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族, 妻,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妹>

 포리누(파울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 1780년 10월 20일-1825년 6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2번째 여동생. 코르시카 명은 파올레타.
 
나폴레옹에게서 가장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나폴레옹은 그녀를 <포 렛>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은 전부 미인이었다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단, 성격은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였다고 한다.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작은 얼굴에다 흑발이었고, 잔디 색 눈동자를 가졌던 미녀였다고 한다.

 


 <내력>

 그녀는 15세 때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부관이었으며, 騎兵士官이었던 쥬노 장군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가 군대급여 외에는 수입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그녀는 또 그 1년 후에 과격한 혁명가로 이름났던 플레이보이 루이=마리 스타니스라 후레론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과 그의 어머니가 반대를 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은 그녀를 지키거나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세루보로니 궁전에다 그녀의 방을 마련해주었다. 그러자 그 때문이었던지 그녀의 사랑 놀음은 곧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궁전에서 마치 아이 같은 장난을 한다거나, 감시요원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살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또 아주 미남이었으며 금발이었던 샤를 비크토르 에마뉴엘 르크레일 장군과 사랑에 빠져서 결국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1801년 10월에 르크레일은 산 드망(현재의 아이티)에 전임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그녀의 간병도 보람 없이 黃熱病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귀국했고, 줄곧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그러나 喪服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남편 喪이 끝나자마자 화려한 사교계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그녀를 다시 당시 28세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던 명문귀족이었던 카밋로 보르게이제 후작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제1의 재산가에다 미남이었지만, 거의 文盲이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그와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해서 별거했고, 다시 파리로 진출해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1805년 그녀는 살롱을 열었고, 그곳에서 알게 된 와그람 공작의 부관이었던 줄 드 캐논 빌과 사랑에 또 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나폴레옹이 아렉산드르1세로부터 받았던 러시아산 흑초(검은담비)모피를 그 남자에게 줘버렸고, 그러자 그에 불쾌함을 느꼈던 나폴레옹은 그 둘을 헤어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속명령을 받았고, 프랑스와 러시아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서 자살하겠다느니,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느니 하면서 나폴레옹을 협박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나폴레옹의 설득에 넘어갔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그 다음은 또 포병사관이었던 오규()스트 듀샤르 그리고 나폴레옹의 친구였던 명배우 타르마와의 염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또 화가였던 니코라 필립 오규스트 드 포르반과도 사랑에 빠졌다. (그는 명문출신에다 세련된 미남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는 또 그녀의 어머니가 반대했고, 그리고는 어렵게 설교한 뒤에 헤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상심하여 불과 數週 만에 자신에게 짖는 개들은 모두 사살해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은 또 음악(노래)교사였던 페리 체 브랑지니, 미남 작곡가 죠반니 파치니 등과 교제했다.
 그러나 그렇게 변덕스러웠던 그녀도 나폴레옹은 잘 따라서 1814년에 그가 엘바 섬으로 가기 위해 도착했던 후레쥬스 항구까지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에 감격했던 나폴레옹이 그녀를 꼭 껴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또 그가 입고 있었던 군복이 싫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나폴레옹이 입고 있었던 군복은 폭도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 위장했던 오스트리아의 군복이었다)

 그 후, 그녀는 또 엘바 섬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곳 생활이 힘들어지자 자신의 보석들을 모두 팔려고 내놓기도 했다.
 그녀는 또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이 중병을 앓고 있었을 때 극진히 간호도 했다.
 그러나 그녀도 1825년에는 불치의 암에 걸렸고, 이어서 사망했다.
 그녀에게는 전 남편이었던 르크레일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한명 있었을 뿐이었다.




 <妹>

 
카로리누(카롤린) 보나파르트(Caroline Bonaparte, 1782년 3월 25일-1839년 5월 18일)
 나폴레옹의 3번째 여동생.
 죠아살 뮤라 원수의 아내.
 2남 2녀를 낳았다.
 
권세욕구의 강했던 야심가.



 <생애>

 
1. 성장배경

 
1782년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에서 보나파르트家(당시는 브오나파르테家)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프랑스로 가족들이 이주를 한 후, 1796년 色男의 군인 뮤라를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후였던 1800년 1월 18일에(18세) 32세의 뮤라와 결혼했다.

 2. 결혼 후

 신혼 후(1800년) 뮤라는 곧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했고, 공적을 쌓아서 궁전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그는 쉴 틈도 없이 다시 각지로 전전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여왕처럼 살았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1804년) 뮤라는 제국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富者가 된 두 사람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또 나폴레옹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차례로 애인들을 소개했고
 그 밀회를 위해서 자신의 별장까지 제공했다.

 그 후 그녀는 엘리제 궁전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그러나 이때부터 부부는 싸움이 많아졌다) 그리고
 1805년 아우스트리트 싸움의 전공으로 뮤라는 독일의 엘베 강 유역에 있던 작은 나라의 대공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 나라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함께 가지 않았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의 새 황후 메리 루이즈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1807년에 쥬노 장군과 이상한 일을 벌였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자신의 남편을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한 포석으로써였다. 그러나 그 일은 소문으로 인해서 곧 발각되었고, 그 결과 쥬노 장군은 좌천되었으며, 뮤라는 격노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택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사 멧테르니히였다.
 그는 다른 프랑스의 정부고관들과 함께 그녀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했었지만, 그러나 그 일도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녀를 멀리하기 위해서 나폴리왕국의 여왕으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기뻐하며 그곳으로 부임해갔지만, 그러나 그녀는 또 그곳에서 단독으로 부임을 해버려서, 이미 1809년 1월에 그곳 국왕에 즉위하고 있었던 남편과 대립하게 되었다.

 3. 몰락

 그녀는 뮤라가 1812년 러시아원정에 참가하자 혼자서 攝政을 실시했다. 그러나 통치도 잘하지 못했던 데다가 바람기가 도져서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그녀는 또 나폴레옹이 원정에서 실패하고 패주를 계속하던 중,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손잡으려 했지만, 그러나 프랑스 항복 후의 빈 회의는 그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 어쩔 수 없이 엘바 섬을 탈출해왔던 나폴레옹에게 다시 협력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또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통지를 받자 뮤라와 헤어지고 혼자서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나폴리왕비 직위를 포기하면 지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 후, 그녀는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장기적으로 머물렀으나
 그러나 그때 또 마침 콜레라가 유행했기 때문에 피렌체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카로리누의 夫> 




 뮤라(Joachim Murat-Jordy, 1767년 3월 25일-1815년 10월 13일)
 
프랑스의 군인, 원수.
 후에 나폴레옹의 의동생이 되어서 황족으로서 우대되어 나폴리왕위에 올랐다.
 (Gioacchino1세, 재위:1808년-1815년).

