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레로폰에서의 나폴레옹>



※ 벨레로폰(Bellerophon)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신마(神馬) 페가수스를 타고 온갖 모험을 하며 공을 세워서 왕이 되었으나, 나중에 페가수스를 타고 천상계로 오르려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번개에 맞아서 죽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또 말에서 떨어져서 불구가 되어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림은 벨레로폰과 페가수스>


 
 그러나 여기서는 영국의 군함을 의미하며, 아래 사진은 벨레로폰과 유사한 영국의 戰列艦





1 生涯

1.8  百日天下 그 後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가 열려서, 다음 '유럽'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의논을 나누었지만
 그러나 각국들의 이해(利害)로 인해서 회의는 잘 진행되지가 않았다.



<빈 회의>

 거기다 또 '루이18세'의 정치가 민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 루이18세(Louis XVIII de France) 1755년 11월 17일~1824년 9월 16일




 재위:1814~1824
 
루이16세의 동생.
 1814년에 왕정복고로 부르봉朝 제6대 국왕이 되었다.





 그러자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로 귀환했다.
 그리고 '
나폴레옹'은 복위 후 자유주의적인 신헌법을 발포(發布)했고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되었고, 그러자 그것이 또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쟁의 서전(緖戰)에서는 승리했지만
결국 <영국과 프로이센>이 합쳤던 연합군과의 일전이었던 '워털루전쟁'에서 완패했고
그것으로 '나폴레옹'의 복위(백일천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실제로는 95일간)



 * 백일천하(영-Hundred Days. 프-Cent-Jours)


 유럽제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실각(失脚)했던 나폴레옹이 1815년에 일시적으로 제위(帝位)를 회복했지만
 그러나 95일 만에 다시 패배하여 완전하게 실각했던 사건이었다.

 <경과(經過)>

 1814년 '나폴레옹'은 '제6차대불대동맹제국'과의 전쟁에서 져서 제위에서 쫓겨났고, 이어서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러자 전승(戰勝) 각국은 '빈 회의'를 개최해서 전후(戰後)체제에 대해서 검토했지만, 그러나 이해(利害)가 상반되어 회의는 지지부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때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실각 이후 '루이18세'가 즉위해서 '부르봉왕조'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실정(失政)으로 국민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러한 틈을 타서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했다.
 그리고는 3월 1일 '칸(Cannes)' 근교에 상륙했고, 이어서 '파리'를 향하여 진군했다.



 ** 칸(Cannes)

 프랑스 남동쪽 지중해 기슭에 있는 관광 휴양 도시.
 1946년 이래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때 '나폴레옹'은 '루이18세'가 보냈던 '토벌군'들 앞에 서서

 <병사제군이여! 제군들의 황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자!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해보라!>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아무튼. 토벌군들은 그에 주저했고 '나폴레옹'은 이어서 '프로방스'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저항도 받지 않은 채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해서 제위에 다시 올랐다.(그때 루이18세는 이미 도망을 간 상태였다)

 그러자 각국(各國)은 그에 놀라서 <제7차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타도에 나섰다.



  ** 제7차대불대동맹(Seventh Coalition)

 上略...

 '나폴레옹'의 '파리'진군 소식을 들은 '루이18세'는 경악하여 '네이'에게 군을 주어서 그에 대항하게 했지만, 그러나 '네이'는 오히려 '나폴레옹'과 합류해서 '파리'로 진격했다. 그러자 '루이18세'는 도망갔고 '나폴레옹'은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해서 다시 제위에 올랐다.

 그런 한편 '나폴레옹'의 부활(復活)에 충격을 받았던 '유럽동맹제국'들도 서둘러서 개최한 3월 13일의 '빈 회의'에서 '나폴레옹'의 복권을 무효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3월 25일 <제7차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해서 군(軍)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래는 그 <제7차대불대동맹>에 참가했던 국가이다.

