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8  百日天下 그 後


 4. 나폴레옹의 功績

 '
나폴레옹'이 사용하고 보급시켰던 法과 정치와 군사제도 등은 그 후의 '유럽'에서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고대 로마>의 법과 정치와 군사에 관한 것들이 각국에 전파되었던 것 이상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래는 그 예이다.

 1> '
나폴레옹 법전'은 그 후의 근대적인 법전의 기초가 되었고, 그 후 수정을 거듭하면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그리고 '일본' 등의 '민법'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현행법이며, 또 '미국'의 '루이지애나 주'의 현행 '민법' 또한 그 <나폴레옹 법전>이다.

 2>
군사적으로도 '나폴레옹'이 탄생시켰던 '국민군'의 창설 그리고 포병, 기병, 보병의 제휴. 그리고 치중(輜重-군수품)의 중시와 지휘관의 양성 등은 그 후의 근대전쟁과 근대적인 군대의 기초가 되었고 '프로이센'의 '클라우제비츠'에 의해서 <전쟁론>에서 이론화되게 된다.

 3>
政治思想史에 있어서도 '프랑스혁명'의 이념(자유, 평등, 박애)이 '나폴레옹전쟁'으로 인해서 각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4>
'도로의 우측통행'이 '유럽' 전 국토에 보급되었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영국은 그때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에 좌측통행)

 5>
'輜重의 重視'라고 하는 방침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軍用食의 개발을 위해서 효율적인 식료의 보존방법을 넓게 공모했고, 거기서 채용되었던 것이 '니콜라스 아페르'가 발명했던 <병조림>이었다.



 * 니콜라스 아페르(Nicolas Appert, 1749년 11월 17일~1841년 7월 1일)

 프랑스의 식품가공업자.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고, 1793년부터 1794년까지 투옥되었다.
 1804년에 <홀쭉하고 긴 병이나, 입 넓은 병에 미리 조리한 식품을 채워서 코르크로 느슨하게 마개를 하고, 중탕냄비에 넣어서 비등(沸騰) 과열시킨 후, 30분에서 60분 후, 병 내의 공기를 제거하고 코르크마개로 밀봉한다>라는 보존식품의 제조법을 고안했다. 그리고는 파리근교의 '마시'에서 보존식품 제조소를 열었고, 병조림 제조를 개시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나폴레옹의 새로운 식품 저장법에 대한 공모에 당선하여 12000 프랑의 상금을 받았으며, 1808년 프랑스 산업진흥연맹에 그 방법으로 만든 3개의 병조림밀크를 제출했다. 그리고 또 그것은 6년 후인 1814년에 개봉되어서 시음되었고, 그 방법의 타당성이 인정되어서 <아페르 (제조)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조공정이 많아서 보급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발명되었던 것이 <밀봉 후의 가열살균>이라는 개념에 의한 제조법이었으며, 그것은 또 나중에 <통조림-1810년 영국에서 발명> 등의 보존식이란 개념의 제조법으로 크게 발전되게 되었다.

 6>
'대륙봉쇄령'으로 설탕가격이 폭등하자 '사탕무'에서 생산된 제당(製糖)이 바로 보급되었다.


<사탕무> 


 그리고 또, 그에 이어서 1791년에는 '미터법(북극점에서 적도까지의 經線의 거리의 1000만 분의 1로 정의되는 새로운 길이단위)'이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서 質量도 '미터'를 기준으로 해서 '1立方 데시미터'의 물의 질량을 '1킬로그램'으로 정하였다. 단, 그때는 '프랑스' 국내에서조차 이미 사용하고 있던 단위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즉각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가 많아서 빨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진군으로 인해서 일정한 보급의 효과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8>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했었지만 '나폴레옹'에 의해서 지배되었던 諸國들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 시기에 '나폴레옹'은 각지에서 '영주'의 지배나 農奴制를 타파했고, 헌법과 의회를 일으켜서 '프랑스식'의 행정이나 사법제도를 확립케 했다.(그 중에 민법이 移植되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장기적으로 지배를 받았던 곳에서는 공업화가 시작되어서 19세기에는 유럽의 선진지역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유럽'의 諸민족들은 그 시기에 타민족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민족의 통일을 학습하는 기회가 되었고, 열강의 군주들은 '나폴레옹' 퇴위 후 그런 '유럽'사회를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노력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사회구조가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으며, 이어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태동되었다.

