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루이 아렉산들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년 2월 20일-1815년 6월 1일)

 프랑스제국의 원수. 副宮內長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참모장.
 누샤텔大公, 바그람大公.




 
 <생애>

 
1. 成長來歷

 
그는 베르사유에서 공병부대(Corps de genie)사령관의 庶子로 태어났다. 그리고 13세에 왕립공병학교에 입교했고, 공병으로서의 지식을 익힌 후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미국독립전쟁에서는 로살()보伯의 휘하로 파견되었고, 그 후에 공적을 올려서 귀국 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프랑스혁명-바스티유감옥의 습격>


 그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국왕 '루이16세'에 의해서 베르사유 국민위병의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루이16세>


 그리고 1791년에는 루이16세의 숙모의 국외도피를 도왔으며
 그러나 그러한 王과의 깊은 관계 때문에 8월 10일사건 후에는 군무가 모두 해임되었다.



  ** 8월 10일 사건 <혁명전쟁과 8월 10일 사건>

 피르니츠 선언과 왕당파 망명귀족(에미그레-移民을 의미함)에 의한 선동활동은 혁명정부에 대한 중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유지를 위해서 대외전쟁을 단행했다.
 1792년 4월, 혁명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로 인해서 프랑스혁명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사관들은 귀족계급이었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비협조적이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패배했다.(그에는 또,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측에 프랑스군의 정보를 흘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거기다 또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서 프랑스 영내로 침입하자 그에 당황했던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 국토에 호소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되었던 의용군들이 파리로 속속 집결했다. (그때, 마르세유에서 의용병들이 불렀던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후에 프랑스국가가 되었다그리고 그때 파리 시민들과 의용병들은 프랑스군의 패배가 전쟁에 비협조적이었던 루이16세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8월 10일 튀일리 궁전을 공격해서 들어갔고, 이어서 왕권을 정지시켰으며, 국왕일가 전원을 템플 탑에 유폐시켰다.(이상, 8월 10일 사건)



<템플 탑-1734년>

<1792-8-10사건>


그 후, 당통의 연설을 계기로 9월 2일부터 반 혁명파 사냥이 행해졌고
며칠간에 걸치는 대학살이 행해졌다. (9월 학살-이하, 생략)



<당통>




 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혁명전쟁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서 유능한 사관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 복귀했다.
 그 후에 그는 니코라 류크네르 원수의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차례로 듀무리에, 케레르만의 휘하에서 근무했다.



                                   <케레르만>
                 

 2. 나폴레옹의 참모장

 1796년, 그는 이탈리아방면 군에 파견되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군무를 해냈다.
 그는 또, 지휘관의 명령을 깊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좋은 형태로 각 부대에 전달, 지도하는 뛰어난 능력 또한 선보였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이상적인 참모장으로서 더욱 높게 평가했다.
 그는 또 이탈리아원정에도 참여했고, 로디의 싸움 등에서 공적을 올렸다. 그리고 1797년에 캄포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자 총재정부에 조약을 승인시키기 위해서 파리로 파견되었다.
 1798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로마공화국의 건국을 지도했고, 이어서 이집트원정에도 참여했다.
 1799년,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귀국했고. 동년 11월 9일 브뤼메르 쿠데타에도 관여해서 육군대신이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다시 이탈리아원정을 감행했고, 이어서 6월 14일 마렌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전쟁에서 그는 예비군을 맡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참모장으로서 부지런히 일한 바 있었다. 그 후, 그는 평화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 즉시 제국원수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의 여러 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06년에는 바란잘() 공작, 누샤텔 대공작이 수여되었으며, 1807년에는 帝國의 副宮內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반도전쟁 및 對오스트리아 전쟁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바그람 대공작이 되었다.
 그는 1808년에 바이에른 왕의 질녀와 결혼했다.

 3. 나폴레옹과의 결별

 러시아 원정은 그에게서도, 나폴레옹에게서도 전환기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보로디노 전투 때, 작전회의에서 번번이 이견으로 충돌했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그를 멀리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모총장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계속해서 완수해나갔다.
 그 후, 그는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나폴레옹을 떠났다.
 그 후에 그는 루이18세에게 복종했고, 왕제를 지지했으며, 파리입성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가있던 동안, 그가 보냈던 탈출계획에 관한 편지를 받게 되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窓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했다.
 그러나 그에는 또 사고설과 암살설이 있다.

 4. 평가

 그는 개인적으로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더불어서 진두에 서서 지휘를 했던 것으로 인해서 부상도 자주 당했다. (로디 전투에서 군기를 들고 돌격했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고 그였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군단지휘관으로서는 보통의 역량을 보여준 것뿐이었고, 바그람 전투에서는 실패도 범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역시 그 걸출한 참모능력에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작전을 이해하고 그것을 최적인 형태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이상적인 참모장이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솔트가 실수를 범했던 것에 대해서 나중에 나폴레옹이 그를 평가했던 부분을 참조)
 그러므로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그의 참모능력은 필수였다.
 단, 그는 자신의 권능을 몹시 고집했던 타입이어서 동료들과의 충돌도 많았다.
 (특히, 다브와의 다툼은 전쟁 그 자체를 파탄으로 몰고 갈 뻔했다든지, 또 네이가 찾아냈던 군사학자 죠미니를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홀대해서, 그에 분개했던 죠미니는 러시아군으로 투항해버렸다는 등)
 



 * 란누(Jean lannes)

 앞에서 설명되었음.