 <생애>

 
1. 관직에 오름(仕官)

 그는 처음에 숙박업(여관)을 운영하던 탈레랑家의 부동산관리인이기도 했었던 피에르 뮤라의 막내(12형제 중)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의 희망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했지만(그때 나중까지 친구로 지내게 되는 베시르를 만났다), 적성에 맞지가 않았고, 1787년에는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퇴학당했다.

 그 후, 그는 무일푼으로 방랑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騎兵中隊에 매료되어서 즉흥적으로 입대했다.
 그로부터 군력이 시작되었던 그는 2년 만에 중사까지 진급했지만, 그 후 일시 귀향해서 방물가게를 열기도 했다.

 
그는 풍채가 아주 좋고 인기도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서 꽤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군에 다시 복귀했고, 그로부터 흥망을 반복하면서 젊은 기병지휘관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갔다. 그는 1792년에는 소위가 되었고, 그것은 또 당시의 선출방식이었던 호선제도에 힘 입었던 바 컸다. (그만큼 동료들에게서 인기가 있었다)

 2. 대두(擡頭)

 그는 1795년 방데미엘의 반란 중 파리 시내에서 대포탈취임무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던 나폴레옹(당시, 폴 바라스의 부관)과 만났다. 그리고는 임무를 훌륭히 성공시키고 왕당파 반란진압에 공헌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공적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뮤라도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후, 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에 자원했고, 이집트원정에서는 부상을 입고도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어서 나폴레옹의 측근으로 또 우수한 기병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확립시켰다.
 그는 또 1800년에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로리누와 결혼했고, 그로써 나폴레옹가의 일원도 되었다. 그리고 1804년에는 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수많은 싸움에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세계 최고의 기병>이란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한편, 고관으로서의(군사령관) 판단력과 결단력에서는 많은 흠도 보였다.

 3.
배반

 1806년에 그는 베루크 대공이 되었고, 1808년에는 스페인 왕이었던 죠제프를 대신해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죠악키노1세를 자칭함) 그러나 그러한 영달은 그를 보수적, 퇴영적으로 내몰았고, 또한 끓어오르던 권력욕으로 인해서 그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만들고자 자신의 아내와도 나폴레옹과의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또 1812년 러시아원정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대패로 끝나자 스스로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서 적국이었던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마음대로 교섭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 1814년에는 완전하게 프랑스를 배반했다.

 4. 轉落

 그는 프랑스를 배반하고 이탈리아통일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빈 회의에서 그는 왕위를 박탈당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나폴레옹에게로 돌아가서 이탈리아 방면을 도모하겠다는 인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독단으로 오스트리아와 開戰해서 대패했고, 이어서 다시 프랑스로 도망쳐서 돌아왔다. 그러자 그에 격노했던 나폴레옹은 그의 관직을 박탈했고, 이어서 벌어졌던 워털루전쟁 뒤에 그는 또 부족한 병력으로 나폴리탈환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실패했으며, 그 후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5. 인물상

 그는 동시대에 유례가 없었을 만큼 우수했던 기병지휘관이었으며, 특히 나폴레옹에게서는 빼놓을 수 없었던 훌륭한 부하였다. 그는 또 훌륭한 騎手였으며, 천하무적, 용기백배 등 최고의 찬사와 아울러서 어떤 亂戰에서도 맨 먼저에 뛰어들고는 또 태연하게 생환했던 용사였기도 했다. 그는 또 장신에다 위풍당당했고, 잘생겼던 용모에다 멋있는 말투까지 갖추었던 대단한 멋쟁이였다. (그가 스스로 디자인했던 화려한 군복을 입고 전장을 질주하면 적아군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거기까지였고, 일단 말에서 내리게 되면 그는 우유부단하고 경박했으며, 대군을 지휘하는 능력도, 전략적 시각도, 정치외교 능력도 없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후에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였지만, 회의의 들어가면 판단력도 결단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내려주신 아주 큰 용기는 그의 지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 인간 안에 (모두 )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도저지 믿을 수가 없다...>

 그는 또 上述한 베시르와는 친구였지만, 란누나 다브와는 친하지가 않았다.
 그는 또 중세의 기사를 모방해서 자신의 검에 좌우명으로 <명예와 귀부인을 위하여>란 문구를 새겨 넣었다. 그래서 그는 뭍 여성들로부터 찬미의 시선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큰 기쁨으로 여겼던 희대의 멋쟁이 남자였다.

 그러나 그와 달리 그의 최후는 총살형이었고, 그때 그는 또 銃殺隊에게 <머리는 쏘지 마라. 곧바로 심장을 쏘아라>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박하게도 수발의 총탄은 그의 머리로 향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미모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프랑스 국왕에 복위했던 루이18세가 뮤라의 처형을 명했던 것은 1804년에 행해졌던 안갼公의 처형에 대한 복수라고도 알려졌다. 그리고 또 그때, 동료였던 네이 원수도 함께 총살되었다.

 6. 가족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었고, 장남 나폴레옹 아실은 미국으로 망명해서 조지 워싱턴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플로리다에서 농원을 경영했다. 차남 나폴레옹 류시앙 샤를은 이탈리아통일전쟁 때 부르봉가를 대신해서 나폴리국왕 자리를 노렸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명의 손자 중 레오포르트는 스페인의 왕위계승문제로 국왕후보에 올려져서 보불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弟>

 
제롬 나폴레옹(Jerome Bonaparte, 1784년 11월 15일-1860년 6월 24일)
 나폴레옹의 3번째의 남동생(막내아우).
 코르시카명은 지루라모
 프랑스의 괴뢰국가 베스트파렌 왕국의 국왕(재위:1807년-1813년)
 이하, 앞에서 상세히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제롬의 子>

 ※ 내용이 너무 확대되므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음

 1.

 마칠드 보나파르트(Mathilde-Letizia Wilhelmine Bonaparte, 1820년 5월 17일-1904년 1월 2일)

 
나폴레옹 1세의 막내아우 제롬의 장녀.
 
어머니는 제롬의 2번째의 아내였던 뷰르텐베르크 왕녀 카타리나.
 
나폴레옹 죠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나폴레옹公)의 누나.
 프랑스 제2제정 시대에는 우제니 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2.

