弟)였던 공손월(公孫越)을 잃었다. 그러자 공손찬(公孫瓚)은 그에 격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이 두려웠던 원소(袁紹)는 공손찬(公孫瓚)의 또 다른 종제(從弟)였던 공손범(公孫範)을 발해(渤海) 태수(太守)에 임명한다는 인수(印綬)를 보냈다. 그리고는 또 그에게 시켜서 공손찬(公孫瓚)과의 강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그 공손범(公孫範)은 임지에서 군병(郡兵)을 손에 넣게 되자 원소(袁紹)를 배신하고는 공손찬(公孫瓚)에 가담했다.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자신의 수하들을 차례로 주(州)의 자사(刺史)로 임명하고는 계교(界橋)의 원소(袁紹)와 국의(麴義) 그리고 전풍(田豊) 등과 싸웠지만 패했고, 그러자 그는 북(北)으로 도망갔다.

 그 후, 최거업(崔巨業) 등이 인솔했던 수만(數萬)의 원소 군(袁紹軍)에 의해서 고안성(故安城)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최거업(崔巨業) 등은 그 성을 끝까지 공략하지 못했고, 그러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최거업(崔巨業)은 그곳에서 철퇴했다. 그러자 또 그때, 공손찬(公孫瓚)과 전해(田楷) 등이 인솔했던 3만의 병력이 그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거마수(巨馬水)란 곳에서 그들을 크게 이겼다.

 그 후, 공손찬(公孫瓚)은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남진(南進)했다. 그리고는 각(各) 군현(郡縣)들을 차례로 공략해 들어갔지만, 그러자 또 원소(袁紹)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수만(數萬)의 군사를 파견시켰고, 그 결과 양군(兩軍)은 약 2년간에 걸쳤던 장기전(長期戰)에 돌입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공손찬(公孫瓚)의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 그때, 공손찬(公孫瓚)의 본거지였던 유주(幽州)에는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유우(劉虞)와 공손찬(公孫瓚)은 오환(烏桓)과 선비족(鮮卑族)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그러자 유우(劉虞)는 공손찬(公孫瓚)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는 그 주위의 이민족(異民族)들과 제휴해서 수만(數萬)의 군대를 모았다. 하지만 또 그때, 유우(劉虞)의 막료(幕僚)였던 공손기(公孫紀)가 그 사실을 공손찬(公孫瓚)에게 밀고했고, 그러자 또 공손찬(公孫瓚)은 정예기병 수백(數百)을 이끌고는 유우(劉虞)의 군대를 기습했다. 그리고는 아주 철저하게 파괴한 후, 다시 집요하게 추격한 결과, 193년에 마침내 유우(劉虞)를 포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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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겸(陶謙)> 132년-194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장군. 자(字)는 공조(恭祖). 양주(揚州) 단양군(丹陽郡) 여요현(余姚縣-현재의 山東省과 河南省의 경계) 출신.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결국 태학(太學-지금의 大學)에 들어갔다.

 참고: 도겸전(陶謙傳) 주(注) 오서(吳書)에는, 도겸(陶謙)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그 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며, 14세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골목대장 짓을 했다고 되어있다.

 그 후, 그는 귀향해서 군(郡)과 주(州)의 관료를 지냈으며, 결국에는 무재(茂才)의 추천을 받아서 현령(縣令)이 되었고, 그 후에는 또 유주(幽州)의 자사(刺史)로 승진했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일어나자 서주(徐州)의 자사(刺史)가 되었고, 황건적(黃巾賊)을 패주시켰다.
 185년, 중앙(中央)으로 다시 소환되었고, 차기장군(車騎將軍)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 한수(韓遂)와 변장(邊章) 등을 토벌하기 위해서 양주(凉州)로 원정을 떠났다.

 참고: 그 시기에 그는 상관이었던 장온(張溫)을 모욕해서 장온(張溫)을 격노시켰다. 그리고 삼국지의 위서동탁전(魏書董卓傳)과 동(同) 오서손견전(吳書孫堅傳)에 의하면, 장온(張溫)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동료였던 동탁(董卓)과 손견(孫堅) 등이 불만을 품었다고 되어 있다.

