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수팀이 Science지 논문의 supplementary data로 제출하며 서로 다른 cell이라고 주장하는 네 쌍의 cell 사진. 주류 언론에서는 이에 대해 실수로 다른 cell 사진이 끼어 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진을 늘이고 크기 비교 pattern만 바꿔친 것까지 '실수'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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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에서...

‘난자 모으기 운동’ 문제있다

[일다 2005-11-28 10:15]
“황우석 스캔들” 논란의 발단이 된 것은 이 연구의 필수적인 재료인 '난자'의 출처다.

MBC PD수첩 보도를 통해 불임전문병원으로 명성이 높았던 미즈메디 병원 노성일 원장이 ‘난자매매’를 통해 황우석 교수팀에게 연구용으로 난자를 제공해왔다는 것과,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원 여성들의 난자 역시 사용됐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기관윤리위원회 (IRB) 심의에서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배경엔 일명 '황우석 사단' 인물들의 인맥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무엇보다 우리는 ‘난자의 출처’인 여성의 몸, 여성의 인권이 생명공학연구 과정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난자채취의 경험은 무엇인가

배아줄기세포연구의 과정과 연구지침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난자다. ‘난자’는 화석자원도 아니고, 장신구나 금품은 더더욱 아니다. 난자는 여성의 난소에 있는 것이며, 난자를 채취해내는 과정은 그 여성의 몸, 그리고 인격과 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있다. 난자채취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어떤 경험인가.

“(난자)채취과정은 사실 많이 힘든 일이다. 호르몬 약을 주사하거나 먹어서 배란을 여러 개 나오게 유도를 한다. 생리 후 배란 일이 14일인데 그 기간 맞춰서 계속 주사한다. 호르몬제 약이 원래 몸에 안 맞는 사람들에게 부작용이 클 수 있고, 인위적으로 배란을 조정하기 때문에 몸이 힘들 수밖에 없다. 뽑고 넣을 때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A씨/최근 인공수정시술을 받은 30대 중반 여성/ 직업: 약사)

“지금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하루 밤새 몇 백 명 늘었다고 하는 걸 보면, 너무 (황우석 박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건가? 글쎄, 아마 미혼인 아가씨들이 기증하겠지. 연구에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 같다. 일부 장기를 떼어주는 정도에 비교하면 좀 그런가? 어쨌든 내겐 그런 것 같다.” (A씨)

“(시술)과정이 힘들다. 약도 먹어야 하고, 처음에 나팔관 검사 하는 것부터 무척 아프다. 검사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는 산부인과에 가기가 싫다. 생살에서 떼어나는 것인데 얼마나 아프겠나.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정자야 방출되는 것이지만. (난자는) 속에서 긁어내서 다시 붙여야 하는 일이다. 이런 게(인공수정시술)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B씨/6년 전 불임 클리닉을 통해 아이를 낳은 30대 후반 여성)

난자‘공유’만 허락하는 이유

많은 유럽국가에서 자발적 ‘난자기증’까지 불법으로 하고 오직 인공수정시술을 한 여성들에게서 나온 난자를 ‘공유’하는 것만을 허용하는 것은, 난자채취가 여성의 몸에 일으킬 수 있는 많은 부작용들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학기술발달을 위해 여성의 건강권 및 몸의 권리를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지금까지 외국언론에 보고된 바로는 (불임시술로 유명한 한국에선 난자채취와 여성건강에 관련한 아무런 집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난자채취를 한 20% 가량의 여성들이 후유증과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고,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1% 가량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선 ‘ILOVE황우석’을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난자 모으기 운동을 펼치며, 언론이 나서서 난자 제공예비자의 수(난자의 개수)를 백 단위로 세어가면서 보도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 여성이 자신과 두 딸의 난자를 내놓겠다고 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포털 저널리즘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을 때, 불임 클리닉 과정에서 고통을 겪었던 지인을 두고 있는, 30대의 두 딸을 가진 여성 C씨는 이러한 상황이 “엽기적”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안 겪어봐서 그런 것이겠지. 과배란을 해서 인공적으로 난자를 뽑아내는 건데, 그게 뭔지를 아직 모르니까 그러는 거겠지. 여자 몸에 대해 너무 무지해. 남자들 고환에 주사를 해서 뭘 끄집어낸다고 하면 좀 비교가 될까? 난소에 하는 것보다는 그 쪽이 더 편해도, 남자들 당장 입 다물텐데…” (C씨/두 딸을 둔 50대 여성)

과다투약 등 인권침해 가능성 배제 못해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미즈메디 병원이 ‘매매’를 통해 난자를 조달했다는 것인데, 난자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같은 값에 더 많은 난자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여성의 몸에 호르몬제를 과다투약하거나 신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약을 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성에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설명해주지도 않고, 심지어 난자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은 채 난자를 뽑아냈다는 것은 이러한 의혹을 더욱 부채질한다.