                  




 * 루이-가브리엘 슈셰(Louis-Gabriel Suchet, 1770년 3월 2일-1826년 1월 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1. 成長來歷

 그는 리용의 부유한 견직물 제조업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동료 원수들이 대부분 궁핍하고 괴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별 부자유 없는 생활 속에서 소년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 리용에서 학교를 다녔고, 17세가 되자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으며, 그로인해 가업을 물려받을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2년 후에 혁명이 발발했고, 그러자 그는 혁명에 찬동해서 가업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서 국민위병대에 투신했다.

 
2. 혁명군의 士官으로서

 
그 후, 그는 곧 인품이 알려져서 중령으로 승진(호선방식-앞에서 설명되었음)했다.
 
그리고 1793년에는 고향인 리용의 반란진압에도 참가했고, 이후 전전하다 툴롱 공위전에서는 보병대대를 인솔했으며, 敵將을 잡는 등 수훈을 올렸다.
 그 툴롱의 싸움은 나폴레옹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싸움이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서로가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도 혁명정부의 모범적인 사관으로서 근무했고, 때로는 반혁명분자들을 단죄하기도 했다.
 1795년에 그는 이탈리아방면 군에 배속되어서 맛세나의 지휘 하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군을 자주 물리쳐서 勇名을 날렸다.
 그 후에 그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으로 취임하자 그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장 이외에서 나태하고도 난폭했던 맛세나와의 감정적인 대립이 깊어지자
 그 스스로 나폴레옹에게 접근했다.

 
3. 프랑스 屈指의 師團長

 그는 그때 이미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던 우수한 사단장으로서 충분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역시도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을만한 그런 야심이나 출세욕구도 있었다.
 그러나 공화파로서의 경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맛세나와의 대립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출세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임무는 착실하게 해나갔고, 솔트 원수와 이어서 란누 원수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종군했다.
 그는 또 특히 란누에게서 신뢰를 받아서 아우스트리트 전투와 계속된 독일전쟁에서도 란누의 제5군단이 주력으로 활약했던 만큼, 그 副將격으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1808년부터는 군단마다 스페인전선을 전전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는 쥬노 장군 휘하로 들어가서 제3군단에 소속되었다.

 
4. 스페인 戰線

 그러나 그는 새롭게 모시게 된 그 쥬노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으로 전출되었던 초기에는 의욕도 없이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자 그 즈음, 란누도 쥬노보다 그를 더욱 신뢰해서, 그 다음해 사라고사 함락과 함께 스페인을 떠날 때는 그 두 사람을 교대시키도록 나폴레옹에게 진언했다. 그러자 그것이 수용되어서 그는 간신히 염원하던 군단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피폐해있던 군단을 단기간에 고쳐 세웠고, 자신의 수비범위였던 아라곤지방의 안정에 진력했다. (그는 그때 약탈을 엄금했고, 파괴되었던 사라고사를 재건했다. 그리고 현지를 최대한 배려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서 그 일을 성공시켰다)




<에브로 강과 사라고사의 석양>

 
 그것은 또 그때 그 스페인전선에서는 아주 예외적이었던 것으로, 그가 그만큼 행정관으로서도 지극히 우수했음을 보여주었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또 그는 적으로부터도 경의가 표해져서, 그때의 敵將 중에서는 그의 새 신부(그는 그때 20세 연하의 스페인에서 데려온 여성과 결혼했던 바로 직후였다)가 살고 있던 숙소는 포격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지시까지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또 게릴라소탕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또 군사적인 성공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인들과 공동으로 소탕작전을 실시하는 등, 현지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희유의 지휘관 모습을 보여주었던 일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고, 그 후 러시아원정 실패 후의 스페인전선 붕괴 때도 잘 견뎌냈으며, 그러한 것은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라곤의 ordesa 계곡>


 5. 백일천하와 그 후

 나폴레옹 실각 후, 그 역시도 일단은 신왕 루이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네이의 권유로)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알프스방면 군총사령관에게 임명했고, 이어서 이탈리아방면과 프랑스본국의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그 인사에는 비판이 많았다)
 그는 사실 참모총장으로서는 솔트보다도 훨씬 적임이었으며, 또 전선지휘관으로서도 그 능력은 주전장이었던 서부전선 쪽이었어야만 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도 그에 대해서 나중에 <그루시가 아니라 그를 임명했었더라면 워털루에서 이겼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아무튼, 그는 알프스방면으로 가서도 활약했지만, 그러나 그 도중에 워털루의 패보가 도착하자 항복했다. 그리고 그는 왕정복고 후에는 네이의 도망을 도와주려다가 일시 추방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곧 명예회복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공직을 맡는 일없이 평온하게 생애를 끝냈다. 그러자 사라고사의 시민들은 그를 위해서 추도의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6. 인물상

 St Helena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휘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지휘관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가 보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슈셰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만약 그가 두 명이었더라면, 아마도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평정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평도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세상살이가 서툴렀던 탓에 승진이 늦어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전술지휘관으로서의 그 역량은 다브나 맛세나와 동등했고, 또 조직의 관리자나 통솔자 또는 民政家로서는 동료들에 비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수완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또 그런 면에서 사람에 따라서는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는 최우수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거기다 또 그는 인품도 온화했던 데다가 병사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었기 때문에(그러나 그 역시도 사관들에게는 어렵게 대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나폴레옹이 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켜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아쉬움도 남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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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아라곤의 Teruel 대성당>



 * 니콜라 샤를 우디노(Nicolas Charles Oudinot, 1767년 4월 25일-1847년 9월 1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루지오 공작.
 
1808년 7월 2일, 제국 백작.
 에슬링 및 바그람 전투의 공으로 1809년 7월 12일에 제국 원수로 승진.
 제국민 전쟁에서는 베를린 공략을 맡았지만, 그로스베렌의 싸움에서 패배해서 실패했다.
 복고왕정 하에서는 근위대 소장.
 1823년의 스페인 간섭 때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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