 영국 및 아일랜드연합왕국
 프로이센왕국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제국
 스웨덴왕국
 네덜란드왕국
 라인동맹 각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퐁텐블로에서 퇴위하는 나폴레옹>


  1 生涯

  1.7  滅亡으로









 * 제6차 대불대동맹(Sixth Coalition, 1812년~1814년)

 4. 1814년 프랑스 전쟁

그 결과 '프랑스군'은 '독일'로부터 철퇴했다.
 
그러자 '동쪽'에서는 <러시아군, 오스트리아군, 프로이센군, 스웨덴군>이 쇄도해서 들어왔고
 남쪽에서는 '스페인'을 제압했던 '영국군'이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그리고는
1813년 12월 2일, 연합군이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다.





 그리고 12월 21일에는 '슈왈센베르크 군'이 '라인 강'을 도하했다.
 그리고 1814년 1월 19일에는 '부루고뉴 지방'의 '디존'이 함락되었다.



 ** Bourgogne

 프랑스동부의 지역권(region)
 
수도는 디존(Dijon). 인구는 약 162만 명. 총면적은 31.741km(1999년).
 <부루고뉴 와인>의 산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영어로는 Burgundy, 독일어로는 Burgund로 불린다.
 온난한 기후와 평탄하고 경작에 적절한 토지 등
 풍족한 자연조건을 살려서 예부터 농경이 왕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루이즈 병>이라고 야유 받았던 미숙련의 젊은 신병들을 인솔하면서
국지적인 전투에서 가끔씩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2월 10일부터 14일에 걸쳤던 '6일 전쟁(5일간이라고도 한다)'으로 불렸던 싸움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구사했던 전략 중에서 최고의 작전을 펼쳤다...>라고 하는 것과 함께
 <
샴파뉴(샴페인)'에 침공했던 10만의 '블뤼허 군'을 4만의 병력으로 기동작전을 전개해서 물리치기도 했다...>라고 하는 것 등이었다.



 ** 샴페뉴(Champagne)

 
프랑스의 북동부, 파리분지의 동부에 위치한다. 발포와인(sparkling wine)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샴페인(Champagne)의 산지로서 알려져 있고, 중심도시인 Reims를 중심으로 한 몬타뉴 두 랑스, 바레 두 라 마르누 및 코트 데 브랑이라고 불리는 3개 지역에서 특히 양질의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샴페뉴는  이전에는 州의 하나였지만, 현재는 프랑스의 행정지역 Champagne-Ardenne의 일부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3월 9일 '영국'의 주도로 '동맹제국'은 '쇼몽(Chaumont) 조약'을 체결했다.



 ** 쇼몽(Chaumont)

 프랑스 북동부, 루아르에셰르 주(프랑스어: Loir-et-Cher)에 있는 도시.
 부근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장갑과 메리야스류, 피혁, 칼 등을 생산한다.



<루아르에셰르 주 위치도>


<쇼몽 성>




 그리고 <1791년 당시의 국경으로 회복하자>는 조건으로 정전을 제안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대국적인 열세에 몰려있었던 '나폴레옹'은 그래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차이로 인해서 다시 '아르시 슈르 오브' 등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3월 30일, 연합군은 '파리공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또 그때 '파리'방위의 임무를 맡았던 '마르몬'이 항복했고
31일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연합군의 파리 입성>


그러자 '페리고르'를 중심으로 했던 '프랑스'의 '임시정부'는 정전을 위해서 '나폴레옹'의 퇴위를 결의했다.
그리고 이어서 4월 11일 '나폴레옹'은 마침내 퇴위되었고, 항복조건으로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 퐁텐블로(Fontainebleau)

 프랑스 파리교외에 있는 도시.


<퐁텐블로의 샤토>



 <퐁텐블로 조약(영:Treaty of Fontainebleau)>

 프랑스북부 파리교외의 퐁텐블로(많게는 퐁텐블로우城)에서 체결되었던 조약이었다.
 