“몇 개의 난자를 빼낼지 환자 몸 상태를 보고 결정하는데, 사실 과다투약은 힘들 것이다. 약의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부종이 심해지고 복수가 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양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부작용이 심한 약이다. 60개를 뽑기도 한다는 게 납득이 안 된다. 내가 시술을 받을 때 나는 3개였고, 많게는 6개 정도로 알고 있었다. 기간을 연장해서, 투약기간 연장해서 (많은 양의 난자를 뽑아내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D씨/3년 전 인공수정시술을 한 30대 초반 여성/ 직업: 의학 관련계 종사자)

“약을 쓸 때 약의 종류나 양을 조절한다. (자연적으로) 배란되는 과정에서 보면 1~2개 나오는데, 그것은 많은 난자가 동시에 배란되려고 준비하다가 한두 개만 선택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생리 5일째에 쇠퇴한다. 그런데 과배란 하면 ‘선택되는 과정’을 없애는 것이다. 여러 개가 다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과배란으로 인한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 한 개당 나오는 여성호르몬 양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여러 개 과배란 하면 여성호르몬 과다로 인한 신체적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복수가 찬다든지, 그런 것들은 의사들이 감안하면서 진료한다.” (E씨/산부인과 의사)

이 같은 사실은 동의에 기반한 ‘난자공유’도 환자들(여성)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연구기술이 발달할수록 난자는 더 많이 필요하게 되어있는데, 난자가 필요한 의사들이 인공수정시술을 하러 병원을 찾는 환자를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이며 시술과정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의 권리’ 희생시켜선 안돼

2005년 6월 30일 영국 BBC 방송은 유럽의회 의원들이 생식의학윤리위원회 회의에서 ‘난자’ 매매, 기증, 공유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보도하면서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방송은 여성의 건강권을 이유로, 자발적 ‘난자기증’ 정책을 문제삼고 있을 뿐 아니라 불임시술에 사용되고 남은 잉여난자와 배아의 ‘공유’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우리 정부와 의회, 불임시술의사와 연구진, 그리고 언론이 간과해 온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난자의 출처’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정작 ‘난자의 출처’인 여성의 몸 속, 여성의 인권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우리 현실을 반성해야 할 때다. 인간의 권리를 위해 종사한다는 목적을 내세운 과학기술연구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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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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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인 연합 http://www.scieng.net 에서...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지난 5월 황우석-문신용 교수팀의 업적을 축하하는 논평을 발표한 바 있다. 최근의 윤리적 논란과 관련하여 논평을 취소하자는 내부 의견도 있었으나 과학적 업적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뒤늦게 터진 윤리 논란에 의해 취소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언론과 대중의 지나친 관심과 장미빛 기대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교수가 그동안 이루어 낸 과학적 발전은 순수 및 기초과학의 체력이 허약한 우리나라에서 단연 돋보이는 세계적 업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먼저, 연구에 정진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상황에서 최근의 전국가적, 심지어 세계적 논란 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황우석 교수에게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을 위한 경쟁에는 국경이 없으며 과학기술이야말로 세계적 표준(global standard)이 통용되는 분야이다. 온 국민을 들뜨게 만든 황우석 교수의 쾌거도 science지라는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가 주목한 업적이라는 평가 덕분이었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경로와 연구환경은 국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구미 선진국에 비해 쉽게 다량의 난자를 구하고, 국민적 지지 속에 현행법과 정부 정책에 반하지 않고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후발추격국으로서 우리나라의 국가혁신체계가 갖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발전경로와 연구환경이 국가간에 다를 수 있다고 하여, 연구활동과 경쟁의 규칙, 과학기술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의 상호관계, 인류의 복리 증진을 위한 과학기술이라는 불문율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이는 전세계 과학기술인의 마음과 정신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며, 언론에 회자되는 '헬싱키 선언'과 같이 굳이 성문화되어 있어야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연구 성과를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구활동의 과정과 수단, 그리고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논점에 있어서도 전세계 연구자들의 공감대와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 과학기술 선진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로서는 필수적이며, 하물며 생명윤리와 관련한 수많은 논란이 존재하고 일부 선진국에서는 연구 자체를 금기시하는 인간 배아를 이용한 연구를 수행할 때에는 더더욱 일말의 티끌도 없도록 했어야 한다. 아니, 일부러 노력하여 윤리적 하자가 없는 연구 수행을 한다기보다, 세계 일등의 연구팀으로서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당연히 체화되어 있었어야 하는 '기본'인 것이다.

