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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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33 |
왕소군(王昭君)이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에게 강가(降嫁)했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 경)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와 그의 아들 복주누약제단우(復株累若鞮單于-呼韓邪單于 제2閼氏의 子) 시대의 알씨(閼氏). 성(姓)은 왕(王), 휘(諱)는 장(嬙)이었다고 반고(班固)가 한서(漢書)에 기록함.(그러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음) 자(字)는 소군(昭君). 출신은 형주(荊州) 남군(南郡-현재의 湖北省 沙市). 양귀비(楊貴妃), 서시(西施),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大) 미녀 중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음.
※ 양귀비(楊貴妃-719~756)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였고, 이름은 태진(太眞)이었다. 그리고 춤과 음악에 뛰어났다고 하며, 총명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안사의 난 때 살해당했다. 또는 자결 등.

<양귀비>
※ 서시(西施)는 이미 소개되었지만,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으로, 오나라에 패했던 월나라 왕 구천이 그녀를 부차에게 보냈고, 그러자 그 부차가 그녀의 용모에 빠져 있던 사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 초선(貂蟬)은 가공(架空)의 인물이며, 중국 후한(後漢)의 충신 왕윤(王允)의 양녀였다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와 있고, 미인계(美人計=연환계)로 유명했다.

아무튼, 그녀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시대에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漢)의 여성을 알씨(閼氏)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해 오자, 원제(元帝)가 그녀를 선택해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주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 후 일남(一男)을 생산했다.(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漢 왕조에서 권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후,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사망했고, 그러자 그녀는 또 그 흉노(匈奴)의 풍습대로 그 아들이었던 복주누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가 되어서 2녀(女)를 생산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한족(寒族)의 입장에서는 근친상간(近親相姦)에 필적(匹敵)하는 부도덕(不道德)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의 비극과 함께 민간에 전승(傳承)되었다.
그리고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또 소개하면, 원제(元帝)는 처음에 흉노(匈奴)로 보낼 여성을 후궁(後宮) 중에서 물색하다가 그 중에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제(元帝)는 당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시켜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지만 또 그때, 다른 궁녀들은 모두 그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뇌물을 주었는데, 그러나 왕소군(王昭君)만은 그에게 아무런 뇌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에 앙심을 품었던 모연수(毛延壽)는 왕소군(王昭君)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러자 왕소군(王昭君)은 어쩔 수 없이 흉노(匈奴)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이 흉노(匈奴)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원제(元帝)를 보러갔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대면했던 원제(元帝)는 그녀의 미색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그리고 또 흉노(匈奴)와의 관계도 생각해서 원제(元帝)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흉노(匈奴)로 보냈다. 하지만 그 후, 원제(元帝)는 모연수(毛延壽)가 부정한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격노하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이미 선술(先述)한 대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죽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의 아들에게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은 격심하게 반발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한(漢)으로부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또, 그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기록된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이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교대상국이었던 흉노(匈奴)에 일부러 못생긴 여성을 보내려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무례(無禮)로, 그래서 아마도 그것은 창작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 그것이다.(그런 사실을 기록한 것은 西京雜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또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실에 관계없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 후 진대(晋代)의 왕소군사(王昭君辭)와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중국 원나라의 극작가. ?1250-?1324. 호는 동리(東籬)>의 잡극(雜劇-중국의 고전연극을 이름)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현재, 그녀의 무덤은 내몽고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시(呼和浩特市)에 있는데, 진위는 알 수 없으며, 그러나 능묘 주위에는 그녀의 고향 집을 재현한 건물과 정원이 정비되어 있고, 그리고 또 그 내부에는 흉노(匈奴)의 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呼和浩特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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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하다
왕망(王莽-B.C.45에서 A.D.23)
그는 신조(新朝)의 황제(皇帝)였고, 즉위 전의 작위(爵位)는 안한공(安漢公)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였던 왕정군(王政君=孝元皇后)의 조카였고, 성제(成帝) 외가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리고 또 왕만(王曼)의 차남(次男)이었으며, 왕우(王宇), 왕획(王獲), 왕안(王安), 왕림(王臨), 왕흥(王興), 왕광(王匡) 등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손(孫-王宇의 子)으로는 왕종(王宗)이 있었고, 딸로는 평제(平帝)의 황후였던 왕씨(王氏)와 왕엽(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정처(正妻)는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한서(漢書) 등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 중 망(莽) 자는 초(艸 또는 草) 관(冠) 아래 큰 대(大) 자가 아니고, 개 견(犬) 자이다.
아무튼 당시,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그의 백모(伯母) 왕정군(王政君)의 연고(緣故)로 백부(伯父)들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가 고관(高官)의 지위와 함께 유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의 부(父)와 형(兄) 왕영(王永)이 차례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집만 제후도 되지 못하고 궁핍해졌다.