 190년,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자 도겸(陶謙)은 서주(徐州)에서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도망을 가자 공물(貢物)을 조정에 바치고는 안동(安東)장군, 서주(徐州) 목(牧)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에는 양주(揚州)에까지 손을 뻗쳐서 그는 2개의 주(州)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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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표(劉表)> 142년-208년 8월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유학자. 자(字)는 경승(景升).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현재의 山東省과 河南省의 경계)출신. 그의 가계(家系)는 유 씨(劉氏)였으며,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제4자(子)였던 노공왕(魯恭王) 유여(劉余)의 자손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통제력이 상실된 후, 형주(荊州)를 할거했으며, 대장군 하진(何進)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영제(靈帝) 사후(死後)에는 칙서를 받아서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임지로 떠났다. 그러나 당시, 장강(長江) 남안(南岸)은 토호(土豪)들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주치(州治)였던 한수(漢壽)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북부의 의성(宜城)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채모(蔡瑁), 괴월(蒯越), 괴랑(蒯郞) 등과 힘을 합쳐서 불온분자들을 진압했고, 그 결과 형주(荊州) 북부를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참고: 그러나 나중에 주치(州治)를 의성(宜城) 근처의 양양<襄陽-현재의 湖北省 양번시(襄樊市) 北部>으로 옮겼다.

 190년, 각지에서 반 동탁(董卓) 의병들이 거병하자 그도 참가했다.
 192년(그러나 191년이란 설도 있다), 원술(袁術)의 명을 받았던 손견(孫堅)이 형주(荊州)를
침입했다. 그러자 유표(劉表)는 황조(黃祖)에게 시켜서 그것을 막게 했던 한편, 자신은 또 원소(袁紹)와 동맹을 맺어서 손견(孫堅)에 대항했다. 그러자 황조(黃祖)는 무척 고전했지만, 그러나 손견(孫堅)을 죽이고 형주(荊州)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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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각(李傕)> ?-198년 4월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동탁(董卓)의 부하로 활약했으며, 동탁(董卓) 사후(死後)에는 장안(長安)을 강습(强襲)해서 여포(呂布)를 몰아냈고, 왕윤(王允)과 황완(黃琬) 등을 숙청시켰다. 그 후, 헌제(獻帝)를 옹립시켜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하지만 또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곽사(郭汜)와 다투었고, 끝내는 조조(曹操)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년 4월에 배무(裵茂), 단외(段煨)에게 토벌되었다.

 그의 이름이 사서(史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초평(初平) 2년(191년)이며, 그때 그는 손견(孫堅)에게 강화를 요청하는 사자로 등장했다.(단, 그 교섭은 결렬되었고, 강화는 무산되었다) 그 후, 손견(孫堅)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동탁(董卓)의 사위였던 우보(牛輔)와 함께 협현(陜縣)에 남았다. 그 후, 먼저 동탁(董卓)의 명으로 낙양(洛陽) 방면으로 파견되었다가 원술(袁術)에게로 돌아섰던 주준(朱儁)이 형주(荊州)에서 낙양(洛陽)으로 진격해오자 그는 곽사(郭汜)와 함께 주준(朱儁)을
물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그 여세를 몰아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과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의 제현(諸縣)으로 진격해서 남자들은 모두 죽였고, 여자들은 잡아서 모두 끌고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홍농왕(弘農王) 유변(劉弁)이 이유(李儒)에게 살해 당했다. 그러자 유변(劉弁)의 황후였던 당희(唐姬)는 고향 영천(潁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그곳을 공격해 왔던 이각(李傕)에게 포획되었다. 그리고는 이각(李傕)에게 결혼을 강요 받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완강히 거절하자 이각(李傕)은 그녀를 처형했다.

 그 후, 동군(東郡)의 순욱(荀彧)이 이각(李傕)의 침공을 염려해서 장로(長老)들에게 신속한 피난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순욱(荀彧)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순욱(荀彧)은 자신의 가족들만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그 후, 실제로 이각(李傕)이 그곳으로 쳐들어왔고, 그러자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초평(初平) 3년(192년) 4月,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와 왕윤(王允)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왕윤(王允)은 군(軍)이 대부분 양주(凉州)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염려해서 군(軍)을 해산하기로 마음 먹고는 우선 이숙(李肅)에게 명해서 협현(陜縣)의 우보(牛輔)와 이각(李傕) 등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이숙(李肅)은 오히려 우보(牛輔)의 반격을 받아서 패했고, 우보(牛輔) 또한 자신의 부하였던 복호적아(攴胡赤兒)의 배신으로 살해 당했다.