1814년 프랑스와 제6차 대불대동맹 제국 사이에서 체결되었고
 황제 나폴레옹1세의 퇴위조건을 정했다.
 그리고
4월 11일에 합의에 이르렀고, 4월 16일에 체결되었다.
 
황후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아들 나폴레옹2세는 파르마侯國의 통치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4월 20일,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을 출발해서 엘바 섬으로 향했다.

 
<참고>

 그 외의 퐁텐블로 조약으로는

 
1745년 10월 24일, 루이15세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군사동맹이 있었고
 1807년 10월 27일,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포르투갈의 점령조건에 관한 조약
 그리고 또 1763년의 파리조약은 퐁텐블로 조약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5. 전후처리

 
전쟁의 결과 '나폴레옹'은 패배했고, 1814년 5월 4일 '엘바 섬'의 小領主로 추방되었다.
 그러자 '
베르나도트'는 '프랑스 군주'의 후계자 지위를 노렸지만 '대불대동맹 제국'은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프랑스 상원'의 의결에 의해서 '프랑스혁명' 이래 망명하고 있었던
 '부르봉家'의 '
루이18세'가 귀환해서 즉위했고, 왕정은 복고(復古)되었다.

 '
러시아원정'에서부터 '프랑스전쟁'에 이르기까지, 약 250만 명의 병력이 전쟁에 참가했고
 그 중에 200만 명이 전사했다고 추정된다.(그것은 러시아에서만 100만 명이라고 한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서구에서 그 정도로의 대규모 전쟁이 연속된 것은 없었다.

 

  

 아무튼, 그리고 또 1813년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와 '스웨덴' 등의 동맹군과 '뤼첸의 싸움, 바우첸의 싸움'에서 이기고 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멧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좋지 않게 끝난 후, 가을의 '라이프치히 싸움'에서 '나폴레옹'은 대패했고, 이어서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이 되자 '프랑스'를 둘러싼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
 그리고 연합군들은 점점 더 '프랑스'에 대한 대포위망을 완성해갔다.

 한편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병력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고, 이윽고는 3월 31일 '파리'가 함락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외교로써 퇴위와 종전을 원했지만, 그러나 '마르몬 원수' 등의 배반으로 무조건 퇴위 당했다.
 (4월 4일, 장군들의 반란)

 
4월 16일의 '퐁텐블로 조약' 체결 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의 소영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나폴레옹'은 '로마 왕'이었던 친자 '나폴레옹2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길 바랬지만 인정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우여곡절의 끝에 '부르봉家'가 후계로 선택되었다. (왕정복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生涯

  1.7  滅亡으로






<라이프치히-諸국민의 전쟁 기념탑>





 * 제6차 대불대동맹(Sixth Coalition, 1812년~1814년)


 3. 諸國民의 전쟁

 그러자 '나폴레옹'은 서방으로 철퇴했고, 그리고는 주력을 '라이프치히'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또 '연합군'이 그에 도전했고
 그리고는 드디어 1813년 10월 16일에서 19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전쟁(제국민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그 싸움은 '나폴레옹전쟁'에 있어서의 최대의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은 그 싸움에 앞서서 이미 19만 對 36만이라는 두 배에 달하던 병력차이와 함께
 점점 좁혀오던 '연합군'들의 포위 앞에서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18일에는 '작센 왕국군'의 일부가 '나폴레옹'을 배반했고
 그에 19일이 되자 '나폴레옹'은 철퇴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철퇴의 과정에서 '포냐트프스키'가 전사했던 것 외에도
 '프랑스군'은 전사 4만, 포로 3만이란 숫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라이프치히 전쟁(영:Battle of Leipzig, 불:Bataille de Leipzig, 1813년 10월 16일~10월 19일)

 <개요>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의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제국민의 싸움(독:Volkerschlacht, 영:Battle of the Nations)이라고도 불린다.

 
독일동부의 라이프치히(당시의 작센왕국 령)에서
 나폴레옹1세 휘하의 프랑스군 19만과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웨덴 연합군 36만이 치렀던 전쟁이었다.