 나폴레옹 죠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Napoleon Joseph Charles Paul Bonaparte)
 1822년 9월 9일. Trieste-1891년 3월 17 일. 로마

 
프랑스 제2제정기의 정치가, 황족.
 나폴레옹 1세의 막내아우 제롬의 아들.
 통칭 프린스(프란스) 나폴레옹(나폴레옹公, Prince Napoleon) 혹은 프론=프론(Plon-Plon).
 아버지의 이름을 취해서 나폴레옹 제롬(Napoleon Jerome) 모두 불린다.
 사촌 나폴레옹3세와는 물과 기름의 성격으로, 가끔 대립했다.



 


 * (참고)

 우제니 드 몬티죠(Eugenie de Montijo, 1826년 5월 5일-1920년 7월 11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3세의 황후.
 그녀는 테바백작의 令孃 마리아 에우에니어 이그나티아 아그스티나 데 파라포크스 이 코르크패트릭(스페인어:Dona Maria Eugenia Ignacia Agustina de Palafox y Kirkpatrick, Condesa de Teba)으로 태어났고, 결혼하면서 프랑스 황후 우제니(프랑스어:Eugenie, Imperatrice des Francaise)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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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族, 妻,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

 류()시앙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년 3월 21일~1850년 7월 29일)
 
코르시카 명은 루치아노
 프랑스의 정치가.
 나폴레옹1세의 남동생.
 카니노公.
 브뤼메르 쿠데타의 공로자.

 <생애>

 그는 코르시카 섬의 아쟉시오에서 태어났다. 1783년에 오탄의 코레이쥬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고, 그 다음 해 브리엔누에 입학했지만 도중에 중퇴했다. 1786년에는 액스-안-프로방스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시 또 중퇴해서 코르시카 섬으로 되돌아갔다. 혁명이 발발하고 그 여파가 코르시카 섬에도 미치게 되자 자코뱅파에 가입했다. 섬의 지도자 파스칼 파오리가 혁명정부와 대립하자 정치클럽 <공화국 협회>에서 파오리 탄핵연설을 했고, 그 협회는 또 파오리의 즉시 파면에 관한 청원서를 국민공회에 보냈다. 그러자 국민공회는 그것을 채택했고, 파오리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체포령의 취소를 요구하던 교섭 중에 무력충돌이 발생, 그는 섬에서 추방되었다. 1792년 프랑스 이주 후, 산-마크시만-라-산트-봄 마을의 양말(糧秣-軍糧과 馬草, 糧草)창고를 운영하면서 인민협회의장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일시적으로 Brutus로 개명했다. 1794년에 테르미도르 쿠데타의 여파로 액스-안-프로방스에서 체포되었지만, 나폴레옹 등이 힘을 써서 곧 석방되었다. 그 후에 등장했던 총재정부에서는 ‘5백인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원정에서 돌아오자(1799년 10월 9일) 그를 도와 쿠데타 준비를 진행했다. 11월 10일, 계획대로 군대를 거느린 나폴레옹이 5백인회의의 회의장에 나타나서 의원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예상외의 저항을 받아서 퇴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그때, 회의장 밖으로 나왔던 그가 대기하고 있던 군대 앞에서 <공화국의 군대를 파괴하고 있는 피트의 손끝을 회의장으로부터 일소하라!>라는 연설로 병사들을 회의장 안으로 돌입시켰다. 그러자 의원들은 저항했지만 금방 쫓겨났고,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자 내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형제사이가 나빠져서 파직 당했다. 1800년에는 駐마드리드 대사가 되었지만, 다시 또 충돌했다. 아레크산드리누-쟈콥 드 브레살과 1803년에 재혼했다. 그 여성은 테레이즈 카바류스와 같이 유명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미움을 받았고, 1804년부터 그는 황위후계자에서 배제되었다. 그 화해를 위해서 그녀와 이혼하고 정략결혼 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응하지 않았다. 그 사이, 이탈리아, 영국 등 주소를 바꾸어가며 미국으로 향하던 도중 영국 船에 잡혀서 억류되었다. 1814년에 로마로 이주했으나 그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백일천하 때 그는 나폴레옹에게 다시 협력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다시 몰락하자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비테르보에서 1850년에 사망했다.

 <비고>

 그는 17세 때 이미 23세였던 나폴레옹을 평가해서

 <나폴레옹은 전제군주의 소질이 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독재자가 될 것이다!>

 라고 그의 본질을 간파했었다고 한다.







 <류시앙의 子>

 
피에르-나폴레옹 보나파르트(Pierre-Napoleon Bonaparte) 1815년 10월 11일~1881년 4월 7일

 프랑스 제2제정기의 황족.
 류시앙 보나파르트의 아들.
 백일천하 바로 직후에 태어났다.
 난폭한 성격으로 세상의 평판이 나빴다.
 1870년 1월에 공화파의 저널리스트와 트러블을 일으켜서 그 상대방을 사살했다.
 그 사건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공격구실이 되어서, 각지에서 공화파의 대규모 데모가 발생했다.





 <妹>

 마리아-안나 보나파르트(Maria Anna Bonaparte)
 통칭, 엘리자 보나파르트(Elisa Bonaparte, 1777년 1월 13일~1820년 8월 7일)

 나폴레옹의 여동생.
 토스카나女大公-재위:1809년-1814년.
 1777년 코르시카 섬에서 탄생.
 1784년에 당시의 여자교육으로서는 최고학부였던 산-씰 학원에 입학했지만, 1792년에 중퇴했다.
 1797년 군인이었던 페리 체 파스콰레 바초키와 결혼했다.
 1804년 프랑스 제1제정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제국의 女公爵이 되었고
 1806년에는 룩카-피온비노 大公妃가 되었다.
 1809년에 토스카나 대공국이 부활하면서 여대공으로 봉해졌지만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과 동시에 잠적했다.





 <엘리자의 夫>

 페리 체 바초키(Felice Pasquale Baciocchi, 1762년 5월 8일-1841년 4월 27일)

 코르시카 섬의 공무원이었다.
 1797년 5월 1일에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와 결혼해서, 룩카-피온비노公(1805년 6월 23일)이 되었다.
 엘리자 사이에 4명의 아이를 낳았다.

 Felice Napoleone Baciocchi, 1798년-1799년
 Elisa Napoleone Baciocchi, 1806년-1869년
 Girolamo Carlo Baciocchi, 1810년-1811년
 Federico Napoleone Baciocchi, 1813년-1833년



<엘리자와 바초키의 초상이 담긴 코인>



 <弟>

 루이() 보나파르트. 코르시카 명은 루이지
 Louis Buonaparte(네델란드 명:Lodewijk Napoleon) 1778년 9월 2일-1846년 7월 25일

 나폴레옹의 남동생.
 나폴레옹에 의해서 홀란드(네덜란드)왕, 베루크大公, 쿠레페大公, 산-루伯의 지위가 주어졌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과 이집트원정에 함께 참가했고, 나중에 류머티즘에 걸렸다.
 조세핀이 데려온 아이였던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와 결혼했다.
 세 명의 남자 아이를 낳았다.