 그 후, 이각(李傕)은 왕윤(王允)에게 사면(赦免)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고, 그러자 또 그 시기에 장안(長安)에서는 양주(凉州) 출신자들은 모두 잡아서 죽인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각(李傕) 등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사태를 주목했다. 그러나 곧 가후(賈詡)의 진언을 받아서 곽사(郭汜) 등과 함께 십만(十萬) 대군을 모아서 장안(長安) 기습을 결의했다. 그리고 또 동시에, 자신의 군(軍)에 소속되어 있던 병주(幷州) 출신자들을 모두 살해했다.(王允과 呂布가 幷州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러자 또 그것을 미리 알아 차렸던 왕윤(王允)은 과거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호진(胡軫)과 서영(徐榮) 그리고 양정(楊定) 등에게 이각(李傕)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고, 서영(徐榮)은 이각(李傕)에게 패했으며, 호진(胡軫)과 양정(楊定)은 신풍(新豊)까지 진격해서 그곳에서 이각(李傕)에게 붙었다.

 동년(同年) 6월, 장안성(長安城)이 이각(李傕) 군에 포위되었고, 8월에는 낙성(落城)되었다. 그러자 이각(李傕)은 왕윤(王允)을 잡아서 여덟 토막으로 찢어 죽였고, 여포(呂布) 일당도 장안(長安)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여 9월, 이각(李傕)은 차기장군(車騎將軍) 개부(開府) 영사예교위(領司隸校尉) 가절(假節) 지양후(池陽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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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제갈량(諸葛亮)>



 

 181年-234年.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서 삼국시대의 촉한(蜀漢)까지의 정치가, 무장, 군략가(軍略家), 발명가. 자(字)는 공명(孔明). 사예교위(司隸校尉) 제갈풍(諸葛豊)의 자손. 태산군(泰山郡) 승(丞) 제갈규(諸葛珪)의 아들. 시(諡)는 충무후(忠武侯). 촉한(蜀漢)의 건국자 유비(劉備)를 도왔고,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했다. 복룡(伏龍), 와룡(臥龍)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지금도 성도(成都)에는 그를 모시는 무후사(武侯祠)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아내는 황부인(黃夫人)이었다. 그리고 아들(子)은 촉한(蜀漢)의 신하였다가 면죽(綿竹=成都 부근)에서 전사했던 제갈첨(諸葛瞻)이 있었다. 그리고 손(孫)에는 역시 촉한(蜀漢)의 신하였고 또한 면죽(綿竹)에서 전사했던 제갈상(諸葛尙)과 서진(西晋)의 강주(江州) 자사(刺史)를 지냈던 제갈경(諸葛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의 친족은 숙부(叔父)였던 예장(豫章) 태수(太守) 제갈현(諸葛玄), 오(吳)의 신하였던 형 제갈근(諸葛瑾), 그리고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제갈각(諸葛恪) 등이 있었고, 동생이면서 같은 촉한(蜀漢)의 신하였던 제갈균(諸葛均) 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일족(一族)으로는 위(魏)의 신하였던 제갈탄(諸葛誕)과 그 외에 제갈장(諸葛璋), 제갈서(諸葛緖), 제갈건(諸葛虔), 제갈원(諸葛原=景春)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낭사군(琅邪郡) 양도(陽都=현재의 山東省 臨沂市 沂南縣)가 본관(本貫)이지만, 그러나 출생지는 불명(不明)이다. 그리고 키는 8척(尺)이었다고 한다.

 참고: 後漢의 경우에서는 1尺이 23cm였기 때문에 8尺은 184cm로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魏와 西晋의 경우에서는 1尺이 24.1cm였으므로, 그래서 또 8尺은 192.8cm로 계산할 수 있다.

 아무튼, 그의 부(父) 제갈규(諸葛珪)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고, 생모 장 씨(章氏)도 역시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그리고 제갈규(諸葛珪)는 장 씨(章氏)가 죽자 송 씨(宋氏)와 재혼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동생 제갈균(諸葛均)과 함께 그는 서주(徐州)에서 숙부(叔父) 제갈현(諸葛玄)을 따라서 남쪽으로 이주했다.