 3일간의 격전 끝에 압도적인 병력차이로 인해 프랑스군이 패배했다.
 프랑스군에서는 '포냐트프스키' 원수가 전사했고, 4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연합군도 5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결과 나폴레옹의 독일지배가 사실상 끝났다.
 그리고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元프랑스군 원수였던 <베르나도트>였다.




 <배경>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반도 전쟁>의 패배에 이어서 <제6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벌어졌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영국과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독일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패권에 도전했다.

 <
그때, 라인 강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던 연합군의 수는 약 10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거느리던 군사는 겨우 몇 십만 명에 그쳐 있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잠시,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면...

 나폴레옹은 독일을 다시 수중에 넣기 위해서 5월 2일의 <뤼첸의 싸움>과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치러졌던 <바우첸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로 잠시 동안의 휴전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길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졌던 일련의 싸움에서 연합군은 분진합격<進合擊-앞에서 설명되었음>작전으로 프랑스군에 승리했던 바 있었다.

 <
그 작전을 추천했던 사람은 바로 '베르나도트'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에는 몇 가지 이설도 있다>

 그리고 또 8월26일부터 27일에 걸쳤던 <드레스덴의 싸움>에서는 나폴레옹의 본대가 참가해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추격에는 실패했고, 또 8월 30일의 <크룸의 싸움>에서는 '반담 군단'이 포위되는 일까지 생겨서 나폴레옹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우디노'가 인솔하던 12만 병력에 의한 <베를린 공략작전>이 또 실패로 돌아가자, 그에 나폴레옹은 북방공세준비를 위해서 일시 서방으로 철퇴했다.

 
그리고는 9월 하순에 '엘베 강'을 다시 건넜고, 그리고 그곳에서 약 5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라이프치히> 주변에서 나폴레옹은 보급로의 확보와 연합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군의 재편을 실시했다.

 나폴레옹은 그때 '타우차(Taucha)'로부터 '스토테리츠(Stotteritz-나폴레옹이 진을 쳤던 장소)'를 통해서 '린데나우' 남서의 만곡(彎曲)에다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바르텐부루크(Wartenburg)'로 진군했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드레스덴(아래 그림 2-A 바로 오른쪽 옆)'으로부터, 그리고 또 스웨덴군은 북방으로부터 <라이프치히>로 진격해서 들어갔다.


 1) Taucha  Stotteritz(A 라이프치히)  3) Stotteritz(A)  4) Wartenburg

 



 


 



 


 



 


 



 





<경과>

 당초, 라이프치히에 집결했던 프랑스군은 17만 7000명.
 그에 대해서 연합군은 25만 7000명이었다.

 전투는 10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남쪽으로부터 '톨리'가 인솔하던 러시아군 7만 8000명과 북쪽에서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 5만 4000명이 공격을 개시했고, 그러자 나폴레옹의 직속부대도 남쪽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연합군은 별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곧바로 퇴각했다. 그런 한편, 나폴레옹의 부대도 연합군의 전열을 돌파하지 못해서 주춤거렸다.

 17일에는 양군 모두에게 지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것을 배치하느라 별 싸움은 없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에는 18,000명밖에 증원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연합군은 10만이상이 증원되었다.



<참고도:10월 18일의 전황-중앙 6번이 나폴레옹>

 
 그러자 18일, 연합군의 총공격이 재개되었다.
 
그리고는 9시간 이상이나 치러졌던 전투에서 양군 모두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그때, 프랑스군은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차이에 점점 기가 눌려갔고
그리고는 또 그 사이에 '작센왕국군' 중 일부가 배신함에 따라서
나폴레옹은 하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해야만 했다.