 *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1802년-1807년)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1804년-1831년) 홀란드 왕 데웨이크2세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년-1873년) 프랑스황제 나폴레옹3세

 그러나 음울한 성격의 그와, 조세핀을 닮아서 밝고 사교적이었던 오르탄스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서 부부사이는 좋지가 못했다.

 
프랑스혁명전쟁의 결과, 1795년 네덜란드에 바타비아공화국이 성립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곳을 영국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라고 평가했고, 그래서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사람으로 루이를 그곳의 국왕으로 보냈다. 그래서 루이는 1806년 6월 22일에 헤이그로 들어갔고, 그러자 바타비아공화국은 홀란드로 이름을 개명했고, 루이는 그곳에서 로-데웨이크1세가 되었다. 그러나 루이는 단순히 나폴레옹의 괴뢰만은 아니었다. 그는 네덜란드인들의 이익을 배려했고, 네덜란드 왕으로서의 책무를 양심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內政이나 경제부흥에도 관심을 나타냈었고, 나폴레옹 법전의 도입이나 가톨릭교회의 復權 등을 실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징병제의 도입도 거부했었다. 그는 또 대륙봉쇄령에도 반대했었지만, 그러나 그 무렵에는 밀무역도 횡행했던 데다가, 거기다 또 1809년에는 영국군이 지이란드(Zeeland)州에 상륙한 일도 있고 해서, 나폴레옹은 1810년에 2만 명의 군대를 네덜란드에 파견했고, 그와 함께 루이를 퇴위시켰다. 그 후, 루이는 보스니아로 망명했다. 그러자 홀란드왕국은 루이 퇴위 후 10일간은 차남 나폴레옹 루이를 국왕 로-데웨이크 2세로 옹립한 후 프랑스 제국에 병합시켰고, 이어서 루브란이 총독으로서 암스테르담에 주재했다. 그리고 또 한편, 루이는 동년 오르탄스와 이혼했다. 그러자 아이 중 삼남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오르탄스가 데려가서 키웠다.







 <루이의 妻>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Hortense de Beauharnais, 1783년 4월 10일-1837년 10월 5일)

 나폴레옹1세의 황후 조세핀의 딸.
 나폴레옹3세의 어머니.
 오빠는 우제누 드 보아루네.



 


 <생애>

 오르탄스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마르티니크 섬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아버지였던 아렉산들 드 보아루네子爵은 심한 바람기 등으로 어머니였던 조세핀과 사이가 나빴고, 이어서 그런 이유 등으로 해서 그 두 사람은 1783년에 이혼했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1794년 4월 아렉산들은 잡혀서 카룸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후 7월 23일에 처형되었다. 그러자 조세핀도 아렉산들이 투옥된 1개월 후에 같이 투옥되었지만, 그러나 아렉산들이 처형된 4일 후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해서 처형되었고, 그로인해 혁명정부는 쓰러졌으며, 공포정치도 끝나게 되어 조세핀은 풀려났다. 그 후에 조세핀은 총재정부의 실력자 바라스의 애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의 구애를 받아서 1796년의 3월 9일에 나폴레옹과 결혼했다. 그 후, 오르탄스는 오빠 우제누와 함께 나폴레옹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폴레옹의 요망에 의해서 나폴레옹이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남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1802년 초두에 결혼했다. 그러나 루이는 가벼운 반신마비가 있었기 때문에 음울한 성격이었고, 오르탄스는 또 조세핀을 닮아서 밝고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부부는 사이가 나빴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에 즉위하자 1806년 루이는 홀란드(네덜란드) 국왕에 그리고 오르탄스는 그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오르탄스는 (탈레랑과 후라오 백작 부인의 아들) 샤를 드 후라오 백작과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그때, 나폴레옹도 그 일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불행한 결혼을 주선했다는 죄책감으로 묵인해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루이와 오르탄스는 1810년에 이혼했다. 그러자 3명의 아들 가운데 三男이었던 루이 나폴레옹(후의 나폴레옹3세)은 오르탄스가 데려갔다. 오르탄스는 이혼 후 샤를 드 후라오와 동거했다. 그리고 1811년에 샤를 오규스트 루이 죠제프(후의 드 모르니 후작)를 낳았다. 그러나 결국 그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고, 그 아들은 후라오가 데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1814년에는 조세핀이 사망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중 그녀는 튈르리(Tuileries) 궁전에 나폴레옹보다 한발 앞서 들어가서 여주인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와 오빠 우제누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과는 달라서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실했다. 프랑스 제국 붕괴 후에는 독일, 이탈리아에 망명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州의 城館 아레넨베르크를 매입해서 그곳에서 定住했다. 그 후, 1837년 10월 5일에 그녀는 사망했다.




 <루이의 子>

 ※ 2子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Napoleon Louis Bonaparte, 1804년 10월 11일-1831년 3월 17일)

 홀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별명:로-데웨이크1세)의 아들. 
그의 형 샤를은 1807년 불과 4세에 죽었다.
 형의 사후, 그는 홀란드의 왕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까지 아이가 없었던 황제(나폴레옹)의 제일 나이가 많았던 조카로
 1811년까지 황위계승권 제1인자였다.
 1809년, 황제는 그를 베루크大公에 임명했고, 1813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1810년에 아버지가 퇴위하자 프랑스군이 침공할 때까지 10일간 홀란드 왕 로-데웨이크2세로서 군림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퇴위 당하자 그는 망명했다.(어딘지는 모름)
 그는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의 딸이었으며(막내), 자신의 사촌이었던 샬롯트와 결혼했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카르보나리에 참가했다.

 *카르보나리(이:Carbonari. 불:Charbonnerie)
 19世紀前半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혁명적인 비밀결사.
 급진적인 입헌자유주의를 부르짖었고, 노라, 토리노를 처음으로 해서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관헌에게 쫓겨서 잠복하던 중 1831년 3월 17일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그것은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嫡子 나폴레옹2세보다 1년 앞선 죽음이었다.
 그 후, 나폴레옹 제국은 1852년 그의 남동생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 다시 부활했다.
 그는 일 드 프랑스의 산 루 라 포레에 매장되었다.







 <루이의 子>

 ※3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Napoleon III.
 본명은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Napoleon Bonaparte)
 1808년 4월 20일-1873년 1월 9일

 
프랑스 제2공화정의 대통령(재임:1848년-1852년).
 후에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재위:1852년-1870년).
 황후는 스페인 귀족의 딸 우제니 드 몬티죠.