 참고: 삼국지(三國志) 본전(本傳)에서는, 그때 제갈현(諸葛玄)이 원소(袁紹)의 명령을 받아서 예장(豫章) 태수(太守)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후한(後漢)의 조정으로부터 주호(朱皓=朱儁의 子)가 예장(豫章) 태수(太守)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갈현(諸葛玄)은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 배송지(裵松之)의 <헌제춘추(獻帝春秋)>에서는, 조정이 임명했던 예장(豫章) 태수(太守) 주술(周術)이 병사(病死)하자, 유표(劉表)가 그 대신으로 제갈현(諸葛玄)을 임명했는데, 그런데 또 조정에서 주호(朱皓)를 보냈고, 그러자 또 그 주호(朱皓)는 유요(劉繇)의 힘을 빌려서 제갈현(諸葛玄)을 쫓아냈다. 그러자 제갈현(諸葛玄)은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건안(建安) 2년(197년)에 민중의 반란에 휩쓸려서 살해 당했으며, 그러자 그 머리는 유요(劉繇)에게 보내졌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또, 그 후에 그는 형주(荊州)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면서, 즐겨 양부음(梁父吟)을 불렀다고 한다.

 참고: 晴耕雨讀은,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여가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공부함을 이르는 말이며, 혹은 悠悠自適으로도 해석이 됨.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양부음(梁父吟)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양부음(梁父吟)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의하면, 제갈량(諸葛亮)은 산동성(山東省) 출신이었고, 일본에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형 제갈근(諸葛瑾)은 7세 위였으며, 그가 9세였을 때 모(母)가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또 그가 12세 때는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제갈근(諸葛瑾)은 계모가 싫어서 오(吳)로 가서 손권(孫權)의 신하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공명(孔明)은 동생 제갈균(諸葛均)과 함께 숙부였던 제갈현(諸葛玄)을 따라서 형주(荊州)로 이주했다.(그리고 그 동생 제갈현(諸葛玄)은 그가 16세 때, 살해 당했다)

 그 후, 그는 양양(襄陽) 북서(北西)의 융중(隆中)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의 나날들을 보내며 당시, 후한(後漢)에서는 일류(一流) 명문(名門)이었던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 그리고 유학(遊學) 동무였던 석도(石韜), 맹건(孟建) 등과 교우(交友)했다.

 그러자 당시, 형주(荊州)에서는 그의 친구였던 사원(士元=龐統)과 함께 <孔明=臥龍. 士元(龐統)=鳳雛>라고 평(評)했다.


ファイル:PangTong.jpg

 



 그리고 또 당시, 그 공명(孔明)의 초로(草蘆)에서 약 7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신야(新野)에는 유비(劉備)가 살고 있었는데, 그러자 유비(劉備)는 서서(徐庶)의 추천을 받아서 그에게 <삼고(三顧)의 예(禮)>를 다했고, 그는 또 그에 감동하여 유비(劉備)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파(說破)하게 된다...(하략)

 <梁父吟 또는 梁甫吟>

 제(齊)의 양부산(梁父山)에 가까웠던 지방(地方)의 일을 노래했던 시(詩)였으며
 무명씨(無名氏)의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步出齊城門,遙望盪陰裡
 里中有三墳,累累正相似
 問是誰家墓,田疆古冶氏
 力能排南山,又能絕地紀
 一朝被讒言,二桃殺三士
 誰能為此謀,相國齊晏子

 그리고 또 아래는 제갈량(諸葛亮)이 즐겨 불렀다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詩)이다.

 步出齊城門 보출제성문
 遼望蕩陰里 요망탕음리
 里中有三墳 이중유삼분
 壘壘正相似 루루정상사
 間是誰家墓 간시수가묘
 田疆古冶氏 전강고야씨
 力能排南山 역능배남산
 文能絶地紀 문능절지기
 一朝被讒言 일조피참언
 二桃殺三士 이도살삼사
 誰能爲此謀 수능위차모
 國相齊晏子 국상제안자


 <풀이 1>

 걸어서 제의 성문을 나서자
 멀리 보이는 탕음의 동네
 그곳에 무덤이 삼기(三基)가 있는데
 쌓고 또 쌓아 놓은 것이 서로들 닮아 있다
 물으매 과연 그 누구의 묘인가
 그야 당연, (公孫接) 전개강(田開彊) 고야자(古冶子)의 묘일테고
 힘 능히 남산을 넘어 뜨리고
 학문 능히 빼어났지만
 하루 아침에 중상모략을 당해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인사(人士)가 죽었음이라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던가
 제의 국상 안자 말고 그 외에 또 누가 있으리