이번 황우석 교수와 난자 관련 사태의 본질은 서구 윤리와 동양 윤리의 충돌도 아니고, 미국과 한국의 줄기세포 헤게모니 싸움도 아니고, 종교적 믿음의 문제도, 연구원 착취의 문제도 아니다. 바로 현대화, 선진화되지 못한 채 걸음마만 떼고 바로 달려나가려는 우리나라 연구현장과 연구문화의 문제가 사태의 본질이다. 이에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이번 사태로 인한 논란이 길지 않기를 바라되, 이를 계기로 연구현장, 연구문화의 선진화의 기틀을 잡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덧붙여,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몇 가지 쟁점에 대해 현장 과학기술인들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본다.

첫째, 황우석 교수의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와 관련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그것이 연구 과정이나 관련된 주변 상황에 대한 것일지라도 용납될 수 없다. 과학자가 신뢰를 잃는다면 그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황교수는 여러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이미 모든 국민과 전세계의 동료 과학기술인들을 기만하였으며, 여성 연구원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기인연합은 과학자로서 그의 거짓말, 또 그러한 거짓말을 이끌어낸 상황에 대해 황교수에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연구원의 난자 기증에 대한 것이다. 전술했듯이, 헬싱키 선언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믿음을 모아 표현한 것으로, 황교수가 헬싱키 선언을 인지했는지 여부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성과 위주의 연구 문화, 대학원생이 연구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일개 '일손'으로 여겨지는 집단주의식 연구실 문화,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로서 수단을 불문하고 개인의 영웅적 희생을 강요하는 풍토가 연구원의 난자 기증이라는 상상키 어려운 사건을 만든 것이다. 과기인연합은 난자를 기증한 연구원 개개인을 욕할 의도는 없으나, 연구원의 난자 기증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셋째, 매매된 난자의 사용에 대한 것이다. 매매된 난자의 사용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미즈메디 병원의 노성일 이사장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국내 의료계 일부의, 여성과 환자의 인권에 대한 후진적 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또한 낙태 문제를 비롯하여 장기매매, 난자매매 등의 보건 분야에서 유독 법과 제도가 미비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교수는 해당 연구의 총책임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난자를 제공-기증 또는 매매-한 여성들에게 수차례 감사의 뜻을 공개적으로 표했고, 또 매매된 난자의 사용에 대한 최종적 책임을 지겠다는 대국민 사과를 했으므로, 과학기술인들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과기인연합은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황우석 교수 연구팀에게 윤리 문제에 대한 백신을 투여하고,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은 연구 과정의 투명성과 수준 높은 연구문화를 몸소 정착시키는 선구 연구진이 되기를 기원한다. 특히, 그동안 언론과 대중의 지나친 관심과 정관계의 애정공세로 인해 뛰어난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여력을 잠식한 면이 없지 않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각종 겸직에서 사퇴하는만큼, 새로운 각오로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언론과 대중도 이번 일을 계기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해 냉철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학습하여, 과학기술 연구가 몹시 복합적이고 장기적이라는 점과, 단순한 기술 수용자가 아닌 과학기술과 상호작용하는 시민사회로서의 책임의식을 지니게 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감정적 대응이나 무조건적 지지, 지나친 기대는 삼가야 한다. 일각의 난자 기증 운동은 사회적 수용성을 검증하기까지 자중하기를 촉구한다. PD수첩 광고 철회 운동이나 촛불시위 등 국민들의 과학기술발전에 대한 염원이 비이성적 군중행동으로 변질하는 것을 보며 과학기술인으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염원만으로는 과학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황교수 연구팀의 성과와 정진에도 불구하고 줄기세포 연구는 실용화를 예단할 수 없는 단계임을 인식해야 하며, 과학기술인을 비롯한 사회각계의 어느 의견도 배척되지 않는 성숙한 사회적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기인연합은 이번 사태가 과학기술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왜곡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과학기술 발전과 과학기술인의 기본권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또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해 불필요한 정치적 해석을 경계한다. 이번 사태로 국내 줄기세포 연구가 위축되어선 안되며, 오히려 줄기세포의 제어와 적용에 대한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줄기세포 분야 이외에는 아직 척박한 국내 생명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이 견인되기를 기원한다. 사회와 윤리에 대한 고려가 과학기술 연구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만천하가 인지하게 된 만큼, 향후 법적 제도적 정비와 정책적 지원이 성과 도출 중심의 밀어붙이기식이 아닌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잡는 방향으로 형성되기를 바라며,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현장 과학기술인의 모임으로서 견제 또는 지원, 그리고 참여를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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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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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언저리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인류애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그 하나는 측은하다 못해 '그림이 되는' 그들의 삶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으로서 기부나 사회봉사활동 등을 통한 구휼 사업의 형태로, 또 하나는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뒤엎고 숨은 가해자를 솎아내기 위한 혁명이나 변혁 운동의 형태로... 나는 개인적으로 진정 가치있는 일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가진자 또는 기득권자들이 억지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하는 불온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불온스레 삐딱한 나는 그러한 의구심 한 덩이를 가슴 한구석에 달고 조금 삐딱하게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월드비전'이라는 단체의 이름과 책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행군'이라는 단어에서 우파 기독교적인 암시가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이 책이 재난과 가난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좌/우의 장기적 해결책과는 큰 관계는 없는 단기적인 해결책, 즉 응급 구호 사업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극심한 재난과 가난의 현장에서는 인간다운 삶이나 이러한 현실을 몰고 온 원인에 대한 고민 이전에 사람들을 일단 살리는 것이 더 시급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얄팍한 소녀적 감수성과 맹목적인 종교적 소망이 나폴레옹같은 불굴의 의지와 뒤섞인 이 사십대 아가씨의 휴머니즘 모험담은 적지않은 우러름을 가지고 경청할 만하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삶의 표본일테니 말이다.

