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의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제국민의 싸움(독:Volkerschlacht, 영:Battle of the Nations)이라고도 불린다.
독일동부의 라이프치히(당시의 작센왕국 령)에서
나폴레옹1세 휘하의 프랑스군 19만과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웨덴 연합군 36만이 치렀던 전쟁이었다.
3일간의 격전 끝에 압도적인 병력차이로 인해 프랑스군이 패배했다.
프랑스군에서는 '포냐트프스키' 원수가 전사했고, 4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연합군도 5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결과 나폴레옹의 독일지배가 사실상 끝났다.
그리고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元프랑스군 원수였던 <베르나도트>였다.
<배경>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반도 전쟁>의 패배에 이어서 <제6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벌어졌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영국과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독일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패권에 도전했다.
<그때, 라인 강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던 연합군의 수는 약 10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거느리던 군사는 겨우 몇 십만 명에 그쳐 있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잠시,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면...
나폴레옹은 독일을 다시 수중에 넣기 위해서 5월 2일의 <뤼첸의 싸움>과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치러졌던 <바우첸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로 잠시 동안의 휴전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길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졌던 일련의 싸움에서 연합군은 분진합격<進合擊-앞에서 설명되었음>작전으로 프랑스군에 승리했던 바 있었다.
<그 작전을 추천했던 사람은 바로 '베르나도트'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에는 몇 가지 이설도 있다>
그리고 또 8월26일부터 27일에 걸쳤던 <드레스덴의 싸움>에서는 나폴레옹의 본대가 참가해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추격에는 실패했고, 또 8월 30일의 <크룸의 싸움>에서는 '반담 군단'이 포위되는 일까지 생겨서 나폴레옹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우디노'가 인솔하던 12만 병력에 의한 <베를린 공략작전>이 또 실패로 돌아가자, 그에 나폴레옹은 북방공세준비를 위해서 일시 서방으로 철퇴했다.
그리고는 9월 하순에 '엘베 강'을 다시 건넜고, 그리고 그곳에서 약 5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라이프치히> 주변에서 나폴레옹은 보급로의 확보와 연합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군의 재편을 실시했다.
나폴레옹은 그때 '타우차(Taucha)'로부터 '스토테리츠(Stotteritz-나폴레옹이 진을 쳤던 장소)'를 통해서 '린데나우' 남서의 만곡(彎曲)에다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바르텐부루크(Wartenburg)'로 진군했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드레스덴(아래 그림 2-A 바로 오른쪽 옆)'으로부터, 그리고 또 스웨덴군은 북방으로부터 <라이프치히>로 진격해서 들어갔다.
1) Taucha |
Stotteritz(A 라이프치히) |
3) Stotteritz(A) |
4) War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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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당초, 라이프치히에 집결했던 프랑스군은 17만 7000명.
그에 대해서 연합군은 25만 7000명이었다.
전투는 10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남쪽으로부터 '톨리'가 인솔하던 러시아군 7만 8000명과 북쪽에서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 5만 4000명이 공격을 개시했고, 그러자 나폴레옹의 직속부대도 남쪽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연합군은 별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곧바로 퇴각했다. 그런 한편, 나폴레옹의 부대도 연합군의 전열을 돌파하지 못해서 주춤거렸다.
17일에는 양군 모두에게 지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것을 배치하느라 별 싸움은 없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에는 18,000명밖에 증원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연합군은 10만이상이 증원되었다.
<참고도:10월 18일의 전황-중앙 6번이 나폴레옹>
그러자 18일, 연합군의 총공격이 재개되었다.
그리고는 9시간 이상이나 치러졌던 전투에서 양군 모두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그때, 프랑스군은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차이에 점점 기가 눌려갔고
그리고는 또 그 사이에 '작센왕국군' 중 일부가 배신함에 따라서
나폴레옹은 하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해야만 했다.
<엘스터 강 위치도>
19일, 프랑스군은 '엘스터(elster) 강'을 건너서 퇴각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퇴각과는 달리 도중에 다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유제프 포냐트프스키(폴란드왕국 마지막 왕-앞에서 상세히 설명되었음)'가 전사했다. 그리고 그는 전사하기 바로 전날, 元帥의 지팡이를 손에 쥐었던 상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독일제국시대의 원수장-1895년 제작>
<영향>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3만 8000명에 이르렀고, 거기에다 3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라인동맹 각국군의 사상자도 5000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5만 4000명에 이르렀다.
전투 결과, 프랑스 제국의 라인 강 동쪽방면의 패권은 완전 소멸되었다.
그리고 <라인동맹>은 붕괴했고, 많은 독일 각국들이 연합군에 가입했다.
오늘날의 <라이프치히 市>에서의 ‘전투코스(전황 또는 전적도)’는 monument(어떤 사건이나,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건조물이나 기념비 등)에 나타나있다.(제국민의 전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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