 <풀이 2>

 제의 성문을 홀연히 나서자
 멀리서 탕음의 동네가 보인다
 흙 높이 쌓여진 것이 어딜 봐도 한 모양이다
 아하, 저것이 누구의 묘이던가
 전강 고야 씨의 것이 아니었던가
 무용(武勇)으로 말하자면 산을 무너 뜨렸고
 국사(國事)의 재능 또한 마음껏 뽐냈던 그들
 하지만 한 번의 참언을 당해서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용사(勇士)가 죽고 말았구나
 그 모략을 성사시켰던 자 과연 누구였던가
 제 상국(相國) 안자,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해설>

 당시(기원전 500년 전), 제(齊)에는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그러나 古治子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공손접(公孫接)이라는 삼인(三人)의 용사(勇士)들이 있었다.(그러나 詩에서는 글자의 數를 맞추기 위해서 田疆古冶氏로 줄였음)

 그러자 그들이 권력을 휘둘러서 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자(晏子=晏嬰)는 왕과 모의해서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왕 앞으로 불려왔던 그 세 사람에게 안자(晏子)는 복숭아 두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당신들 중에서 공적이 제일로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복숭아를 드시오!"

 그러자 전개강(田開疆)과 공손접(公孫接)이 재빨리 그 두 개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손이 늦었던 고야자(古冶子)가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나야말로 이 중에서 제일이다!"

 그리고는 곧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전개강(田開疆)과 공손접(公孫接)은 자신들의 공적이 고야자(古冶子)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먼저 복숭아를 취했다는 수치심에 자결했다. 그러자 또 고야자(古冶子)도 자신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자살했고, 그것으로 안자(晏子)의 계략은 성공했다.(하략)

 참고: 齊城은 齊都 臨淄에 있었으며, 盪陰裡는 陰陽里의 다른 이름이었고, 南山은 또 齊城의 南面에 있던 牛山이었다고 함. 그리고 또 다른 해석으로 '一朝'를 '一旦'으로 해석한 것도 있다.



 아무튼, 그 시기에 그는 스스로 관중(管仲-더욱 상세한 것은 6-15참조바람)과 낙의(樂毅-더욱 상세한 것은 6-41참조바람)에 비교했다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그것을 인정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만 친구였던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만이 그것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 그는 현지의 명사(名士)였던 황승언(黃承彦)의 딸과 혼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또 배송지(裵松之)의 양양기(襄陽記)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황승언(黃承彦)은 거기서 <나의 딸은 얼굴이 검고 못생겼지만, 그러나 재능으로 말하자면 너와 결혼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으로 그렇게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그러자 또 그때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공명(孔明)을 비웃으며 <신부를 고르더라도 공명(孔明)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로는 <못 생긴 여자를 고르는 것>을 <공명(孔明)의 신부 선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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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유비(劉備)> 2

 161년-223년 6월 10일. 후한(後漢) 말에서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촉(蜀漢)의 초대황제. 황건(黄巾)의 난(亂) 때((靈帝) 공적을 올렸으나 그 후로는 각지로 전전했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을 만나면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수용(受容)했고, 촉(蜀)으로 가서 세력을 키웠다. 그 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제에 즉위했고,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자(字)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재위(在位)는 221-223년. 부(父)는 유홍(劉弘).






 명대(明代)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탁군(涿郡) 탁현(涿縣=현재의 河北省 保定市 涿州) 출신이었고, 전한(前漢)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말예(末裔)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부(祖父)는 유웅(劉雄), 부(父)는 유홍(劉弘)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웅(劉雄)은 또 효렴(孝廉)에 추천된 후, 낭중(郎中)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연주(兗州) 동군(東郡) 범현(范縣)의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유홍(劉弘)도 주군(州郡)의 관리(官吏)를 지냈었지만, 그러나 유비(劉備)가 아직 어렸을 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로는 토호(土豪=現地의 小豪族)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궁핍해져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서 내다 팔며 생활했다.