응급 구호 사업이 굉장히 숭고한 일이어서 천사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자신의 환상을 상당부분 깨게 될 것이다. '꼴값하는' 얄미운 직원에게 '저능아'라는 욕설을 마음속으로 퍼붓기도 하며, 멋진 네팔 정부군 장교에게 경험했던 미묘한 감정을 슬며시 드러내기도 하는 저자의 범상함이 일단 '사지의 천사'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게다가 현장에 가서 놀고 먹었던 일들에 대한 언급이 어찌나 많은지, 응급 구호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캠핑에 대한 후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구절도 꽤 된다. 무엇보다도 '오지 여행가'라는 저자의 이력이 이력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 책은 조금 힘들었던 여행을 다룬 기행문같다. 이런 이미지들은 '전세계를 여행하며 돈도 받고 어려운 사람도 도울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으로서의 구호 단체 요원'이라는 전혀 다른 환상을 심어 준다.

그리하여 사실이 드러나는바, 이 책은 마케팅을 위한 책이다. 일차적으로는 월드비전과 같은 구호 단체의 기부금 수입의 증가를, 이차적으로는 구호 단체로 독자들을 꼬셔서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굉장히 '상업적인' 책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한비야가 안내하는 긴급구호의 세계'라는 부록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다. 또한 저자의 후기에서도 '책 내용이 무거워질까 봐 고생 좀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칙칙한 이야기를 환한 색으로 덧칠한 혐의도 있다. 도대체 봄, 여름의 두 계절을 피고용인의 책 집필을 위해 내어 주는 사장이 어디에 있을까? 그 책이 자신의 회사 매출고를 올리고 역량있는 사원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이상!

좋다. 이 책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책이고, 나는 그 얄팍한 상술에 걸려들었다. 그 상술이, 에이즈에 걸리는 게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무섭죠. 그렇지만 에이즈에 걸린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식구는 지금 당장 먹고 살 게 없는걸요.' 라고 말하는 잠비아 유곽의 열여섯 살 소녀나, 반군에게 손목이 잘려나갈 때 '단칼에 잘려나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열네 살 시에라리온 소년을 위한 것이라면, 열 번인들 순진하게 걸려들면 어떠랴?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나의 좌파적인 인류애는 별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여 자발적인 즐거움없이 무관심속에서 나의 통장을 빠져 나가던 오천원인가 만원인가하는 구호 단체 기부금에 약간의 애정이 붙었다는 것, 그리고 회사 휴게실에 월드비전의 모금함을 '이라크 소녀의 편지'와 함께 올려 놓은 알 수없는 누군가가 더욱 더 좋아졌다는 것쯤을 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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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2005-10-0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란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에서 시작되어 부러움까지 느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론 사실 잊고 있었어요.
간혹, 여러매체에서 접해 보긴 했었지만, 왠지 저와는 먼~ 사람 같아 보이고, 먼~ 일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누구를 돕는 다는 것. 쉬운듯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섣불리 다가 서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는 읽어 보고 싶군요.

비가 좀 그친것 같아요.