 7> 1790년 3월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페리고르'의 제안으로 세계 공통의 새로운 '측정법(길이의 단위)' 창설이 결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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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死因을 둘러싼 의혹(論議)

 <비소중독'에 의한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나폴레옹'이 임종 시에 <나는 영국에 암살된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사체를 '프랑스'로 반환하기 위해서 다시 파냈을 때, 시체가 거의 부패하지 않았었다는 점(비소는 剝製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작용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비소 설>에는 <'나폴레옹'과 함께 그 섬으로 같이 갔던 그 누군가가 와인에 혼입했을 것이라는 설> 이외에도 <그 당시는 박제에 비소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나폴레옹의 방에 있던 박제 속의 비소가 곰팡이와 함께 공기 중에 섞여서 다니다가 그가 흡입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리고 또 그 후자에 대해서는 2002년 '파리경시청'의 '법의학연구소'가 '나폴레옹'이 황제였던 시대에 채취했던 그의 머리카락으로 放射光 조사를 실시했었는데, 그러자 그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비소중독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매장 시에 '비소'로써 사체에 대한 보존처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또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의 죽음 직후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던 '위암' 혹은 '위궤양' 설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또 '나폴레옹'의 가족 중에서도 '위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 역시도 '위궤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특히, 그가 1817년 이후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20년 이상 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래서 그 중압감과 긴장감이 계속되는 생활 속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원래부터 튼튼하지 않았던 심신에 그런 이상이 왔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다 또, 젊었을 때는 정신력으로 그런대로 버틸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나 40대에 들어서서는 정신장해와 생리장해 그리고 감각장해와 형태장해 등, 그는 여러 장해들로 몸을 침식 당하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의 사인은 그가 몰락한 후 격동의 생활에서 갑자기 無爲의 생활을 강요당했던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 등이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되어서 발병했던 <致死性 위궤양>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또 심신이 모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확실히 영웅에서 패배자, 그리고는 戰犯으로까지 깎아내려졌던 그의 입장에서는 딱 들어맞는 경우가 아니었겠는가!>라고 주장하는 의학자도 있다.

 거기다 또 '나폴레옹'은 평균수면이 3, 4시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었던 만큼, 그 이외의 시간은 거의 政務에 힘을 다 쏟았을 정도로 40대 이전에는 정력적이었지만, 그러나 40대 이후에는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과도한 수면부족에다 정신장해 그리고 생리장해와 감각장해 그리고 또한 형태장해 등과 함께, 거기에 더해서 암, 뇌경색, 심근경색 등이 생겼고 또 유형지에서의 생활 또한 그에게서는 스트레스가 되어서 그는 항시 과도한 수면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요인들이 모두 그를 괴롭혀서 그가 단명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수면부족과 함께 40대 이후의 비만증상으로 인해서, 이른바 근년에 주목되고 있는 <수면시의 무호흡증후군>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도, 아직까지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3. 나폴레옹의 評價와 影響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시류를 타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지만, 그러나 그가 고무시켰던 <諸국민의 내셔널리즘(민족, 국가, 국민주의 등으로 불림)>에 의해서 그 자신 스스로 몰락했다. 그리고 또 그 일련의 전쟁에서 사라져갔던 사망자의 수는 약 2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막대했던 인명의 손실과 함께 그 자신도 비인도주의적이라는 오명으로, 국내외로부터 <食人鬼> 또는 <인명의 낭비자> 그리고 <코르시카 섬의 악마>라는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또 그의 권력 형태는 <보나파르티즘>으로 불렸던 것으로, 그 기반에는 '군인'과 '小土地自由農民'과 '프치브르죠와지'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가 야기했던 손실은 '프랑스'의 총인구에서도 현격하게 나타났다. 그 이후 '프랑스'의 인구증가는 침체되었고 '영국'과 '독일' 등에서도 밀려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1831년에는 국내에서의 징병은 포기되었고, 그 대안으로 多國籍軍인 <외인부대>까지 창설되게 되었다.