 그리고 또, 그의 어렸을 때의 일화(逸話)로, 당시 그의 집 앞에는 아주 큰 뽕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나도 이 다음에 커서 천자(天子)가 타고 다니는 () 마차를 탈 것이야! 당시, 천자의 마차는 뽕나무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자 그때, 그의 숙부(叔父) 유자경(劉子敬=劉弘의 弟)이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그를 나무랐다고 한다. <아이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몰살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 다음, 그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당시 종부(從父=叔父)였던 유원기(劉元起=劉雄의 甥)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를 유덕연(劉德然=劉備의 四寸)과 함께 당시 동향(同鄕)에서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노식(盧植)의 문하(門下)에 들어가서 수학(受學)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때의 동창(同窓)으로는 요서(遼西)의 호족(豪族) 태생이었지만 서자(庶子)였던 공손찬(公孫瓚)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대단히 친하게
지냈고,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그를 형(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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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식(盧植) ?-192년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장군, 유학자. 자(字)는 자간(子幹). 자(子)는 노육(盧毓) 등, 적게 잡아도 3명은 있었다고 생각되며, 태생은 유비(劉備)와 동(同) 탁현(涿縣)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장이 8척2촌(8尺2寸=약195cm)이나 되었다고 하며, 그 목소리는 또 종소리처럼 우렁찼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렸을 때는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에게서 유학을 배웠고, 그 후 귀향(歸鄕)해서 강학(講學)했다. 그리고 또 그는 고금(古今)의 서(書)에 통달했으며, 그 박학(博學)에다 절의(節義)까지도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때문에 또 그는 영제(靈帝) 건영(建寧) 연간 중에 조정으로 불려가서 박사(博士)가 되었고, 이어서 175년(熹平 四年), 구강(九江)의 남이(南夷)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문무(文武) 겸비의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서 구강(九江)의 태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 또 그는 시중(侍中)과 상서(尙書)로 승진했으며, 그 사이에 또 여러 가지의 저작도 행했지만, 그러나 또 <당고(黨錮)의 금(禁)> 때 귀향해서 학사(學舍)를 주재(主宰)하며 유비(劉備)나 공손찬(公孫瓚)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북중랑장(北中郞將)에 임명되어 장각(張角)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환관이었던 좌풍(左豊)이 요구했던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함을 당했고, 그 후에는 관직삭탈(官職削奪=削奪官職) 되었다. 하지만 또 나중에 황보숭(皇甫嵩)의 도움을 받아서 면죄되었고, 이어서 다시 상서(尙書)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원소(袁紹) 등이 주도했던 환관주살(宦官誅殺)에도 참가해서 큰 도끼를 들고는 도망가려던 환관들을 못 도망가게 지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에 동탁(董卓)이 실권을 잡았고, 이어서 황제를 바꾸려고 했을 때 그는 반대했으며, 그러자 또 그는 동탁(董卓)에 의해서 죽을 고비도 넘겨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런 동탁(董卓)의 전횡에 염증을 느끼고는 고령을 이유로 낙향해서 상곡(上谷)의 군도산(軍都山)에서 은거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원소(袁紹)의 초대를 받아서 참모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고령으로 192년에 병사(病死)했다. 그러자 조조(曹操)는 몹시 슬퍼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서는 황건(黃巾)의 난(亂)을 진압하던 중, 제자였던 유비(劉備)를 만나게 되자 유비(劉備)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재회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려냈고, 그 후에 또 노식(盧植)이 내시들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호송(護送)되었을 때, 유비(劉備)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든지 또는 장비(張飛)가 무력으로 그를 구하려 하자 장비(張飛)를 나무라는 것으로 그것을 멈추게 했다는 등의 명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의 저서로는 <상서장구(尙書章句)>와 <예기해고(禮記解詁)>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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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학생 시대의 유비(劉備)는 승마(乘馬)와 투견(鬪犬) 그리고 음악(音樂)을 무척 좋아했으며, 옷도 잘 입었던 편이어서 동료들 중에서도 눈에 띄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협객(俠客)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호협(豪俠)들과 사귀기를 좋아했으며, 그래서 항상 그의 주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말(馬) 장사를 하면서 제국(諸國)을 돌아다니던 중산(中山)의 호상(豪商)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고는 큰 돈으로 지원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 돈으로 인물들을 모으고는 그 수령이 되었다.

 그 후, 황건(黄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그리고 간옹(簡擁)과 전예(田豫) 등과 함께 의용군(義勇軍)을 결성했고, 당시 교위(校尉)였던 추정(鄒靖)의 휘하로 들어가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자 그 공으로 그는 중산국 안희현(中山國 安熹縣)의 위(尉)에 임명되었다.

 참고: 전략(典略)에 의하면, 187년에 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주(青州) 자사(刺史)가 그것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그 토벌군이 평원(平原)을 통과했을 때, 유자평(劉子平 혹은 劉平?)이 나서서 유비(劉備)가 무용(武勇)이 뛰어 나다고 말하며 그를 종사(從事)에 추천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그들과 함께 종군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는 전야(田野)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거의 사망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마침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그러자 그 공(功)으로 그는 중산국 안희현(中山國 安熹縣)의 위(尉)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군(郡)의 독우(督郵=관할하의 縣을 감찰했던 직. 定員은 1명이었음)가 공무(公務) 차 안희(安熹)에 왔을 때, 그는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 당하자 화가 나서 그대로 쳐들어 갔다. 그리고는 그 독우(督郵)를 묶어 놓고 곤장을 200대나 친 다음 그의 목에다 자신의 인수(印綬)를 걸어 놓고는 그대로 도망쳤다.