 <생애>

 1. 성장배경

 나폴레옹1세의 남동생인 루이의 3남으로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1세의 조카로 루이=나폴레옹으로 통칭된다. 보나파르트家 출신으로 유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어머니 오르탄스와 함께 독일, 이탈리아 등을 전전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아레넨베르크에서 자랐다. 1821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독일어가 제1언어가 되어버렸고, 그의 프랑스어에서도 독일어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일부 보수파나 반독일주의자들에게서 <프랑스 황제면서 독일인과 같은 프랑스 말밖에는 할 수 없다>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지극한 독일어에 대한 애착심으로 알자스를 시찰했을 때, 그 주민들에게 독일어를 꼭 지켜내라고(계승) 호소까지 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그는 1830년부터 1831년에 걸쳐서 이탈리아에 체류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형 나폴레옹 루이와 함께 카르보나리당에 참가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관헌들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었다.(나폴레옹 루이는 그때 홍역으로 병사했다) 1832년에는 사촌동생이었던 나폴레옹2세가 병사했고, 그러자 그는 백부였던 나폴레옹1세의 후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2. 대통령당선과 帝政樹立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7월 왕정’ 타도를 호소했고, 두 번에 걸쳐서 반란까지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1840년 종신형선고를 받고 햄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1846년에 탈옥해서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2월 혁명 발발 후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그리하여 의원자격으로 프랑스에 복귀했다.
 그리고 제2공화정이었던 1848년 12월에는 유력자였던 카베난크 장군에게 압승하고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황태자 대통령(Prince-President))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정치 경험이 거의 없었고 또 당시의 정계에서도 인맥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하자면 주위의 정적들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권력을 착실히 쌓은 후,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다음 해였던 1852년에는 나폴레옹1세와 같이 국민투표를 거쳐서 帝政을 개시했고, 이어서 나폴레옹3세로서 군림했다.

 그 후, 1852년부터 1860년까지를 權威帝政, 1860년 1월 23일에 체결된 영불통상조약(자유무역에로의 전환)으로부터 1869년까지를 自由帝政, 1869년부터 1870년까지의 에밀 올리비에 내각 때를 議會帝政이라고 부른다.
 그는 권위제정에서는 산업자본의 이익원호정책을 추진했고, 또 당시의 세느()縣 지사 오스만과 함께 파리의 시가지를 대개조하는(파리개조, 1853년-1870년) 등의 대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자유제정에서는 입법원에 대해 큰 폭으로 권한을 양보했고, 민중에게도 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저널리즘을 경시했기 때문에 멕시코 간섭 후에는 그 권위를(악평에 의해서) 크게 손상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는 1869년부터 에밀 올리비에의 제3당의 육성에 임했다. (그러나 보불전쟁의 패전으로 좌절함) 그리고 또 그는 1867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또 국내의 통치로서는 성직자나 농민, 산업자본가 등 다른 계층의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교묘한 통치를 펼쳤다. 그 통치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한다.

 3. 對外전쟁

 1853년 크리미아전쟁에서는 영국과 오스만 제국 측에 참가(참전은 1854년부터)했다.
 
그리고는 러시아제국을 물리쳤으며, 파리조약으로 세계에 프랑스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1856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알로우(Arrow) 전쟁을 일으켜서 淸朝를 굴복시켰다(1860년).
 1858년에는 인도차이나로 출병해서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획득했다.
 1859년 5월 3일에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개입했고, 비토리오 에마뉴엘2세가 인솔하던 사르데냐 군과 함께 轉戰했다. 그리고 6월 4일 마젠타의 싸움, 6월 24일의 소르페리노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했던 대가로 프론비에르 밀약에 근거해서 사보이와 니스를 획득했다.
 1861년에는 또 멕시코 출병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1864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남동생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에 앉혔다. 그러나 베니토 후아레스가 인솔하던 共和군과 미국의 항의로 1867년에 철병했다. 그리고 그 출병은 현저하게 제2제정의 위엄을 손상시켜서 프랑스 제2제정은 그로 인해서 붕괴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또 그는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에도 진출해서 주일대사 레옹 롯슈를 통해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4. 보불전쟁

 1870년, 스페인의 왕위계승권에 관련되어서 프로이센과 다투었고, 비스마르크의 계략(엠스電報사건)에 의해서 7월 19일 선전포고했다(보불전쟁). 그러나 부하의 실책으로 초반부터 열세에 몰렸던 그는 9월 2일 세단의 싸움에 스스로 출진했지만, 신장결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이동 할 수도 없어 결국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어서 포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파리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9월 4일에 실각했다, 그로써 제2제정은 막을 내렸고, 900년의 긴 세월(한 시기를 제외하고)에 걸쳐서 계속되었던 프랑스의 군주지배는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승리했던 프로이센은 전 독일을 통일했고, 베르사유궁전거울(鏡) 사이에서 독일황제 빌헬름1세의 대관식을 실시했다.

 5.
망명

 1871년 3월, 그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했고, 1873년 1월 9일 망명 처였던 영국의 캠 덴 플레이스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었던 나폴레옹 우제누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4세)는 영국군에 입대해서 1879년에 아프리카남부에서 전사했다.

 6. 평가

 제3공화정 이후 나폴레옹3세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것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거기에는 보불전쟁으로 알자스 로레이누 지방을 잃었던 것과 제1차 세계대전의 화근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또 그 제위가 항복과 혁명으로 끝났다는 것 등이 그 큰 이유였다.
 그러나 그가 행했던 파리대개조나, 영국과의 우호관계 확립 등은 프랑스를 더욱 튼튼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밖에도 이탈리아통일전쟁에 개입해서 사보이와 니스 지방을 획득하는 등
 수많은 성과도 함께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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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族, 妻,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父>

 샤를(르) 마리 보나파르트(불:Charles Marie Bonaparte. 1746년 3월 29일-1785년 2월 24일)
 '코르시카 섬'의 '프랑스' 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버지.
 '코르시카어' 名은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Buonaparte)'
 그는 1746년 '코르시카 섬'의 '부오나파르테 가(家)'에서 출생했으며
 그 '부오나파르테 가문'은 '론바르디아 주(州)'에 기반을 두었던 오래된 지주(地主)의 가문이었다.
 1764년 14세의 ‘마리아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했고, 이후 8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섬에서 판사를 지냈으며 '코르시카 섬' 독립투쟁 때는 ‘파오리’의 부관을 맡았다.
 그러나 그 후에 '프랑스'에 전향했고, 그 일로 해서 프랑스 귀족 자격을 획득했으며
 '나폴레옹'을 본토의 사관학교로 보냈다.
1785년에 사망했다.