<엘스터 강 위치도>



 19일, 프랑스군은 '엘스터(elster) 강'을 건너서 퇴각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퇴각과는 달리 도중에 다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유제프 포냐트프스키(폴란드왕국 마지막 왕-앞에서 상세히 설명되었음)'가 전사했다. 그리고 그는 전사하기 바로 전날, 元帥의 지팡이를 손에 쥐었던 상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독일제국시대의 원수장-1895년 제작>



<영향>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3만 8000명에 이르렀고, 거기에다 3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라인동맹 각국군의 사상자도 5000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5만 4000명에 이르렀다.

 전투 결과, 프랑스 제국의 라인 강 동쪽방면의 패권은 완전 소멸되었다.
 그리고 <라인동맹>은 붕괴했고, 많은 독일 각국들이 연합군에 가입했다.

 오늘날의 <라이프치히 市>에서의 ‘전투코스(전황 또는 전적도)’는 monument(어떤 사건이나,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건조물이나 기념비 등)에 나타나있다.(제국민의 전쟁 기념비)









 



 

그리고
그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졌던 전쟁을
현재 독일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生涯

  1.7  滅亡으로






<1814년 프랑스전쟁에서의 나폴레옹>


 * 제6차 대불대동맹(Sixth Coalition, 1812년~1814년)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 제국'에 도전하기 위해서 '유럽제국'이 결성했던 동맹이었다.
 '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던 '프랑스군'은
 그때부터 사방(四方)에서 압박해오던 '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서 마침내 '나폴레옹'도 퇴위에 몰리게 된다.

 
<동맹>

 <
제6차 대불대동맹>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계기로 최초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원정 결과 '프랑스군'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고, 사망 37만, 포로 20만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나폴레옹'의 <불패신화>도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그러자 그때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제국'은 그를 배반했다.

 
1813년 2월 27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제6차 대불대동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8월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웨덴' 그리고 '라인동맹' 각국도 그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했던 '대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어서 '프랑스'에 대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그때 동맹에 참가했던 국가는
 '영국(아일랜드 포함)'과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웨덴 왕국' 그리고 '라인동맹' 각국이었다.





 <독일-프랑스 전쟁(1813~1814)>

 
1. 프로이센의 참전

 1813년 '나폴레옹'은 20만의 신병(新兵)들을 징집해서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서 괴멸했던 군대를 재건했다.

 ※ 그러자
그때 강제적으로 징병했던(소위 햅쌀로 키워졌고, 훈련이 부족했던 오합지졸) 그 <청년兵>들에게 사람들은
    <루이즈(황후) 兵>이라는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연합군'에서는 3월 17일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리고는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서 나섰다.
 
4월 28일 '러시아' 장군 '쿠투조프'가 병사(病死)하자, 그 대신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5월 2일 '라이프치히' 근교의 '뤼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지휘하던 '러시아군'이 '네이 군단'을 기습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즉석에서 반격으로 나서서 그것을 물리쳤지만(뤼첸전투-Lutzen戰鬪)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능숙하게 병력을 철수시키는 바람에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를 못했다.


 Lutzen  Bautzen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네이'에게 병력의 반수(半數)를 주어서 '러시아군'을 두 곳 方面에서 추격케 했고
그리고는 5월 20일에서 21일의 '바우첸(Bautzen)의 싸움'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에 승리했지만
그러나 '네이'의 측면공격 개시가 늦어져서 또 다시 연합군을 격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프랑스군'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자 6월 4일 '오스트리아'의 仲介로 휴전협정이 체결되어서
양군 모두 병력 재편성에 들어갔다.



<라이프치히 전투>


하지만 그 당시 '스페인'에서도 '프랑스군'은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그때 '웰링턴 공'이 인솔하던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연합군>은
6월 21일의 ‘비토리아의 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각처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있었으며
이어서 점점 더 '프랑스' 본토를 향해서 북상하고 있었다.




<비토리아 위치도>



 2. 오스트리아의 참전

 그리하여 7월에는 '스웨덴'도 '대불대동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7월 29일 '프라하'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양군 모두 양보의 의사가 없어 결렬되었다.