 * 프랑스의 外人部隊(불:Legion etrangere. 영:French Foreign Legion)

 프랑스육군소속의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되는 정규부대이다.
 1831년 창설 이래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
프랑스외국인부대>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리고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즉위했던 '루이18세'와 그 후의 '샤를10세'는 '나폴레옹' 이전의 상태로 '프랑스'를 회귀시키려 기도했지만, 그러나 워낙에 그 정도가 심해서 실패했다.



 * 샤를10세(Charles X) 1757년 10월 9일~1836년 11월 6일

재위:1824년~1830년
루이16세와 루이18세의 남동생
부르봉朝 마지막 프랑스국왕
즉위 이전에는 아르트와(또는 알투와)伯으로 불렸다.





 그리고 또 그 무렵 '왕당파'는 '1815년의 왕정복고' 때부터 '反 보나파르티즘'을 취해서 수년 만에 한 번씩 <백색테러>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 '왕당파'와 '보나파르티스트'들과의 장기적인 대립과 確執은 결국 '프랑스'에 화근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빈 체제'에 의한 '유럽제국'의 '反動정치' 또한 '유럽 諸국민'들의 憤激을 사서, 그로 인해 '프랑스혁명 이념'이 '유럽'의 각국으로 飛火해가게 되었다.

 그랬던 한편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서 인간의 個性이 급속히 상실되어갔고, 그래서 당시 '全유럽'을 先導해나갔던 '나폴레옹'을 <시대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영웅>視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리고 또 그런 예로 '헤겔'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世界 理性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본다!>라고 말을 남겼고, 그리고 또 <프리드리히 니체>는 <금세기(19세기) 최대의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1900년 8월 25일


독일의 철학자. 古典文獻學者. 후세에 큰 영향을 준 사상가 중 한사람.
여기 저기에 아포리즘(Aphorism-格言)을 이용한 교묘한 산문적 표현에 의한 철학적 시도는 문학적 가치가 인정된다.(자세한 것은 다음으로 미룸)



<니체>

<여동생 Elisabeth 1894>


<그리고 문제의 여인-루 살로메-Salome>





 그러나 또 한편 <그런 것은 진정한 나폴레옹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理念化된 나폴레옹일 뿐이다!>라고 갈파(喝破)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또 'Beethoven'이 악보를 찢었다고 여겨지는 그 故事도 그러한 배경을 상징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튼, 1840년에 그의 유해가 '프랑스' 본국으로 반환되자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민중들 사이에서 고조되었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영광을 추억>하는 것으로 '프랑스 제2제정'까지 낳게 된다.




 * 프랑스 제2제정(Second Empire)

 1852년부터 1870년까지 존재했던 君主政體이었으며,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이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다음, 국민투표에 의해서 프랑스황제에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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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로폰에서의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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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일천하(영-Hundred Days. 프-Cent-Jours)


 유럽제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실각(失脚)했던 나폴레옹이 1815년에 일시적으로 제위(帝位)를 회복했지만, 그러나 95일 만에 다시 패배하여 완전하게 실각했던 사건이었다.



  ** 제7차대불대동맹(Seventh Coalition)



<카틀브라 전투>



 <1818년 프랑스 전쟁>



  * 워털루 전쟁(영:The Battle of Waterloo, 불:Bataille de Waterloo)





 1815년 6월 18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 및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을 물리쳤던 싸움이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발음은 워털루, 독일에서는 라 벨 아리안스의 싸움(라 벨 아리안스의 투쟁, Schlacht bei Belle-Alliance)이라고도 불린다. '벨기에'의 '라 벨 아리안스'를 主전장으로 했지만, 그러나 'Wellington공'에 의해서 근교의 '워털루'의 이름을 취함으로 해서 그와 같이 명명되었다.




