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 18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 및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했던 '프랑스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발음은 워털루, 독일에서는 라 벨 아리안스의 싸움(라 벨 아리안스의 투쟁, Schlacht bei Belle-Alliance)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벨기에'의 '라 벨 아리안스'를 主전장으로 했지만, 그러나 'Wellington공'에 의해서 근교의 '워털루'의 이름을 취함으로 해서 그와 같이 명명되었다.
<워털루 포진도-청색이 프랑스군. 맨 아래가 나폴레옹>
어쨌든, 그때 영국군은 워털루 남방의 '몬-산-쟌(Mont Saint Jean-워털루에서 南南東으로 5km-그림에서는 上中 연합군 뒤쪽 길게 그려진 부분)'이라는 구릉 능선의 배후에 주력을 배치해두고는, 그 우익이었던 '워그몬(또는 위그몽-Hougomont-下左 붉은 색으로 괄호처럼 그린 곳 바로 뒤 조그만 사각형 부분)'과 중앙이었던 '라 에이 상트(La Haye Ssante-그림의 正中 부분 새부리처럼 그려놓은 곳 바로 뒤), 그리고 좌익이었던 '파페롯트(Papelotte-그림의 중앙 부분 오른쪽 맨 끝 파란색 화살표 부분)' 3 거점에다 비교적 강력한 전초부대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上 도면 참조)
※ 그러나 紙面이 너무 협소하여 그림을 확대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따라서 상세한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많은 자료를 다룰 수 없음에 한계를 느끼지만, 그러나 읽으시는 분이 계시면, 그 점을 이해를 해주길 바라며, 보다 자세한 것을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훌륭한 참고 문헌들과 자료들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워털루 전장-포진도의 푸른색이 프랑스군>
※ 참고: 나폴레옹의 위치는 사진의 正中上 멀리 보이는 부분의 숲 바로 뒤
그러자 나폴레옹은 우선 '위그몽(사진에서는 상단 오른쪽 숲이 있는 부분. 실제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농가가 있는 마을임)'을 공격 거점으로 하고, 그로써 영국군의 주력을 유인해내서 격파한 후, 전선의 중앙을 돌파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어서 11시 30분 무렵, 프랑스군 좌익이 먼저 그 '위그몽' 공격에 나섰다. 그러자 또 영국군은 방어치중작전을 고수해서 그 돌격해오던 프랑스군에게 맹사(猛射)를 퍼부어댔다. 그러자 또 그에 응사해서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었던 '제롬'이 더욱 공격의 수위를 높였지만, 그러나 그때 '위그몽'의 성관(城館)이 워낙에 견고했던 탓에 그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13시 30분부터 다시 시작되었던 프랑스의 중앙군과 우익 각부대의 본격적인 공격으로 인해서 영국군 좌익의 '파페롯트'가 끝내 함락되었고, 이어서 그 지휘관이었던 '픽톤(Picton)'마저 그 와중에 전사해버려서 영국군은 곧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또 그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Wellington'은 '폰손비 장군'이 인솔하던 '스코틀랜드 용기병(龍騎兵)'을 핵심으로 했던 중(重)기병 2개 여단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의 중앙부는 곧 큰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 맞상대로 출병했던 프랑스군의 창(槍)기병(불: 란시에)들에 의해서 그들은 결국 패주했다. 그리고 또 그때 '폰손비'도 창기병들의 창을 여러 개나 맞으면서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그러나 그 돌격으로 인해서 영국군은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얻어내기도 했다.
<워털루의 라이온힐>
그 후,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영국군이 그토록 기다리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 우익 가까이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로보 군단'을 우익으로 돌려서 프로이센군을 견제하게 했다.
※ 상황참고: 나폴레옹은 그 전쟁이 개시되기 전에 이미 그루시軍을 부를 것을 명해두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솔트는 단 한 명밖에 전령을 내지 않았고 <그에 대해서는 또 후에 “만약 베르티에 원수였다면 전령을 한 다스나 냈을 것이다!”라고 나폴레옹은 말을 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또 그 명령서에는 상황설명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루시군은 전장과는 역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자 'Wellington'은 군사의 소모가 심각하다고 판단해서 연합군의 중앙과 좌익부대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다. 그러자 또 그때였다. 네이는 그것을 영국군이 전면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서 기병 5000을 인솔해서는 곧 바로 영국군을 향해서 돌진해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병들의 방진에 막혀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때 네이는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맞아서 쓰러지는 바람에 다섯 번이나 낙마를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네이는 총검(銃劍)을 창처럼 쌓아놓고 일제사격을 실시하던 영국군의 보병방진을 돌파하지 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역으로 영국군은 그 때문에 상황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또 프랑스군은 그때 영국군의 대포부대를 파괴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영국군의 방진 20개는 네이의 돌격을 막아냈지만, 그러나 그 다음에는 수(數)에서 밀렸던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맹공 앞에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되어갔다.
하지만 또 그때, 프랑스군 역시도 영국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결정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또 특히, 네이의 돌격실패로 인해서 많은 병력을 잃었던 데다가, 예비군단도 프로이센군에 대처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랬던 가운데 전황은 다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때쯤에야 영국군의 중앙전초거점이었던 '라 에이 상트'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또 19시경, 나폴레옹은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였던 '노친위대'의 투입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년친위대'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친위대는 영국군 근위부대의 격렬한 사격으로 인해서 곧 격퇴되어버렸다. 그러자 그 무적의 친위대가 패배했다는 사실 앞에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거기다 또 프로이센군도 마침 그때는 '로보 군단'을 격파했고, 그리고는 곧장 프랑스군의 측면을 향해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국군도 그 상황에 가세했고, 그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노친위대는 전장에 끝까지 남아서 프랑스군의 퇴각을 용감하게 원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전부 포위되었고, 이어서 항복권고를 거부하고는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해갔다.
그 후, 프로이센군의 참모장이었던 '그나이제나우'는 밤새 강행군으로 프랑스군의 패잔병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프랑스군은 완전하게 괴멸되었다.
<영향>
그 '워털루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3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연합군 측도 2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퇴위했고,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 '백일천하'는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그때, 영국의 '프리마우스'에 상륙하길 원했지만, 그러나 결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휘하 장군 세 명(벨트란, 몬트론, 그르고)과 함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 프리마우스(Plymouth)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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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주식시장에서는 그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나폴레옹 패배에 대한 소식을 재빨리 입수했던 은행가 '로스차일드'는 나중에 <네이센의 역 매도>라고 불렸던 주식매매로 거액의 이익을 획득했고, 그 후 '로스차일드 재벌'의 주춧돌을 쌓아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영어로 워털루(Waterloo)는 <완부(完膚) 없는(멀쩡한 곳이 단 한군데도 없는. 완벽하게, 처참하게 깨져버린) 참패>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또 참고로 'ABBA'란 그룹의 '사랑의 워털루' 란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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