 



 <母>

 


 마리아 레티츠(치)아 보나파르트(舊姓-라모리노) Maria Letizia Bonaparte
 1750년 8월 24일~1836년 2월 2일
 
프랑스 황태후. 결혼 전의 성은 라모리노(Ramolino)

 <생애>

 제노바공화국의 대위 죠반니 제로니모 라모리노의 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나서 14세에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결혼.
 5남 3녀를 얻었다. (나폴레옹은 차남)
 
코르시카 섬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군인으로 참가했고
 그 후에 남편이 죽자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생하면서 살았다.
 1792년에 코르시카 섬에서 쫓겨나자 가족 전원이 마르세유로 이주했다.
 그 후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을 전부 다 혼자서 길러냈다.
 
장남 죠셉(죠제프)이 클라리 집의 장녀 메()리 쥴리와 결혼했을 무렵에는 살림살이도 좋아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나폴레옹도 그 차녀 데지레와 사귀게 되어서 그녀도 찬성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이 1796년에 죠세피누와 결혼하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려하자 반대했고, 그래서 1804년 12월 2일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태후의 칭호를 얻고서도 다른 가족들과 달리 검소하게 생활하며 금전을 절약했다.
 프랑스 제1제정이 붕괴하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되자 로마로 망명했다.
 그리고는 후에 친히 엘바 섬까지 가서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부하들과 그 가족들을 도왔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실패하자 다시 로마로 망명했다.
 그 후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었던 죠제프 펫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만년에는 실명까지 했지만, 그러나 정신은 끝까지 명석하여 총기를 잃지 않았다.
 1836년,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던 가운데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프랑스황제의 어머니였으면서도 코르시카 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정체성)가 강했고
 프랑스로 이주하고 나서도 평생 코르시카 어를 사용했다.


 <叔父>

 
죠셉 펫슈(Joseph Fesch, 1763년 1월 3일~1839년 5월 13일)
 프랑스의 성직자.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의 남동생이며, 나폴레옹의 숙부.
 제노바공화국의 대위 죠반니 제로니모 라모리노의 아들.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에서 태어났고
 액스-안-프로방스 신학교를 졸업하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제가 되었다.
 1792년에 나폴레옹의 가족과 함께 코르시카 섬에서 쫓겨나서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나폴레옹의 출세와 함께 투기와 상거래로 부자가 되었다.
 
1797년에는 코르시카 섬이 프랑스군에게 재점령되면서 귀성했고, 그곳에서 토지를 매점했다.
 그 후 그는 더욱 부자가 되어서 繪畵 컬렉션도 시작했다.
 1801년에 로마가톨릭교회와의 화해를 원했던 나폴레옹이
 로마교황 피우스7세와 政敎조약을 맺자 樞機卿과 리용大司敎로 취임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친척 중에서 추기경을 배출하는 것으로 가톨릭의 지지를 얻으려고 기도했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교황이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유폐까지 되자, 그는 나폴레옹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면서 로마로 망명했고,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백일천하 때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다)
 
1827년에는 아작시오에 펫슈 미술관을 건립했고, 회화 컬렉션은 그만두었다.





 <兄>

 죠세프(죠셉) 보나파르트(코르시카 명은 쥬제페)
(Joseph Bonaparte, 1768년 1월 7일~1844년 7월 2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 왕으로서는 쥬제뻬 보나파르테(Giuseppe Bonaparte, 재위:1806년-1808년)
 스페인 왕으로서는 호세1세(JosI, 재위:1808년-1813년) 라고 자칭했다.

 <생애>

 코르시카 섬의 코르테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의 이름은 쥬제뻬 나브리온 부오나파르테(Giuseppe Nabulion Buonaparte).
 로마주재 프랑스대사 등을 역임했다.
 1794년 8월 1일 쥴리 클라리와 결혼했고. 쥴리(Julie), 제나이드(Zenaide), 샬롯트(Charlotte) 3녀를 낳았다.
 프랑스혁명이 勃發하자 혁명정부에 의해서 비란드리城(Chateau de Villandry)은 압류되었다.
 후에 황제에 즉위 한 나폴레옹은 그 성을 그에게 주었다.
 1806년, 그에게 나폴리군의 지휘권이 주어졌고, 이어서 나폴리 왕에 즉위했다.
 2년 후, 의동생 뮤라가 나폴리의 왕위를 계승했고, 그는 스페인 왕 호세1세가 된다.
 (그것은 스페인 왕가의 내분을 틈타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하려했던 나폴레옹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백성들은 그에 반발해서 그를 “Pepe Botella”라고 불렀다.
 ※ pepe는 Jose(프랑스 명 죠제프에 상당)의 속칭이었으며, Botella는 영어로 bottle, 즉 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즉, 주정꾼 죠제프를 의미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견실하게 국내개혁에 노력했고, 異端심문의 폐지, 봉건제의 폐지 등, 舊체제의 타파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은 스페인의 귀족들과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아서 스페인의 근대화에 공헌할 뻔했다. 그러나 그 성급한 개혁은 또 성직자와 地主 등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그리고 또 구태의연하게 체제를 개선하려던 그의 文治정치의 시도는 당시 武斷정치를 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에 의해서도 沮害되었다.
 그는 또 스페인 게릴라들과의 화해를 바랬지만, 나폴레옹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그때 게릴라정벌로 일관했고,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에 의한 군사적인 제압과 스페인 국민의 탄압을 추진했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스페인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그 후, 그곳에서 스페인독립전쟁이 격화되자 軍政이 들어왔고, 그로써 그는 괴뢰 왕이 되었다.
 1813년 그는 결국 폐위되었고, 나폴레옹전쟁 종결 후 망명했다.
 1832년, 나폴레옹의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사망했을 때는 보나파르티스트들에 의해서 프랑스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1844년, 그는 76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체는 파리의 오텔 데 잔바릿드(폐병원)에 매장되었다.




  * 죠제프의 처 - Marie Julie Clary는 앞에서 설명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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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外...


 <나폴레옹에 관한 逸話>

 1) Beethoven의 <영웅> 교향곡 제3번

 '
나폴레옹'을 <인민의 영웅>이라고 기대해서<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으로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었던 'Beethoven'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던 사실에 실망을 해서 '나폴레옹'에게 보낼 생각이었던 '메시지'를 파기했고 또 곡명도 <영웅>으로 변경했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지에 대해서는 이설도 많다.