<워털루-라이언힐>





**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 1777년 9월 16일~1836년 7월 28일) 독일출신의 영국은행가. 영국에 있어서의 로스차일드 재벌의 선조.





 <트리비아(trivia)>

 1994년에 '영불해협터널'이 완성되어서 '파리'와 '런던'을 연결하는 고속열차 <유로스타(Euro star)>가 운행을 개시했을 때 '런던 측' 터미널 이름이 짓궂게도 <워털루 역>이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프랑스'는 몇 번이나 그 역의 개명이나, 변경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유로스타>


 그리고 2007년에는 '영국' 내 고속철도의 새 선로가 완성되어서 그 터미널 이름이<세인트 팽크라스(St Pancras) railway station>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결국 '프랑스 측'의 悲願이 실현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한 당시 'Wellington'의 비서관이었던 '래글런 남작(Raglan 또는 백작) 피츠로이 서머셋트'는 그 싸움에서 오른 팔을 부상당해서 절단했다. (래글런 소매는 그가 자신의 없어진 오른팔에 맞추어서 만들었던 것이었다)



** 래글런 男爵(Raglan)





 그는 後에 육군최고사령관이 되었고, 크리미아 전쟁에서 총지휘를 맡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6월 18일 '프랑스군' 72,000명의 병력과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6만8,000명의 병력이 '워털루'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네이 기병(騎兵)'에 의한 재삼(再三)의 공격에도 '영국군'은 방진(方陣)을 유지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영국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끼던 '노친위대'의 투입까지 명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 직후 '그루시'의 추격을 뿌리쳤던 '프로이센군'이 그 전장에 도착했고, 이어서 '프랑스군'의 측면이 무너지면서 '프랑스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영국과 프로이센군>의 추격에 의해서 '프랑스군'은 대부분 항복했다.

 <戰後處理>

 6월 22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어서 '세인트헬레나(St Helena) 섬'으로의 유폐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복귀한지 불과 100일정도만의 일이었고, 그 기간을 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라고 부르고 있다.

 아무튼, 그러자 7월 8일 '루이18세'가 다시 '프랑스국왕'에 복위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프랑스혁명' 이후 20년 이상에 걸쳐서 계속되었던 전란은 11월 20일의 '제2차 파리조약'의 체결로 정식적으로 종결되었다.




 ※ 파리조약(Treaty of Paris)

 1815년에 '나폴레옹전쟁'을 종결시켰던 조약이었다.
 1814년의 '파리조약'과 대비(對比)해서 <제2차 파리조약(Second Treaty of Paris)>이라고도 불린다.

 槪要

 <(제2차)파리조약>은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했던 결과로 1815년 11월 20일에 체결되었다.
 그것은 또 1814년 5월 30일 <제1차 조약>으로 '제6차대불대동맹제국'과 '프랑스'가 강화(講和)를 한 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 '프랑스국민'들이 그에게 보내주었던 광범위했던 지지로 인해서 더욱 엄격해졌다. 그 결과 <1차> 때와 달리 '프랑스'는 체결국에서 제외되었고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 4국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또 <제1차> 때 인정되었던 프랑스의 영토는 <1792년 당시의 영토>까지 인정되었지만, 그러나 <제2차> 때는 그것이 <1790년의 영토>로 축소되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7억 프랑이란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賦課) 받았고, 최장 5년간 동맹군의 '프랑스'주둔과 함께 그 주둔경비의 일체도 부담 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프로이센' 등은 더욱 엄격한 강화조건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새로 들어섰던 '부르봉朝'의 '왕정복고체제'의 안정이 인정되어서, 그 이상의 요구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같은 날,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4국의 <신성동맹(神聖同盟=四國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벨기에'로 출격해서 제국(諸國)에 도전했다.
 그러나 6월 18일의 '워털루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리하여 6월 22일 다시 퇴위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영국'에 자신의 신병에 대한 보호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거절당했고, 이어서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폐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나폴레옹'에 의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장남 '나폴레옹2세'가 형식적으로 '프랑스의 황제'에 즉위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도 7월 7일 퇴위를 강요당하면서 '프랑스'의 '제1제정'은 완전히 붕괴했다.


 <白色 Terror>

 그 후 '프랑스'에서는 '루이18세'가 왕권에 복귀했다. 그러나 '백일천하'를 거친 후 '왕당파'와 '보나파르티스트'와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향후(向後) 3년에 걸쳐서 <백색테러>가 발생했다.