 <참고>-도시소개

 프라하(체코, 스로바키아어: Praha)
 
체코공화국의 수도이며, 인구는 약 120만 명. 북위 50도 02부(分), 東經 14도 45부에 위치해 있다.
 독일어에서는 플라크(Prag), 마쟈르(헝가리)에서는 프라가(Praga)로 불린다. 영어로는 Prague.
 
시내 중심부를 블타바(Vltava) 강(독: 몰다우)이 흐른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블타바>


 오래된 시가와 건물들이 많이 현존하고 있어, 매년 해외로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
카렐대학(Karel)-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렐 사세가 1348년에 창립하였다>은 중부 유럽 최고의 대학이다. 첨탑이 많이 있기 때문에 <百塔의 거리>라고도 불린다.
 <
티코 브라-(에)Tycho Brahe-설명 생략>가 천체관측을 실시했던 천문 탑도 그 중 하나이다.
 
시내에는 <얀 후스(Jan Hus)>가 설교했던 '베들레헴(Bethlehem) 교회' 등이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프라하의 밤>




 그리고 8월 10일 휴전은 종료되었고, 8월 11일에는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그 휴전기간 중에 '프랑스'는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지만, 그러나 그때 연합군의 병력은 45만을 넘고 있었고
 이어서 동맹국들의 전면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때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연합군>은 三面공격작전을 채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폴레옹'의 본대와는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그 예하부대(본대와 떨어져있던 적은 수의 부대들)들과의 싸움에 치중하는 전략이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북방(北方)에서는 '베르나도트'가 인솔하던 '스웨덴군'이
 8월 23일 '베를린'으로 향하고 있던 '우디노 군단'을 급습하여 승리했다.<그로스베렌(Grossbeeren)의 싸움>




<그로스베렌 위치도>


<개선문>



 그리고 또 9월 10일의 '데네빗츠 싸움'에서는 '우디노 군단'과 교대했던 '네이 군단'도 물리쳤다.




<데네빗츠 위치도-아래 정중앙이 라이프치히>


 그리고 또 동방에서는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이 8월 26일의 '카츠바하 싸움'에서 '마크드날 군단'에 
승리했다.
거기다 또 남방에서는 '슈왈센베르크'가 인솔하던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이
'작센왕국'의 수도 '드레스덴'을 지키던 '산-씰 군단'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그것은 곧 '나폴레옹'이 달려듦으로 해서 8월 26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되었던 '드레스덴의 싸움'이 되었다.



 ** Dresden(독일연방 작센 주 엘베 강연안에 위치)


<위치도>





 ** 산-씰(Laurant Gouvion-Saint-Cyr. 1764년 5월 13일~1830년 3월 17일)

 
프랑스의 군인, 원수




 

 그 싸움에서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지만, 그러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을 추격했던 '반담'은 8월 30일의
'크룸(Kulmbach)의 싸움'에서 반대로 포위당했고, 그를 포함한 병사 7,000명이 포로가 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크룸바하 위치도>



 ** 반담(또는 밴댐: Dominique-Joseph Rene Vandamme. 1770년 11월 5일~1830년 7월 15일)
 
 나폴레옹전쟁 때 활약했던 프랑스의 장군. 잔인함과 사나움(약탈과 불복종)으로 유명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 <만약 네가 두 명이라면, 나는 너에게 그 또 한사람을 죽이게 했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793년 프랑스혁명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준장이었지만, 그러나 약탈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정직처분을 받은 뒤 복귀했다. 그리고 1805년의 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는 브란트고지탈환 공격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1809년 아벤스버그의 싸움, 란츠포드의 싸움, 에크마치의 싸움 등에 참가했고, 바그람의 싸움에서는 부상당했다. 1813년 전쟁에서는 크룸의 싸움에서 프로이센군의 크라이스토 장군에게 포위되어서 그를 포함한 1만 3천명(또는 7000명-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렉산드르1세 앞으로 끌려가서 그가 저질렀던 약탈행위에 대해서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나는 약탈자라도 산적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세상과 역사는 내 손을 아버지의 피로 적신 것(만큼은 나를)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아버지를 죽일 정도로 패륜아는 아니라는 뜻-파베르1세의 암살에 대한 야유로, 당시 아렉산드르1세는 그 사건에 관여했던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비꼬아서 했던 말)>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1815년의 전쟁(백일천하)에서는 그루시(그라우치) 지휘하의 제3사단을 인솔했고, 워털루 싸움에서는 그루시에게 나폴레옹과 합류하도록 진언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루시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따라서 프로이센군을 추격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그 후, 그는
제2차 왕정복고 때 미국으로 추방되었지만, 그러나 1819년에 귀국이 다시 인정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점점 더 병력을 소모해갔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확대되었다.
 게다가 또 10월에는 '프랑스'와는 오랜 세월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왕국'까지도 그를 배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生涯