 
그것은 또 'Beethoven'은 始終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 '제2악장'이 '영웅의 죽음과 장송'을 테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실제는 '베토벤'이 그 곡을 헌상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찾아갔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분노를 느꼈던 '베토벤'이 곡명을 바꾸었고, 그리고는 현재 알고 있는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친구에게 흘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왔다는 설 등이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해서는, 그 배경으로 당시 작곡가들의 지위향상에 대한 경계선을 의식했던(간접시사) 하나의 시대적인 에피소드였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다.

 2) 그리고 '以下'는 후세의 창작(지어낸 것)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참고로 소개함

 
* 그는 하루에 잠을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낮잠으로 그 부족한 잠을 보충했었다.

  <
그에는 또, 자신이 왕이란 것과 軍神이란 중압감 등으로 인해서 그것을 해소하고자 평소 과음과 과식(특히, 기름진 것)을 일삼았던 탓에 낮잠을 잘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또 그의 단명으로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다>

 
* '잭-루이 다비드'가 그렸던 <알프스를 넘어서=또는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이란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가 타고 있었던 것은 <로바(당나귀)>였다.
   
(그때 그 근처에는 안내인도 있었다)



                
                                                     <다비드>
                               

                                                     <로바의 예>


 * 블레이저코트 등의 소매에 붙어있는 단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 때
   병사들이 소매에 콧물을 닦지 못하게 하려고 붙였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 그가 타고 있던 말은 '아일랜드産'이었다.

 * 그는 치질에 시달렸다.

 * '엘바 섬'에서 '파리'로 돌아오던 도중 그의 주식은 '계란 프라이'였다.
    (그는 그때, 기꺼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의 악필은 유명해서, 친구조차도 戰時지도로 오해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그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다.

 * 그는 샴페인으로 목욕을 했다.

 * 그는 '조세핀'에게 매일 저녁 책을 읽어주었다.

 * 그는 독서를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읽은 것은 얼마 없었다.
   다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은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 그는 페티시즘(fetishism-物神숭배)의 경향도 있었다.
   그 예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 목욕탕에는 들어가지 말 것>이라는 편지를 전장에서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상대는 자신의 애인이지만, 이름은 不明이기 때문에 조세핀으로 추정함)
  
그리고 또, 그가 자고 있을 때 블루치즈를 가져갔는데
   그러자 그는 <죠세피누인가?>하고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 그는 음치였다.

 *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기타연주 솜씨를 보였다.

 * 그는 암살되는 것이 무서워서 스스로 면도를 하고 있었다.

 * 그는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할 만큼 침착성이 없었다.
   <그에는 ADHD(注意결함, 다동성장해)설이 있다>

 * 그는 위하수를 앓고 있었다.

 * 그는 개선(疥癬-피부감염증)에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 최전선에서 부하에게서 옮았던 것으로 생각됨.

 * 그는 왼손에 코인을 쥐고, 오른손은 들었던 프라이팬으로 탄(燒) 크레프(또는 크레페-crepe:밀가루와 계란, 물로 섞어서 만든 전병, 간이식품. 원래는 메밀로 만들었다고도 함)를 잘 뒤집을 수 있으면 1년이 잘 된다고 믿는 <크레페 운세>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1812년 2월 2일에 그 <크레페 점>에 도전했으나 다섯 번이나 실패를 했고, 그래서 그해 <모스크바원정>에 실패하고 퇴각했을 때 <이것은 나의 다섯 번째 크레페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 그는 수학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고, 측근에 수학자를 두고 공부를 계속하기도 했다고 한다.
   (푸리에 등. 또는 르잘돌이나 라그란쥬와도 친교가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발견했다고 여겨지는(여러 가지 설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나폴레옹의 정리>라는 것도 있었다.



 ** 나폴레옹의 定理=기하학 정리의 하나이다.

 <내용>

 

임의의 삼각형에 대해서 각 변을 1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리고, 그 3개의 정삼각형 중심끼리 묶었을 때, 그 삼각형은 정삼각형이 된다. 그 삼각형을 <나폴레옹의 삼각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3개의 정삼각형 외측에 그리는 경우와 안쪽에 그리는 경우 2방법이 있지만, 그 모두 정삼각형이 된다. 그 2개의 정삼각형의 면적은 원래의 삼각형과 동일해진다. <나폴레옹 삼각형>의 중심은 원래의 삼각형의 중심과 일치한다. 상기 정리를 '나폴레옹'이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그는 키가 작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바젤 대병원'의 '류그리'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신장이 167㎝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것은 또 당시의 프랑스인 평균 신장이(병역검사의 자료에서 볼 때) 160cm이하로 여겨지므로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전투 중에 총알이 모자를 관통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므로, 키가 좀 더 컸더라면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 그는 닭고기를 좋아했고, 특히 <마렌고 풍(병아리, 어린 닭으로 만든 것)>을 좋아했다.
   (마렌고 전투 때 요리사가 즉흥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음)

 *
그는 '죠세피누'의 애견 '포츈(pug)'에게(죠세피누의 침대에 들어갔을 때) 물렸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 그는 간질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야간에 자주 발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 대해서는 또 '
이탈리아'의 학자 '체자레 론브로조'는 그의 저서 <천재론>에서
   '나폴레옹'의 간질증상을 지적했고, 천재와 간질과의 관련성을 말했다.
  
<천재와 광인은 근소한 차이>라는 말은 거기서 나왔던 것이라고 한다.


   


 ** Cesare Lombroso, 1835년 11월 6일~1909년 10월 19일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로 '범죄인류학'의 창시자이다.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한 Camillo Golgi의 지도교관이기도 했다.






 * 그는 새롭게 고용했던 비서 앞에서 갑자기 끝없이 政見을 말하고 나서 그 前文을 쓰기를 요구했으며
   그것을 해내지 못하거나 거절당하게 되면 격노해서 당일로 해고해버리기도 했다.
  
그는 또 혼잣말과 같이 정견을 끝없이 말하는 버릇이 있었고, 그 내용은 또 생각나는 대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비서는 최대 5백매의 원고까지 필기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또 그의 업무량은 너무도 엄청나서, 비서들이 그 일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자주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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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外...


 <나폴레옹의 肖像>은 '제4공화국' 마지막 '10000프랑 지폐'와 '제5공화국 重프랑제도' 최초의 '100N프랑'에 그려져 있었다.


 < 나폴레옹의 말 >

 
Impossible, n'est pas francais - 불가능이라는 말은 프랑스적이지 않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생전에 자주 했다는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나의 辭典에는 불가능이란 문자(단어)는 없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도 
원래는 <불가능이란 문자는 바보들의 사전에서만 존재한다>였다 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그리고 또, 그 밖에도 <프랑스인은 불가능라는 말을 말해서는 안 된다>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이 그 말을 했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후세의 창작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 그리고
以下는 '나폴레옹' 관련 引用句集에 따름 >

 
※ 단, 이중 또는 삼중번역이므로, 표현이 다소 다를 수도 있음.(기존 나와있는 것들과)

 1.
불가능이란 말은 프랑스어에는 없다. (또는 불가능이라는 말은 프랑스적이지가 않다)
   
Impossible n'est pas francais.