그 후, 왕망(王莽)은 공검(恭儉)하게 처신하면서 패군(沛郡)의 진참(陳參)이란 사람에게서 예경(禮敬)을 배웠고, 그 후도로 더욱 몸을 부지런히 하며 배움에 임해서 점점 더 학문을 넓혔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유생(儒生)과도 같은 마음으로 예를 다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형수를 모셨으며, 그리고 또 자신의 조카였던 왕광(王光)을 양자로 삼고는 친자식 이상으로 열심히 양육했다. 그러자 또 그의 아내는 그에 대해서 늘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그 후, 그가 장년(壯年-30~40정도)이 되었을 때, 백부(伯父)였던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 왕봉(王鳳)의 병간호를 열심히 했고, 그러자 또 왕봉(王鳳)은 죽을 때 성제(成帝)에게 그를 맡겼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왕상(王商)이나 왕근(王根) 그리고 당시 황태후가 되어 있었던 백모(伯母)의 배경으로 순조롭게 출세의 가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친척이었던 순우장(淳于長)을 실각(失脚)시키고 대사마(大司馬)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그때부터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외척을 몰아내려 했던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봉국(封國)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또 그 후에 그를 국정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탄원이 이어져서 그는 다시 장안(長安)으로 불려갔다.
영시(永始) 원년(기원전 16년)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고, 이어서 애제(哀帝)가 붕어하자 그 애제(哀帝)의 옥새(玉璽) 지킴이를 맡고 있던 대사마(大司馬)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해서 중산왕(中山王) 유간(劉衎=平帝)을 제위에 올렸다.
그 후, 그는 유학(儒學)과 예언서(豫言書) 등에 근거해서 정책을 폈던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리고 또 그 와중에 자신의 차남(次男)이었던 왕획(王獲)이 노복(奴僕)을 죽였던 것에 대한 죄를 묻고, 또한 장남(長男)이었던 왕우(王宇) 또한 누구를 모략(謀略) 했던 것으로 해서 둘 다 감옥으로 보내서 함께 자살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자신의 딸을 평제(平帝)에게 시집보내서 황후가 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재형(宰衡)과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평제(平帝)를 독살(毒殺)했다.(당시 14세)
※ 재형(宰衡)은, 재상(宰相)을 다르게 부르던 말로, 중국 은(銀)나라의 이윤(伊尹)이 아형(阿衡)이 되었고,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태재(太宰)가 되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먼 친척이었던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의 자(子) 유영(劉嬰)을 황태자의 자리에 올렸고, 스스로는 또 가황제(仮皇帝), 섭황제(攝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정의 모든 정무를 장악했다. 그리하여 거섭(居攝) 3년(8년)에 왕망(王莽)은 고조(高祖)의 영(靈)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았다고 고하고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신(新)을 건국했다.
그리하여 또 그것은 역사상 첫 선양(禪讓)이었으며, 또한 찬탈(簒奪)이라 할 것이었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때, 태황태후(太皇太后)로서 국새(國璽)를 맡고 있었던 효원황태후(孝元皇太后) 왕정군(王政君)은 그 옥새를 수령하러 왔던 왕망(王莽)의 사자 왕순(王舜=王莽의 従兄弟)을 향해서 옥새를 내던지고는 왕망(王莽)을 몹시 나쁘게 매도(罵倒)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왕망(王莽)은 주대(周代)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정치를 펴나갔지만, 그러나 현실성이 결여되어서 각종의 정책들은 단기간에 파탄이 났다. 그리고 또한 흉노(匈奴)나 고구려(高句麗) 등 이웃 민족들의 왕호(王號)를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모멸적인 명칭으로 개명하려했던 것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렀고(예를 들어서 高句麗를 下句麗로 칭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것을 진압하려 했지만, 그도 실패했다. 그리고 또 전매제(專賣制)의 강화 등도 실패해서 신(新)의 재정은 곧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체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赤眉의 亂 등), 그 후 유사한 반란들이 속출했다.
그 후, 왕망(王莽)은 남양군(南陽郡)에 옹립되어 있던 유현(劉玄=更始侯)을 치기 위해서 100만이란 대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곤양(昆陽)의 싸움>에서 유현(劉玄) 휘하의 유수(劉秀=光武帝)에게 패했고, 그로 인해 전국(全國)은 곧 군웅들이 할거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안(長安)으로 갱시후(更始侯)의 군대가 들이닥쳤으며, 그러자 또 왕망(王莽)은 그 혼란 중에 두오(杜吳)란 자에게 살해당했고,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리고 또한 그것으로 신(新)은 일대(一代)에 머물며 멸망했다.
그 후, 그의 머리는 갱시후(更始侯)의 거성(居城) 앞에 전시되었으며, 그의 몸은 공(功)을 얻으려던 자들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또한 그 후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졌지만, 그러나 그가 행했던 <황제즉위의례>는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재현된 후, 역대 황제들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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