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弟>
류(루)시앙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년 3월 21일~1850년 7월 29일)
코르시카 명은 루치아노
프랑스의 정치가.
나폴레옹1세의 남동생.
카니노公.
브뤼메르 쿠데타의 공로자.
<생애>
그는 코르시카 섬의 아쟉시오에서 태어났다. 1783년에 오탄의 코레이쥬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고, 그 다음 해 브리엔누에 입학했지만 도중에 중퇴했다. 1786년에는 액스-안-프로방스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시 또 중퇴해서 코르시카 섬으로 되돌아갔다. 혁명이 발발하고 그 여파가 코르시카 섬에도 미치게 되자 자코뱅파에 가입했다. 섬의 지도자 파스칼 파오리가 혁명정부와 대립하자 정치클럽 <공화국 협회>에서 파오리 탄핵연설을 했고, 그 협회는 또 파오리의 즉시 파면에 관한 청원서를 국민공회에 보냈다. 그러자 국민공회는 그것을 채택했고, 파오리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체포령의 취소를 요구하던 교섭 중에 무력충돌이 발생, 그는 섬에서 추방되었다. 1792년 프랑스 이주 후, 산-마크시만-라-산트-봄 마을의 양말(糧秣-軍糧과 馬草, 糧草)창고를 운영하면서 인민협회의장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일시적으로 Brutus로 개명했다. 1794년에 테르미도르 쿠데타의 여파로 액스-안-프로방스에서 체포되었지만, 나폴레옹 등이 힘을 써서 곧 석방되었다. 그 후에 등장했던 총재정부에서는 ‘5백인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원정에서 돌아오자(1799년 10월 9일) 그를 도와 쿠데타 준비를 진행했다. 11월 10일, 계획대로 군대를 거느린 나폴레옹이 5백인회의의 회의장에 나타나서 의원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예상외의 저항을 받아서 퇴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그때, 회의장 밖으로 나왔던 그가 대기하고 있던 군대 앞에서 <공화국의 군대를 파괴하고 있는 피트의 손끝을 회의장으로부터 일소하라!>라는 연설로 병사들을 회의장 안으로 돌입시켰다. 그러자 의원들은 저항했지만 금방 쫓겨났고,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자 내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형제사이가 나빠져서 파직 당했다. 1800년에는 駐마드리드 대사가 되었지만, 다시 또 충돌했다. 아레크산드리누-쟈콥 드 브레살과 1803년에 재혼했다. 그 여성은 테레이즈 카바류스와 같이 유명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미움을 받았고, 1804년부터 그는 황위후계자에서 배제되었다. 그 화해를 위해서 그녀와 이혼하고 정략결혼 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응하지 않았다. 그 사이, 이탈리아, 영국 등 주소를 바꾸어가며 미국으로 향하던 도중 영국 船에 잡혀서 억류되었다. 1814년에 로마로 이주했으나 그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백일천하 때 그는 나폴레옹에게 다시 협력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다시 몰락하자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비테르보에서 1850년에 사망했다.
<비고>
그는 17세 때 이미 23세였던 나폴레옹을 평가해서
<나폴레옹은 전제군주의 소질이 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독재자가 될 것이다!>
라고 그의 본질을 간파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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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앙의 子>
피에르-나폴레옹 보나파르트(Pierre-Napoleon Bonaparte) 1815년 10월 11일~1881년 4월 7일
프랑스 제2제정기의 황족.
류시앙 보나파르트의 아들.
백일천하 바로 직후에 태어났다.
난폭한 성격으로 세상의 평판이 나빴다.
1870년 1월에 공화파의 저널리스트와 트러블을 일으켜서 그 상대방을 사살했다.
그 사건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공격구실이 되어서, 각지에서 공화파의 대규모 데모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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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妹>
마리아-안나 보나파르트(Maria Anna Bonaparte)
통칭, 엘리자 보나파르트(Elisa Bonaparte, 1777년 1월 13일~1820년 8월 7일)
나폴레옹의 여동생.
토스카나女大公-재위:1809년-1814년.
1777년 코르시카 섬에서 탄생.
1784년에 당시의 여자교육으로서는 최고학부였던 산-씰 학원에 입학했지만, 1792년에 중퇴했다.
1797년 군인이었던 페리 체 파스콰레 바초키와 결혼했다.
1804년 프랑스 제1제정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제국의 女公爵이 되었고
1806년에는 룩카-피온비노 大公妃가 되었다.