전자인간 2005-10-0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원격에서만 돕는 저같은 사람에게 한비야씨는 마치 써커스 단원처럼 내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더군요.
직업의 굴레를 벗게 되고, 가족의 굴레를 벗게 되어도 한비야씨의 길은 무척 따라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조용한 비가 좋다고 하셨는데, 좀 서운하셨겠네요.

바람돌이 2005-10-1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왜냐하면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썼잖아요) 일단 다른사람이 뭐라고 썼나, 쭉 살펴보다가 님의 리뷰를 발견했습니다. 근데 님의 글 읽고 그냥 리뷰쓰기 포기했습니다. 왜냐고요. 남이 이미 다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거 좀 싱겁잖아요. 제가 굳이 쓰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이미 다 들어있네요. 좋은 리뷰 재밌게 읽고 갑니다. 만나봬서 반가워요. 전자인간님!(근데 이 닉네임은 무슨 인조인간 이런 냄새를 상당히 많이 피우는군요) ^^

전자인간 2005-10-1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눈치 채셨군요. 저는 사실 기상청 수퍼컴퓨터의 메인 메모리에 기생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랍니다. ^^ 저 말고 진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님~~ ^^
 
발명 이야기 - 인간, 기적을 행하는 자, 반 룬 전집 1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조재선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헨드리크 빌렘 반룬(1882~1944)의 세계는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세계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한겨레 신문 2005년 1월 14일자)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내게 있어서 우아한 문체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책을 읽는 내내 모차르트의 선율처럼 현란하게 깔끔한 그의 문장에 숱한 탄성을 질렀던 경험은 지금도 내 독서 이력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러던 나에게 있어 슈테판 츠바이크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된 한 저술가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헨드릭 빌렘 반 룬 -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사실 아주 없었다.) -, 그는 내가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책의 저자가 되었다.

 '반 룬 전집' 중 현재 나와 있는 것이 '발명 이야기',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관용' 이렇게 세 가지이다. 단 세 권의 책 제목만으로도 그 저자가 뽐냈을 지적 편력의 범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역자의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이 당혹스러운 감탄사로 시작된다. '이 유머러스한 괴짜 아저씨를 도대체 뭐라 소개하면 좋을까? 제1회 뉴베리상 수상작가, 풍자와 해학의 대가, 박학다식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문화사가, 시대를 앞서간 진보주의자, 20세기 초의 위대한 휴머니스트...'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비교를 염두에 두고 반 룬을 읽다 보면 적쟎이 놀라게 된다. 츠바이크의 유려하고 장식이 풍부한 문체와 비교해 볼 때, 반 룬의 문체는 거의 간이 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담백하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글에서는 문장 하나하나에 갈고 다듬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반 룬의 글은 바로 옆에서 속삭이며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녹취하여 기록한 것같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글은 문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서로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 신문에서의 지적처럼, 반 룬과 츠바이크의 세계는 서로 강한 동조의 화음을 울린다. 마치, 베이스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처럼...

 츠바이크가 더 등장했다가는 츠바이크에 대한 글이 될 것이므로, 이제 반 룬에 대한,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발명 이야기'다. 인간이 자신의 피부, 손, 발, 코, 귀, 눈의 기능을 어떻게 확장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거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되감기/빨리감기 버튼을 손에 쥐고 수년에서 수십만년 사이를 종횡무진 왕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담백한 문체는 이 거대한 이야기를 마치 옆집 아저씨가 자신의 집을 어떻게 수리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풀어 놓는다. 그것도 저자 자신의 유머러스한 삽화를 거의 매 페이지마다 곁들이면서 말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이 나오기 까지 글을 쓰는 것 보다 그림을 그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결과는 '책읽는 재미'라는 당연한 독자의 권리를 제대로 충족시켜 주는 사랑스런 책의 등장이다. 두 세번 읽고 분석해야 겨우 한 문장을 넘어가게 되는 고통스런 책에 시달리던 사람에게는 남태평양에서의 휴양과도 같은 책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책에만 머물렀다면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글을 쓰느라 끙끙거리는 일은 없었을 터. 걸림 없이 술술 넘어가면서도 진보주의자로서 저자의 저술의도를 은은한 배경음악으로 깔고 발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거의 놓치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배경에서 화음부만을 연주하던 주제가 간혹 튜티로 떠오르는 장엄한 순간이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맛배기로 감상해 보자.

 '현대의 거창한 '대체 손'은 나쁜 길로 인도되었고, 철저한 무감각 속에서 탐욕스러운 주인들의 뜻에 맡겨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해악을 불러올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근거로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선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친구들이여,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끝으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단점이지만 너무 커서 용서하기 힘든 실수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 '자전거'가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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