 ※ 보나파르티슴(Bonapartisme)=앞에서 설명되었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하면, 보나파르트家의 나폴레옹1세와 3세가 취했던 정치형태를 말함. 농민과 도시중산계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양(兩) 계층의 조정자를 가장(假裝)했던 근대적인 독재정치를 이름. 보나파르티스트는 그 추종자들을 말함

 그것은 당초에는 전쟁범죄를 문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점점 일탈해나가서 반 세력에의 탄압으로 이행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뒤에서 선동했던 사람은 바로 왕제(王弟)였던 '알투와(Charles X-앞에서 일부 설명되었으며, 자세한 것은 생략함)伯'과 '루이16세'의 왕녀(王女) '마리 테레즈'였다고 한다.

 ※ 마리 테레즈(Marie Therese Charlotte de France)
 1778년 12월19일-1851년 10월19일
 프랑스왕태자 루이 앙투와느(샤를10세의 장남)의 왕비.
 아버지는 루이16세, 어머니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테레즈>


 아무튼 그러자 우선, 경찰대신(警察大臣)으로 취임했던 '후세(앞에서 설명되었음)'가 '백일천하'의 협력자 57명의 리스트를 공표했다. 그에는 <카르노와 네이, 솔트, 그루시, 캄프론느>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네이'는 처형되었으며(1815년 12월 7일),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후세 자신도 왕당파에 의해서 실각했다)

 그런 다음 '왕당파'는 '즉결재판소'를 설치해서 나머지 사람들의 처형을 집행했고
그때 단죄되었던 '보나파르티스트'는 9,000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 또 1/3분이 사형당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거기다 또 거리에서는 당국의 묵인 하에 불량배들에 의한 '보나파르티스트'에의 린치가 半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하지만 당국이 그런 행위를 중지시켰던 것은 1818년이나 되었을 때였고, 그러한 지나친 방관과 용인은
결국 나중에 일어나게 될 '7월 혁명(1830년-설명은 생략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그것으로 다시 퇴위에 몰렸고, 그러자 그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하지만 항구의 봉쇄로 인해서 그것은 불발로 돌아갔고, 최종적으로 그는 '영국군함'에 투항했다.
 그러자 그의 처리를 둘러싸고 '영국정부'는 고심했으나 '웰링턴'의 제안을 채용해서
 그를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St Helena) 섬'으로 유폐(幽閉)시키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극소수의 추종자(隨行者)들과 함께 섬 중앙에 있던 <롱우드-longwood> 저택에서 생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곳의 고온다습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때 밖에서는 그를 항시 지키고 있던 보초들이 있었기 때문에 산책이나 승마조차도 제한되었으며
 그로써 그는 더욱 힘든 감금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중에서도 수행자에게 필기를 시켜서 자신의 구술(口述)로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다.

※ 라스 카즈(Las Cases-프랑스의 역사가)의 “세인트헬레나 각서(覺書-또는 회상이라고도 함-Memorial de Sainte-Helene. 1823)”> 등

 그것들은 또한 그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까지도 총망라했던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폴레옹'은 또 그곳에서 특히
 그 섬의 총독이었던 ‘허드슨 로우’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서 몹시 괴로움을 겪어야먄 했다.
 그때, 그 '로우'는 자존심이 강했던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불렀다거나
 썩은 포도주를 대접하는 등의 행동으로 그를 철저하게 우롱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나폴레옹'의 컨디션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켜버리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그를 저주해서
 <장래, 그의 자손들은 모두 ‘로우’라는 姓氏에 빨간 얼굴 하게 될 것이다! (low는 낮다는 뜻으로, 신분이 비천하고 술주정뱅이처럼 빨간 얼굴을 하게 될 것이란 저주를 말함)>
 라는 말을 했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러한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겹쳐져서

 ※ 당시, 아내였던 '루이자'의 난잡한 행실(不倫)에 관한 소식과 부하들의 무관심 등

 '나폴레옹'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이윽고는 1821년에 그는 사망했다.

 그 후, 그의 사체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서 해부되었다.
 그리고 또, 그 死因은 당시 공식적으로는 위암(胃癌)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러나 비소(砒素-앞에서 설명되었음)에 의한 암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그의 유해는 1840년에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현재는 파리의 '廢病院(앞에서 설명되었음)'에 안치되어 있다.





