1809년에 토스카나 대공국이 부활하면서 여대공으로 봉해졌지만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과 동시에 잠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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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의 夫>
페리 체 바초키(Felice Pasquale Baciocchi, 1762년 5월 8일-1841년 4월 27일)
코르시카 섬의 공무원이었다.
1797년 5월 1일에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와 결혼해서, 룩카-피온비노公(1805년 6월 23일)이 되었다.
엘리자 사이에 4명의 아이를 낳았다.
Felice Napoleone Baciocchi, 1798년-1799년
Elisa Napoleone Baciocchi, 1806년-1869년
Girolamo Carlo Baciocchi, 1810년-1811년
Federico Napoleone Baciocchi, 1813년-1833년
<엘리자와 바초키의 초상이 담긴 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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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
루이(스) 보나파르트. 코르시카 명은 루이지
Louis Buonaparte(네델란드 명:Lodewijk Napoleon) 1778년 9월 2일-1846년 7월 25일
나폴레옹의 남동생.
나폴레옹에 의해서 홀란드(네덜란드)왕, 베루크大公, 쿠레페大公, 산-루伯의 지위가 주어졌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과 이집트원정에 함께 참가했고, 나중에 류머티즘에 걸렸다.
조세핀이 데려온 아이였던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와 결혼했다.
세 명의 남자 아이를 낳았다.
*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1802년-1807년)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1804년-1831년) 홀란드 왕 데웨이크2세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년-1873년) 프랑스황제 나폴레옹3세
그러나 음울한 성격의 그와, 조세핀을 닮아서 밝고 사교적이었던 오르탄스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서 부부사이는 좋지가 못했다.
프랑스혁명전쟁의 결과, 1795년 네덜란드에 바타비아공화국이 성립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곳을 영국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라고 평가했고, 그래서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사람으로 루이를 그곳의 국왕으로 보냈다. 그래서 루이는 1806년 6월 22일에 헤이그로 들어갔고, 그러자 바타비아공화국은 홀란드로 이름을 개명했고, 루이는 그곳에서 로-데웨이크1세가 되었다. 그러나 루이는 단순히 나폴레옹의 괴뢰만은 아니었다. 그는 네덜란드인들의 이익을 배려했고, 네덜란드 왕으로서의 책무를 양심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內政이나 경제부흥에도 관심을 나타냈었고, 나폴레옹 법전의 도입이나 가톨릭교회의 復權 등을 실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징병제의 도입도 거부했었다. 그는 또 대륙봉쇄령에도 반대했었지만, 그러나 그 무렵에는 밀무역도 횡행했던 데다가, 거기다 또 1809년에는 영국군이 지이란드(Zeeland)州에 상륙한 일도 있고 해서, 나폴레옹은 1810년에 2만 명의 군대를 네덜란드에 파견했고, 그와 함께 루이를 퇴위시켰다. 그 후, 루이는 보스니아로 망명했다. 그러자 홀란드왕국은 루이 퇴위 후 10일간은 차남 나폴레옹 루이를 국왕 로-데웨이크 2세로 옹립한 후 프랑스 제국에 병합시켰고, 이어서 루브란이 총독으로서 암스테르담에 주재했다. 그리고 또 한편, 루이는 동년 오르탄스와 이혼했다. 그러자 아이 중 삼남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오르탄스가 데려가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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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의 妻>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Hortense de Beauharnais, 1783년 4월 10일-1837년 10월 5일)
나폴레옹1세의 황후 조세핀의 딸.
나폴레옹3세의 어머니.
오빠는 우제누 드 보아루네.