  1.7  滅亡으로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프랑스'는 '동맹국'으로부터 징병했던 60만이란 대군으로 '러시아'에 침입했지만, 그러나 병참을 경시했기 때문에
 광대한 국토를 활용한 '러시아'의 철저한 '초토전술'에 의해서 무너져갔다.

 
거기다 또 '모스크바'도 '대화재'로 인해서 완전 소각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총퇴각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맞이했던 '동장군(冬將軍)'으로 인해서 '프랑스군'은 속속 대오에서 탈락해갔고
 그 결과, 그런대로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갔던 병사는 겨우 5000명에 머물렀다고 한다.



 참고: 冬將軍


 혹심한 겨울을 擬人化한 표현으로, 極東에서는 冬季에 주기적으로 남하하는 북극기단(시베리아 寒氣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극동에서는 그 '동장군'이 남하하면 폭설이 내리고 또 태평양측에서는 건조한 북서풍이 불어서 기후가 거칠어진다. 특히 '한반도'나 '중국 동북부' 쪽에서는 '三寒四溫'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원과 역사>

 그
어원은 1812년 '러시아전쟁'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패퇴에 대해서 '영국'의 한 기자가 <general frost>라고 표현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기후의 특성을 잘 이용해서 18세기의 '대북방전쟁<칼12세의 스웨덴(발트 제국)>' 19세기의 '나폴레옹전쟁(프랑스 제국)' 20세기의 '독소전(제2차 세계대전-히틀러 독일의 제3제국)' 등의 군대에 막대한 손해를 준 것으로 유명했고, 이어서 그 침략자들의 몰락과 파멸을 결정짓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에 침공해 왔던 '몽골 제국'에 대해서는 '타이가'가 얼어붙는 한겨울에 침공해왔기 때문에, 그 동장군의 이익은 없었으며, 그래서 그때는 '모스크바'와 '키예프' 등, 중요도시들이 점령되기도 했다.

 ※ 그리고 몽골의 겨울도 러시아만큼이나 혹독하기 때문에
     그래서 몽골 인들이 그 추위에 익숙했던 것도 그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또, 그 사이에 '파리'에서는 '쿠데타'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고(주모자였던 말레 장군은 후에 총살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던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버리고 급히 '파리'로 돌아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 도상에서 '나폴레옹'은 '대육군'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한탄하며, 백 년 전의 '大北方전쟁'을 생각하면서
 <나는 스웨덴 왕 카를12세 같이 되고 싶지는 않다!>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 일찍이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스웨덴왕국은 카를12세 시대에 러시아와 싸우면서 역시 그 동장군과 초토작전으로 고전했다. 그리하여 카를12세 자신은 폴타바전투에서 패하고는 흑해연안에 있던 오스만제국 령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718년에 그 카를12세가 세상을 떠나자 스웨덴의 국력은 단번에 쇠하고 말았다.



 * 대북방전쟁(the Great Northern War)


 '러시아 제국'과 '덴마크-노르웨이' 그리고 '작센-폴란드'<1715년 이후에는 프로이센과 한노버(Hannover-독일북부에 있던 나라)>'의 同盟諸國과 '스웨덴'(후에 오스만 제국, 우크라이나-코사크가 참가) 사이에서 1700년부터 1721년까지 21년간에 걸쳐서 행해졌던 전쟁이었다.