  그러나
같은 의미로 다르게 말한 것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문자는 없다>
  <불가능이란 단어는 바보들의 사전에서만 존재한다>
  <불가능이란 소심자의 幻影이요, 비겁자의 피난소이다> 등이 있다.

 2.
천재란 그들의 世紀를 조명해서 빛나게 하고, 또한 운명까지 결정지을 수 있었던 流星 같은 존재다.
   
Les hommes de genie sont des meteores destines a bruler pour eclairer leur siecle.

  '
루소'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
프랑스혁명'의 기초를 만든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의 안식을 위해서 더 이상의 '루소'도 '보나파르트'도 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제1집정 시에 루소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그가 했다는 말이라고 한다)

 3. 어리석은 자는 과거를, 현명한 자는 현재를, 미친 자는 미래를 말한다.

 4. 위대함이 빛을 발하는 것은 回想에 의해서거나, 想像에 의해서 만이다.

 5. 최대의 위기는 승리의 순간에 있다.

 6. 종교는 궁핍한 사람이 부자를 살해할 생각을 멈추게 한다.(
영어로부터 3중 번역)

 7. 종교란 서민을 침묵하게 하는데 딱 좋은 妙藥(눈속임-역주)이다.

 8. 매우 잘 통치된 국가에서는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만 있는 편이 좋다.
   
그러나 그 경우에 성직자는 민중에게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

 9. 종교 없는 사회는 나침반 없는 배와 같은 것이다.

 10. 사람은 그 制服대로의 인간이 된다.

 11. 위대한 인간은 필요치 않다. 그러면 잔혹한 일도 결코 없게 될 것이다.
      Les grands hommes ne sont jamais cruels sans necessite.

 12.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13.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거든, 하지 않으면 된다.

 14. 평화라는 것은 여러 나라의 진정한 利害, (모든 나라에 있어서의 名譽있는 利害)에 기초를 둔 차근차근하고
     심사숙고된 하나의 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면 패배도 없고, 위협도 없을 것이다.

 15. 전쟁이란 나의 수중에 든 무정부상태에로의 해독제였다.
      La guerre a ete dans mes mains l'antidote de l'anarchie.

 16. 時代란 인간이 만드는 위대한 예술이다.
     Le temps est le grand art de l'homme.

 나는 이제 단 몇 사람에게도 복종할 수가 없다. (그것은) 命令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위기가 왔을 때 '잔 다르크' 같은 영웅이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제군이 혁명전쟁의 끝을 열망한다면, 무기를 다 거둬들여라.
 나에게 6만의 군사가 더 주어진다면, 그것은 16만이란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확실히 야심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위대하고도 고상한 야심이었다.
 나는 국민의 자유를 제일로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사실, 현재의 제정은 일종의 공화제인 것이다.
 '프로이센'의 그 훌륭했던 군대는 마치 가을날에 나타나는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진정한 정복이란 것, 그리고 어떠한 悔恨도 수반하지 않는 정복이란 결국 無知의 정복뿐입니다.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가 했던 말>

 17. 나는 언제나 일을 시작할 때, 차근차근 명상부터 한다.
    
그리고 내가 언제나 모든 일에 대해서 또는 모든 일로 향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를 기획하기 전에 끝없는 명상으로, 발생 가능한 상황을 모두 예상해보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보이는 경우에서도
     그에 대해서 내가 말해야 할 것과 이루어야 할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내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심사숙고와 명상에 의한 결과이다.

 18. 莊嚴함에서부터 우스꽝스러움(어리석음)까지는 불과 한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19. 나는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것들을 '프랑스'에서 실현하고 싶었다.

 20. '유럽'에서 외교가 있는 나라(것, 존재)는 둘뿐이다.
      즉 '영국'과 '탈레랑(Talleyrand-19세기 초 정치가이자 외교관. 앞에서 페리고르로 소개되었음)'이다.
     
탈레랑, 貴下는 비단신에 묻은 똥이다.
     
(전체적으로 영국과 탈레랑을 비꼬아서 한 말로 생각됨-역주)
     
Monsieur, vous etes de la merde dans un bas de soie. Extrait d'une Lettre a M. Talleyrand



<탈레랑=페리고르>



 21. 국민의 응석을 모두 받아 주는 사람을 뛰어난 통치자라고 할 수는 없다.

 22. 국민은 그 意思에 反한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프랑스인'만큼 통치하기 쉬운 국민은 없다.

 24.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판단력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25. 전쟁에서는 장난기가 많은 인간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곳에서는 한사람(병사)이 그 모두이(기 때문이)다.

 26. 한번 싸움을 결의했다면, 그 결의를 계속해서 지켜야만 한다.

 27. 다음날의 전투를 대비해서 신선한 부대를 남겨 두는 장군은 거의가 다 항상 진다.

 28. 너의 군대가 수에서 劣勢라면 적에게 틈을 주지 말고 이동 중의 적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

 29. 최고의 병사는 싸우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행군하고 있을 때의 병사이다.

 30. 피를 흘리는 것은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

 31. 장군이란 군대의 머리이며 모두이다.
     
갈리아(Gallia. Gaul-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 강 서쪽 독일, 알프스이남 북부 이탈리아 등)를 정복했던 것은 '로마'의 군대가 아니고 'Caesar'였다. (그리고) '로마'를 떨게 했던 것은 '카르타고'의 군대가 아니고 '한니발'이었다. (그리고) '인더스 강'까지 갔던 것은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아니고 '알렉산더'였다.

 32. 중국이 눈을 뜰 때, 세계는 전율할 것이다.

 33. 유럽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큰일을 할 수 있는 곳은 東洋뿐이다. 그곳에서야말로 큰 평판과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

 34. 어떠한 생애에서도 영광은 그 최후에 있다.

 35.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생애는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로망(장편소설 또는 동경, 낭만)이란 말인가!

 36.
위대한 '그스타프 아돌프'를 봐라! 18개월 중에 그는 최초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2번째 싸움에서 패배했으며, 그리고는 3번째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너무나 염가로 명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37. '프랑스군'의 선두에!...

     
임종 직전에 남긴 말이라고 하며, 황후였던 '조세핀(조세피누)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설도 있다.
      <
그러나 조제프(형)라는 설도 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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