<생애>
오르탄스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마르티니크 섬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아버지였던 아렉산들 드 보아루네子爵은 심한 바람기 등으로 어머니였던 조세핀과 사이가 나빴고, 이어서 그런 이유 등으로 해서 그 두 사람은 1783년에 이혼했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1794년 4월 아렉산들은 잡혀서 카룸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후 7월 23일에 처형되었다. 그러자 조세핀도 아렉산들이 투옥된 1개월 후에 같이 투옥되었지만, 그러나 아렉산들이 처형된 4일 후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해서 처형되었고, 그로인해 혁명정부는 쓰러졌으며, 공포정치도 끝나게 되어 조세핀은 풀려났다. 그 후에 조세핀은 총재정부의 실력자 바라스의 애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의 구애를 받아서 1796년의 3월 9일에 나폴레옹과 결혼했다. 그 후, 오르탄스는 오빠 우제누와 함께 나폴레옹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폴레옹의 요망에 의해서 나폴레옹이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남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1802년 초두에 결혼했다. 그러나 루이는 가벼운 반신마비가 있었기 때문에 음울한 성격이었고, 오르탄스는 또 조세핀을 닮아서 밝고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부부는 사이가 나빴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에 즉위하자 1806년 루이는 홀란드(네덜란드) 국왕에 그리고 오르탄스는 그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오르탄스는 (탈레랑과 후라오 백작 부인의 아들) 샤를 드 후라오 백작과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그때, 나폴레옹도 그 일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불행한 결혼을 주선했다는 죄책감으로 묵인해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루이와 오르탄스는 1810년에 이혼했다. 그러자 3명의 아들 가운데 三男이었던 루이 나폴레옹(후의 나폴레옹3세)은 오르탄스가 데려갔다. 오르탄스는 이혼 후 샤를 드 후라오와 동거했다. 그리고 1811년에 샤를 오규스트 루이 죠제프(후의 드 모르니 후작)를 낳았다. 그러나 결국 그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고, 그 아들은 후라오가 데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1814년에는 조세핀이 사망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중 그녀는 튈르리(Tuileries) 궁전에 나폴레옹보다 한발 앞서 들어가서 여주인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와 오빠 우제누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과는 달라서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실했다. 프랑스 제국 붕괴 후에는 독일, 이탈리아에 망명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州의 城館 아레넨베르크를 매입해서 그곳에서 定住했다. 그 후, 1837년 10월 5일에 그녀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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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의 子>
※ 2子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Napoleon Louis Bonaparte, 1804년 10월 11일-1831년 3월 17일)
홀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별명:로-데웨이크1세)의 아들. 그의 형 샤를은 1807년 불과 4세에 죽었다.
형의 사후, 그는 홀란드의 왕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까지 아이가 없었던 황제(나폴레옹)의 제일 나이가 많았던 조카로
1811년까지 황위계승권 제1인자였다.
1809년, 황제는 그를 베루크大公에 임명했고, 1813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1810년에 아버지가 퇴위하자 프랑스군이 침공할 때까지 10일간 홀란드 왕 로-데웨이크2세로서 군림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퇴위 당하자 그는 망명했다.(어딘지는 모름)
그는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의 딸이었으며(막내), 자신의 사촌이었던 샬롯트와 결혼했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카르보나리에 참가했다.
*카르보나리(이:Carbonari. 불:Charbonnerie)
19世紀前半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혁명적인 비밀결사.
급진적인 입헌자유주의를 부르짖었고, 노라, 토리노를 처음으로 해서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관헌에게 쫓겨서 잠복하던 중 1831년 3월 17일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그것은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嫡子 나폴레옹2세보다 1년 앞선 죽음이었다.
그 후, 나폴레옹 제국은 1852년 그의 남동생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 다시 부활했다.
그는 일 드 프랑스의 산 루 라 포레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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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의 子>
※3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Napoleon III.
본명은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Napoleon Bonaparte)
1808년 4월 20일-1873년 1월 9일
프랑스 제2공화정의 대통령(재임:1848년-1852년).
후에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재위:1852년-1870년).
황후는 스페인 귀족의 딸 우제니 드 몬티죠.
<생애>
1. 성장배경
나폴레옹1세의 남동생인 루이의 3남으로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1세의 조카로 루이=나폴레옹으로 통칭된다. 보나파르트家 출신으로 유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어머니 오르탄스와 함께 독일, 이탈리아 등을 전전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아레넨베르크에서 자랐다. 1821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독일어가 제1언어가 되어버렸고, 그의 프랑스어에서도 독일어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일부 보수파나 반독일주의자들에게서 <프랑스 황제면서 독일인과 같은 프랑스 말밖에는 할 수 없다>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지극한 독일어에 대한 애착심으로 알자스를 시찰했을 때, 그 주민들에게 독일어를 꼭 지켜내라고(계승) 호소까지 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그는 1830년부터 1831년에 걸쳐서 이탈리아에 체류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형 나폴레옹 루이와 함께 카르보나리당에 참가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관헌들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었다.(나폴레옹 루이는 그때 홍역으로 병사했다) 1832년에는 사촌동생이었던 나폴레옹2세가 병사했고, 그러자 그는 백부였던 나폴레옹1세의 후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2. 대통령당선과 帝政樹立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7월 왕정’ 타도를 호소했고, 두 번에 걸쳐서 반란까지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1840년 종신형선고를 받고 햄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1846년에 탈옥해서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2월 혁명 발발 후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그리하여 의원자격으로 프랑스에 복귀했다.