< Napoléon Bonaparte - 끝 >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연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이어질 글은 일종이 後記에 해당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계속해서 읽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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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로폰에서의 나폴레옹> 


 1 生涯

 1.8  百日天下 그 後





 * 백일천하(영-Hundred Days. 프-Cent-Jours)


 유럽제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실각(失脚)했던 나폴레옹이 1815년에 일시적으로 제위(帝位)를 회복했지만
 그러나 95일 만에 다시 패배하여 완전하게 실각했던 사건이었다.


  ** 제7차대불대동맹(Seventh Coalition)



<카틀브라 전투>



 <1818년 프랑스 전쟁>


 * 워털루 전쟁(영:The Battle of Waterloo, 불:Bataille de Waterloo)


 


 1815년 6월 18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 및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했던 '프랑스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발음은 워털루, 독일에서는 라 벨 아리안스의 싸움(라 벨 아리안스의 투쟁, Schlacht bei Belle-Alliance)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벨기에'의 '라 벨 아리안스'를 主전장으로 했지만, 그러나 'Wellington공'에 의해서 근교의 '워털루'의 이름을 취함으로 해서 그와 같이 명명되었다.


 



<워털루 포진도-청색이 프랑스군. 맨 아래가 나폴레옹>




 어쨌든, 그때 영국군은 워털루 남방의 '몬-산-쟌(Mont Saint Jean-워털루에서 南南東으로 5km-그림에서는 上中 연합군 뒤쪽 길게 그려진 부분)'이라는 구릉 능선의 배후에 주력을 배치해두고는, 그 우익이었던 '워그몬(또는 위그몽-Hougomont-下左 붉은 색으로 괄호처럼 그린 곳 바로 뒤 조그만 사각형 부분)'과 중앙이었던 '라 에이 상트(La Haye Ssante-그림의 正中 부분 새부리처럼 그려놓은 곳 바로 뒤), 그리고 좌익이었던 '파페롯트(Papelotte-그림의 중앙 부분 오른쪽 맨 끝 파란색 화살표 부분)' 3 거점에다 비교적 강력한 전초부대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上 도면 참조)

 ※ 그러나 紙面이 너무 협소하여 그림을 확대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따라서 상세한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많은 자료를 다룰 수 없음에 한계를 느끼지만, 그러나 읽으시는 분이 계시면, 그 점을 이해를 해주길 바라며, 보다 자세한 것을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훌륭한 참고 문헌들과 자료들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워털루 전장-포진도의 푸른색이 프랑스군>
※ 참고: 나폴레옹의 위치는 사진의 正中上 멀리 보이는 부분의 숲 바로 뒤


 그러자 나폴레옹은 우선 '위그몽(사진에서는 상단 오른쪽 숲이 있는 부분. 실제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농가가 있는 마을임)'을 공격 거점으로 하고, 그로써 영국군의 주력을 유인해내서 격파한 후, 전선의 중앙을 돌파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어서 11시 30분 무렵, 프랑스군 좌익이 먼저 그 '위그몽' 공격에 나섰다. 그러자 또 영국군은 방어치중작전을 고수해서 그 돌격해오던 프랑스군에게 맹사(猛射)를 퍼부어댔다. 그러자 또 그에 응사해서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었던 '제롬'이 더욱 공격의 수위를 높였지만, 그러나 그때 '위그몽'의 성관(城館)이 워낙에 견고했던 탓에 그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13시 30분부터 다시 시작되었던 프랑스의 중앙군과 우익 각부대의 본격적인 공격으로 인해서 영국군 좌익의 '파페롯트'가 끝내 함락되었고, 이어서 그 지휘관이었던 '픽톤(Picton)'마저 그 와중에 전사해버려서 영국군은 곧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또 그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Wellington'은 '폰손비 장군'이 인솔하던 '스코틀랜드 용기병(龍騎兵)'을 핵심으로 했던 중(重)기병 2개 여단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의 중앙부는 곧 큰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 맞상대로 출병했던 프랑스군의 창(槍)기병(불: 란시에)들에 의해서 그들은 결국 패주했다. 그리고 또 그때 '폰손비'도 창기병들의 창을 여러 개나 맞으면서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그러나 그 돌격으로 인해서 영국군은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얻어내기도 했다.



<워털루의 라이온힐>


 그 후,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영국군이 그토록 기다리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 우익 가까이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로보 군단'을 우익으로 돌려서 프로이센군을 견제하게 했다.