 참고: 인수(印綬)는 중국에서 신하에게 인장(印章)을 하사하는 것으로서 관직을 증명했던 제도를 말했던 것으로, 인(印)은 인장(印章), 수(綬)는 그 인장(印章)을 늘어뜨리기 위한 길고 널찍한 포(布) 또는 끈을 의미했음. 그러므로 그 인수(印綬)를 보게 되면 한눈에 어느 정도의 지위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함. 같은 말로는 인끈, 녹수 등.

 아무튼 그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였던 관구의(毌丘毅)를 단양군(丹陽郡)에 파견했다. 그러자 유비(劉備)는 관구의(毌丘毅)의 휘하로 들어가서 하비(下邳)로 종군했다. 그리고 하비(下邳)에서 공적을 올려서 하밀현(下密縣)의 승(丞)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오래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또 그는 고당현(高唐縣)의 위(尉)가 되었고, 그 후에 또 승진해서 현령(縣令)이 되었다.

 참고: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영제(靈帝) 말년(末年)에 유비(劉備)는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 후에 조조(曹操)와 함께 패(沛)로 들어가서 의병을 모집했고, 그 후 조조(曹操)와 함께 동탁(董卓) 토벌에 나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년, 싸움에서 졌던 그는 옛날 동문수학(同門受學)했던 공손찬(公孫瓚)을 찾아가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청주(靑州) 자사(刺史)였던 전해(田楷)를 도와서 원소 군(袁紹軍)과 싸웠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그때의 전공으로 공손찬(公孫瓚)의 추천을 받아서 평원현(平原縣)의 가령(假令)이란 지위를 얻었고, 그 후에는 또 그곳의 상(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그는 침략해 왔던 도적을 물리쳤으며, 백성들에게도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었다든지, 그리고 또 신분이 낮은 군사들을 차별하지 않았다든가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이하,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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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우(關羽)> 1



 ?-219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유비(劉備)와 함께 싸웠던 무장. 자(字)는 운장(雲長). 그러나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 사예(司隸)의 하동군해(河東郡解-현재의 山西省 運城市 常平鄕 常平村) 출신. 봉호(封號)는 한수정후(漢壽亭侯). 시(諡)는 역대 왕조로부터 많이 하사 받았기 때문에 일단 생략 또는 후술함. 그는 훌륭한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미염공(美髥公)으로도 불렸다. 자(子)로는 관평(關平)과 관흥(關興)이 있었다.

 그는 비범한 무용(武勇)과 함께 조조(曹操)가 의리(義理)의 표상(表象)으로 격상시켰던 후부터, 후세(後世)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화(神格化)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관제(關帝=關聖帝君=關帝聖君)로서 47번째의 신(神)이 되었고, 그리고 또 신의(信義)가 두터웠던 것으로 해서 <장사(商業)의 신(神)>도 되었다. 그래서 현재,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중화가(中華街=Chinatown)에서 지금도 그를 위한 제사가 모셔지고 있다.


< 사진은 요코하마(横浜)의 善隣門 >


 그리고 또 그는 주판(珠板)을 발명했던 사람이란 전설이 있으며, 그리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서는 <(그는) 운장(雲長) 또는 관운장(關雲長) 혹은 관공(關公), 관모(關某)라고 불렸고, 일관된 시(諡)를 명지(名指)하지 않았다>라고 했고, 그리고 또 <대 활약하는 장면이 장려(壯麗)하게 그려져 있()>는 등, 그를 특별하게 취급했다.

 아무튼, 그는 출신지(河東郡解)가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인 해지(解池) 근처였기 때문에, 소금의 밀매매(密賣買)에 관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또 그 과정에서 소금으로 폭리를 취했던 상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또 관리들에게 쫓겨서 유주(幽州)로 도망가서는 관우(關羽)로 개명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장비(張飛)와 유비(劉備)를 만났고, 또한 그때부터 평생 유비(劉備)에게 충성했다.