 
전쟁의 시작은 동맹 측으로부터였지만, 그러나 전쟁 전기(前期)에는 '스웨덴'이 압도했다. 그리고 '스웨덴이' 1706년까지 전투의 대부분을 승리했고, 이어서 '폴란드 왕'을 폐위시키고 '괴뢰 왕'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덴마크'와 '러시아'는 직접적인 전투를 피했기 때문에, 그로인해서 한때는 '스웨덴'이 패권을 잡았다고 생각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러시아'는 지역의 이점을 살려서 '초토작전'을 전개했고, 이어서 1709년의 ‘폴타바의 싸움’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폴타바전쟁-설명은 생략> 


 그러자 또 '스웨덴'이 잇달아서 반격을 했고, 그리고는 1721년의 '니스타드 조약'과 '스톡홀름 조약'으로 전쟁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스웨덴 발트 해'의 패권을 강탈했고, 그로써 유럽의 열강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또 '러시아'는 그때 획득했던 땅에 새 도읍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그래서 그 전쟁은 사실상 '러시아 황제'였던 '표트르 1세'와 '스웨덴 왕' '카를12세'의 일대일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 표트르1세


 러: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라: Pyotr I Alekseevich (1671년 6월 9일~1725년 2월 8일)
 
로마노프朝 제5대 황제(재위:1682년~1725년). 초대 러시아 차르(재위:1721년~1725년)
 그 역사적 존재감과 함께 2m가 넘는 거구로부터 표트르大帝라고도 칭해진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6남, 어머니는 나탈리야 나르이쉬키나.




 ** 카를12세


 스웨덴 국왕(재위:1697년~1718년). 카를11세와 덴마크 왕녀 우르리카 에레오노라의 아들.




그 전쟁은 나중에 문화인(文化人)과 군인의 연구재료로써 다루어졌다.
 그에는 또 '볼테르'와 '클라우제비츠'의 작품이 유명하다.

 
 ** 볼테르(Voltaire. 1694년 11월 21일~1778년 5월 30일)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多才 철학자, 작가.
 파리의 公證人의 아들로 태어났고,
본명은 프랑수와-마리 아루에(Francois-Marie Arouet).
 볼테르란 이름은 펜네임과 같은 것으로, Arouet의 아나그램(anagram-언어유희. 철자나 단어의 새로운 조합으로 다른 뜻 등으로 만드는 행위)의 일종이다. 또 보론테르(고집)라는 어렸을 때의 별명을 모방한 것이라는 등의 諸說이 있고, 작품으로는 <철학 사전> 등이 있다.





 **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본인은 1780년 6월 1일로 믿고 있었지만 敎區의 등기부에 의하면 7월 1일~1831년 11월 16일.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및 군사학자. 對나폴레옹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1832년에 간행되었던 전략전술에 관한 명저 <전쟁론>을 저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孫武와 대등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그의 사상은 大몰트케를 시작으로 하는 군인들이나, 레닌을 시작으로 하는 혁명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특히 엥겔스에게서는 <軍事界의 一等星>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몰트케 백작(Helmuth Karl Bernhard Graf von Moltke, 1800년 10월 26일~1891년 4월 24일)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수완을 보였고, 對덴마크 전쟁과 보오전쟁(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보불전쟁(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승리해서 독일통일에 공헌했다.



 

 
 어쨌든, 그의 대패를 지켜봤던 각국들은 그때부터 일제히 '反나폴레옹'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개시(開始)국이었던 '프로이센'은 諸國에 호소해서 '제6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한다.
 그 동맹에는 전 '프랑스 육군 장군'이었으며
 '나폴레옹'에 의해서 '스웨덴 왕태자'가 되었던 '카를14세 요한'도 '스웨덴'의 대표로 참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