 ※ 상황참고: 나폴레옹은 그 전쟁이 개시되기 전에 이미 그루시軍을 부를 것을 명해두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솔트는 단 한 명밖에 전령을 내지 않았고 <그에 대해서는 또 후에 “만약 베르티에 원수였다면 전령을 한 다스나 냈을 것이다!”라고 나폴레옹은 말을 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또 그 명령서에는 상황설명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루시군은 전장과는 역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자 'Wellington'은 군사의 소모가 심각하다고 판단해서 연합군의 중앙과 좌익부대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다. 그러자 또 그때였다. 네이는 그것을 영국군이 전면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서 기병 5000을 인솔해서는 곧 바로 영국군을 향해서 돌진해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병들의 방진에 막혀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때 네이는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맞아서 쓰러지는 바람에 다섯 번이나 낙마를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네이는 총검(銃劍)을 창처럼 쌓아놓고 일제사격을 실시하던 영국군의 보병방진을 돌파하지 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역으로 영국군은 그 때문에 상황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또 프랑스군은 그때 영국군의 대포부대를 파괴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영국군의 방진 20개는 네이의 돌격을 막아냈지만, 그러나 그 다음에는 수(數)에서 밀렸던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맹공 앞에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되어갔다.

 
하지만 또 그때, 프랑스군 역시도 영국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결정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또 특히, 네이의 돌격실패로 인해서 많은 병력을 잃었던 데다가, 예비군단도 프로이센군에 대처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랬던 가운데 전황은 다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때쯤에야 영국군의 중앙전초거점이었던 '라 에이 상트'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또 19시경, 나폴레옹은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였던 '노친위대'의 투입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년친위대'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친위대는 영국군 근위부대의 격렬한 사격으로 인해서 곧 격퇴되어버렸다. 그러자 그 무적의 친위대가 패배했다는 사실 앞에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거기다 또 프로이센군도 마침 그때는 '로보 군단'을 격파했고, 그리고는 곧장 프랑스군의 측면을 향해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국군도 그 상황에 가세했고, 그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노친위대는 전장에 끝까지 남아서 프랑스군의 퇴각을 용감하게 원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전부 포위되었고, 이어서 항복권고를 거부하고는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해갔다.

 
그 후, 프로이센군의 참모장이었던 '그나이제나우'는 밤새 강행군으로 프랑스군의 패잔병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프랑스군은 완전하게 괴멸되었다.


 
<영향>

 그 '워털루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3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연합군 측도 2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퇴위했고,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 '백일천하'는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그때, 영국의 '프리마우스'에 상륙하길 원했지만, 그러나 결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휘하 장군 세 명(벨트란, 몬트론, 그르고)과 함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 프리마우스(Plymouth)


<위치도>




 그리고 또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주식시장에서는 그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나폴레옹 패배에 대한 소식을 재빨리 입수했던 은행가 '로스차일드'는 나중에 <네이센의 역 매도>라고 불렸던 주식매매로 거액의 이익을 획득했고, 그 후 '로스차일드 재벌'의 주춧돌을 쌓아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영어로 워털루(Waterloo)는 <완부(完膚) 없는(멀쩡한 곳이 단 한군데도 없는. 완벽하게, 처참하게 깨져버린) 참패>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또 참고로 'ABBA'란 그룹의 '사랑의 워털루' 란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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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로폰에서의 나폴레옹> 


 1 生涯

 1.8  百日天下 그 後





 * 백일천하(영-Hundred Days. 프-Cent-Jours)


 유럽제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실각(失脚)했던 나폴레옹이 1815년에 일시적으로 제위(帝位)를 회복했지만
 그러나 95일 만에 다시 패배하여 완전하게 실각했던 사건이었다.


  ** 제7차대불대동맹(Seventh Coalition)



<카틀브라 전투>



 <1818년 프랑스 전쟁>

 그러자 '나폴레옹'은 '제국(諸國)'에게 자신의 '황제복위'를 인정케 하기 위해서는 그 '동맹군'을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Wellington公'이 인솔하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이 '벨기에 방면'에 주둔하고 있었고, 또 '오스트리아군'은 '라인방면'과 '북쪽이탈리아'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동맹군'들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결심하고는 '프랑스군' 주력을 인솔해서 '벨기에'로 향했다.