그리고 제2공화정이었던 1848년 12월에는 유력자였던 카베난크 장군에게 압승하고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황태자 대통령(Prince-President))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정치 경험이 거의 없었고 또 당시의 정계에서도 인맥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하자면 주위의 정적들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권력을 착실히 쌓은 후,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다음 해였던 1852년에는 나폴레옹1세와 같이 국민투표를 거쳐서 帝政을 개시했고, 이어서 나폴레옹3세로서 군림했다.
그 후, 1852년부터 1860년까지를 權威帝政, 1860년 1월 23일에 체결된 영불통상조약(자유무역에로의 전환)으로부터 1869년까지를 自由帝政, 1869년부터 1870년까지의 에밀 올리비에 내각 때를 議會帝政이라고 부른다.
그는 권위제정에서는 산업자본의 이익원호정책을 추진했고, 또 당시의 세느(센)縣 지사 오스만과 함께 파리의 시가지를 대개조하는(파리개조, 1853년-1870년) 등의 대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자유제정에서는 입법원에 대해 큰 폭으로 권한을 양보했고, 민중에게도 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저널리즘을 경시했기 때문에 멕시코 간섭 후에는 그 권위를(악평에 의해서) 크게 손상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는 1869년부터 에밀 올리비에의 제3당의 육성에 임했다. (그러나 보불전쟁의 패전으로 좌절함) 그리고 또 그는 1867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또 국내의 통치로서는 성직자나 농민, 산업자본가 등 다른 계층의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교묘한 통치를 펼쳤다. 그 통치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한다.
3. 對外전쟁
1853년 크리미아전쟁에서는 영국과 오스만 제국 측에 참가(참전은 1854년부터)했다.
그리고는 러시아제국을 물리쳤으며, 파리조약으로 세계에 프랑스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1856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알로우(Arrow) 전쟁을 일으켜서 淸朝를 굴복시켰다(1860년).
1858년에는 인도차이나로 출병해서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획득했다.
1859년 5월 3일에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개입했고, 비토리오 에마뉴엘2세가 인솔하던 사르데냐 군과 함께 轉戰했다. 그리고 6월 4일 마젠타의 싸움, 6월 24일의 소르페리노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했던 대가로 프론비에르 밀약에 근거해서 사보이와 니스를 획득했다.
1861년에는 또 멕시코 출병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1864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남동생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에 앉혔다. 그러나 베니토 후아레스가 인솔하던 共和군과 미국의 항의로 1867년에 철병했다. 그리고 그 출병은 현저하게 제2제정의 위엄을 손상시켜서 프랑스 제2제정은 그로 인해서 붕괴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또 그는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에도 진출해서 주일대사 레옹 롯슈를 통해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4. 보불전쟁
1870년, 스페인의 왕위계승권에 관련되어서 프로이센과 다투었고, 비스마르크의 계략(엠스電報사건)에 의해서 7월 19일 선전포고했다(보불전쟁). 그러나 부하의 실책으로 초반부터 열세에 몰렸던 그는 9월 2일 세단의 싸움에 스스로 출진했지만, 신장결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이동 할 수도 없어 결국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어서 포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파리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9월 4일에 실각했다, 그로써 제2제정은 막을 내렸고, 900년의 긴 세월(한 시기를 제외하고)에 걸쳐서 계속되었던 프랑스의 군주지배는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승리했던 프로이센은 전 독일을 통일했고, 베르사유궁전거울(鏡) 사이에서 독일황제 빌헬름1세의 대관식을 실시했다.
5. 망명
1871년 3월, 그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했고, 1873년 1월 9일 망명 처였던 영국의 캠 덴 플레이스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었던 나폴레옹 우제누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4세)는 영국군에 입대해서 1879년에 아프리카남부에서 전사했다.
6. 평가
제3공화정 이후 나폴레옹3세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것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거기에는 보불전쟁으로 알자스 로레이누 지방을 잃었던 것과 제1차 세계대전의 화근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또 그 제위가 항복과 혁명으로 끝났다는 것 등이 그 큰 이유였다.
그러나 그가 행했던 파리대개조나, 영국과의 우호관계 확립 등은 프랑스를 더욱 튼튼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밖에도 이탈리아통일전쟁에 개입해서 사보이와 니스 지방을 획득하는 등
수많은 성과도 함께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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