 그 후, 유비(劉備)가 자신의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는 장비(張飛)와 함께 유비(劉備)의 호위관(護衛官)이 되었다.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에게 형제의 예를 다했고, 그리고 또한 관우(關羽)는 당시 유비(劉備)보다 연상이었지만, 그러나 유비(劉備)를 형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장비(張飛)>



 ?-221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유비(劉備)와 함께 싸웠던 무장. 삼국지(三國志-正史)에서는 그의 성(姓)은 장(張), 휘(諱)는 비(飛), 자(字)는 익덕(益德)으로 해서 장익덕(張益德)이라고 했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익덕(翼德)>으로 해서 장익덕(張翼德)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봉호(封號)는 신정후(新亭侯)였으며, 시(諡)는 환후(桓侯)였다. 그리고 또, 자(子)로는 장포(張苞)와 장소(張紹) 그리고 경애황후(敬哀皇后)와 장황후(張皇后)가 있었다.

 그는 유비(劉備)가 군사를 일으키자 처음부터 따랐으며, 비범한 용맹(勇猛)으로 그 이름을 만천하(中國 또는 中華)에 떨쳤다. 그리고 또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많은 활약상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서 현재까지도 세인(世人)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출신은 탁군(涿郡)이며, 동향(同鄕)의 유비(劉備)가 거병했을 때, 관우(關羽)와 함께 참가했다. 그 후, 관우(關羽)와 함께 유비(劉備)의 경호를 담당하며 함께 싸웠고, 평생 관우(關羽)와 함께 유비(劉備)를 형으로 모셨다. 그리고 또 관우(關羽)가 수년 연장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관우(關羽)도 형으로 모셨다. 그리고 유비(劉備)가 공손찬(公孫瓚)에 의해서 평원군(平原君)의 상(相)이 되자, 관우(關羽)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고, 그리고는 각각 일군(一軍)을 인솔하는 장(將)이 되었다.



 <공손찬(公孫瓚)>

 ?-199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백규(伯珪).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를 멸하고 군웅(群雄)으로 할거했다.
그러나 후에 하북(河北)의 지배권을 놓고 원소(袁紹)와 싸웠지만 패하고 자결했다. 종제(從弟)에 공손범(公孫範)과 공손월(公孫越)이 있었고, 자(子)로는 공손속(公孫續) 등이 있었다.

 그는 북방(北方)의 용장(勇將)으로 알려졌으며,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현재의 遼寧省 朝陽市 令支縣) 출신이었고,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2천석(二千石-郡太守 級) 정도의 유력(有力) 호족(豪族)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모(生母)가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별 혜택은 받지 못했다.

 젊었던 시절, 그는 요서군(遼西郡)에서 문하서좌(門下書佐)를 지냈는데, 그런데 그때, 그는 총명했던 데다 목소리도 컸고, 용모도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태수(太守)였던 후 씨(侯氏)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씨(侯氏)의 원조를 받아서 유비(劉備)와 함께 노식(盧植) 문하에서 병학(兵學)을 배웠다.

 그 후, 그는 효렴(孝廉)에 추천되었고, 이어서 요동(遼東) 속국(屬國) 장사(長史)가 되었다. 그리고는 선비족(鮮卑族)을 격퇴하고 탁군(涿郡)의 영(令)이 되었다.

 186년, 그는 장온(張溫)으로부터 양주(凉州) 토벌의 명을 받았다. 그러자 그때, 그
장온(張溫)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던 장순(張純)과 장거(張擧) 그리고 오환족(烏桓族)의 구력거(丘力居) 등을 물리치고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반란을 획책했던 장순(張純)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요동(遼東) 부근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리고는 포로들을 재빨리 구출하고는 다시 장성(長城)을 넘어서 반란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너무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역공(逆攻)을 당했다. 그리고는 수백 일 동안의 격투 끝에 양군 모두 병량(兵糧)이 고갈되어서 후퇴했다.

 그 후, 오환족(烏桓族)의 탐지왕(貪至王)이 기마부대를 인솔해서 항복해 왔다. 그러자 그는 그 부대를 자대(自隊)에 편입시켰고, 그 공으로 또 중랑장(中郞將) 도정후(都亭侯)가 되었다.

 191년, 황건적(黃巾賊)의 잔당 30만이 발해군(勃海郡)의 군경(郡境) 부근에서 침입해 왔다. 그러자 그는 2만의 병력을 인솔해서 그것을 격파했고 또한 많은 포로와 군사 장비를 획득했다. 그러자 동탁(董卓)의 추천을 받아서 분무장군(奮武將軍) 계후(薊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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