 ** 브뤼셀


 벨기에의 수도.
 프랑스에서는 Bruxelles, 네덜란드에서는 Brussel, 독일에서는 Brussel로 부른다.
 늪, 습지(bruoc-bruc-broek)家 (sella-zele)라고 하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구 103만 명(2007년 기준).
 유럽연합(EU) 본부가 있기 때문에 유럽 정치의 일대거점(一大據點)이 되고 있으며
 유럽 유명도시 중 하나이다.



<2007 07 Belgium Brussels>




 그리하여 6월 15일 '프랑스군'은 '리니의 싸움'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지만, 그러나 그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었던 '네이 군단'이 6월 16일의 '카틀브라의 싸움'에서 '영국군'에 의해 발이 묶였기 때문에, 그래서 '프로이센군'을 격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 한편 '프로이센군'에서는 '블뤼허'가 중상을 입었고, 그러자 또 그를 대신해서 '그나이제나우가' 군을 지휘했다.



 ** 그나이제나우((August Wilhelm Antonius Graf Neidhardt von Gneisenau)



 1760년 10월 27일~1831년 8월 23일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육군 원수.
 나폴레옹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군제의 개혁자.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참모본부의 건설자.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했고,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그라우치(그루시)'에게 1군을 주어서 '프로이센군'을 추격케 했던 한편
 자신은 또 'Wellington'이 인솔하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결전하기 위해서 '워털루'로 향했다.



 * 워털루 전쟁(영:The Battle of Waterloo, 불:Bataille de Waterloo)


 


 1815년 6월 18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 및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발음은 워털루, 그리고 독일에서는 라 벨 아리안스의 싸움(라 벨 아리안스의 투쟁, Schlacht bei Belle-Alliance)이라고도 불린다.

 '
벨기에'의 '라 벨 아리안스'를 主전장으로 했지만
 그러나 'Wellington공'에 의해서 근교의 '워털루'의 이름을 취함으로 해서 그와 같이 명명되었다.


 
 <배경>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에서 탈출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쥬안 灣'에 상륙한 후 파리로 진군했다.
 나폴레옹은 파리로 가던 도중 '네이 원수'와 '솔트 원수'와 합류했고, 이어서 7,000명으로 불어났던 군대를 인솔해서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해서 다시 황제가 되었다.

 이어서 나
폴레옹은 자신의 복권을 인정하지 않던 연합군들이(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아직 합류하지 않았을 때 각개격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12만 4,000명의 군사를 인솔하고는 벨기에로 향했다.

 그런
한편,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연합군은 벨기에에 포진하고 있던 Wellington공이 인솔하던 <영국과 네델란드 연합군> 9만 5,000과 블뤼허 원수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 합해서 총 12만이었다.

 
6월 16일 '리니의 싸움'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과 싸워서 사상자 1만 6,000명의 손해를 냈지만, 그러나 완전하게 격멸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그때, 블뤼허 원수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참모장이었던 '그나이제나우가'대신에서 프로이센군을 지휘했다.

 그
러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퇴각했다고 오인해서 그 이튿날 아침 '그루시 원수'에게 3만의 별동대를 주어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7만 2,000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브뤼셀을 목표로 진군했지만, 그러나 '라 벨 아리안스'에서 6만 8,000명의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



<경과>

 
6월 18일, 前夜부터 내렸던 비로 인해서 지면이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그 때문에 대포가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나폴레옹은 부하들의 진언도 무시하고 전투개시를 낮까지 연기시켰다.

 
그러나 그때 영국군이 취하고 있었던 작전은 프랑스군을 최대한 막는 것으로 시간을 벌면서 한시라도 빨리 프로이센군이 구원와주길 기다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거기서도 판단착오를 한 꼴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대변해주듯 그때의 상황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즈음의 나폴레옹은 과거와는 달리 그 기력이나 판단력이 많이 무디어져있었고, 그런데다 또 참모총장이었던 솔트조차도 제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지를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휘의 선명성에도 많은 문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는 또

 <나폴레옹이 그때 전투개시를 연기했던 이유는, 비 때문에 프랑스군의 전장도착이 처음부터 늦어졌으므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워털루 포진도-청색이 프랑스군. 맨 아래가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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