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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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언저리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인류애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그 하나는 측은하다 못해 '그림이 되는' 그들의 삶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으로서 기부나 사회봉사활동 등을 통한 구휼 사업의 형태로, 또 하나는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뒤엎고 숨은 가해자를 솎아내기 위한 혁명이나 변혁 운동의 형태로... 나는 개인적으로 진정 가치있는 일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가진자 또는 기득권자들이 억지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하는 불온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불온스레 삐딱한 나는 그러한 의구심 한 덩이를 가슴 한구석에 달고 조금 삐딱하게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월드비전'이라는 단체의 이름과 책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행군'이라는 단어에서 우파 기독교적인 암시가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이 책이 재난과 가난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좌/우의 장기적 해결책과는 큰 관계는 없는 단기적인 해결책, 즉 응급 구호 사업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극심한 재난과 가난의 현장에서는 인간다운 삶이나 이러한 현실을 몰고 온 원인에 대한 고민 이전에 사람들을 일단 살리는 것이 더 시급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얄팍한 소녀적 감수성과 맹목적인 종교적 소망이 나폴레옹같은 불굴의 의지와 뒤섞인 이 사십대 아가씨의 휴머니즘 모험담은 적지않은 우러름을 가지고 경청할 만하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삶의 표본일테니 말이다.

응급 구호 사업이 굉장히 숭고한 일이어서 천사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자신의 환상을 상당부분 깨게 될 것이다. '꼴값하는' 얄미운 직원에게 '저능아'라는 욕설을 마음속으로 퍼붓기도 하며, 멋진 네팔 정부군 장교에게 경험했던 미묘한 감정을 슬며시 드러내기도 하는 저자의 범상함이 일단 '사지의 천사'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게다가 현장에 가서 놀고 먹었던 일들에 대한 언급이 어찌나 많은지, 응급 구호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캠핑에 대한 후기같다는 느낌이 드는 구절도 꽤 된다. 무엇보다도 '오지 여행가'라는 저자의 이력이 이력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 책은 조금 힘들었던 여행을 다룬 기행문같다. 이런 이미지들은 '전세계를 여행하며 돈도 받고 어려운 사람도 도울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으로서의 구호 단체 요원'이라는 전혀 다른 환상을 심어 준다.

그리하여 사실이 드러나는바, 이 책은 마케팅을 위한 책이다. 일차적으로는 월드비전과 같은 구호 단체의 기부금 수입의 증가를, 이차적으로는 구호 단체로 독자들을 꼬셔서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굉장히 '상업적인' 책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한비야가 안내하는 긴급구호의 세계'라는 부록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다. 또한 저자의 후기에서도 '책 내용이 무거워질까 봐 고생 좀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칙칙한 이야기를 환한 색으로 덧칠한 혐의도 있다. 도대체 봄, 여름의 두 계절을 피고용인의 책 집필을 위해 내어 주는 사장이 어디에 있을까? 그 책이 자신의 회사 매출고를 올리고 역량있는 사원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이상!

좋다. 이 책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책이고, 나는 그 얄팍한 상술에 걸려들었다. 그 상술이, 에이즈에 걸리는 게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무섭죠. 그렇지만 에이즈에 걸린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식구는 지금 당장 먹고 살 게 없는걸요.' 라고 말하는 잠비아 유곽의 열여섯 살 소녀나, 반군에게 손목이 잘려나갈 때 '단칼에 잘려나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열네 살 시에라리온 소년을 위한 것이라면, 열 번인들 순진하게 걸려들면 어떠랴?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나의 좌파적인 인류애는 별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여 자발적인 즐거움없이 무관심속에서 나의 통장을 빠져 나가던 오천원인가 만원인가하는 구호 단체 기부금에 약간의 애정이 붙었다는 것, 그리고 회사 휴게실에 월드비전의 모금함을 '이라크 소녀의 편지'와 함께 올려 놓은 알 수없는 누군가가 더욱 더 좋아졌다는 것쯤을 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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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2005-10-0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란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에서 시작되어 부러움까지 느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론 사실 잊고 있었어요.
간혹, 여러매체에서 접해 보긴 했었지만, 왠지 저와는 먼~ 사람 같아 보이고, 먼~ 일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누구를 돕는 다는 것. 쉬운듯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섣불리 다가 서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는 읽어 보고 싶군요.

비가 좀 그친것 같아요.

전자인간 2005-10-0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원격에서만 돕는 저같은 사람에게 한비야씨는 마치 써커스 단원처럼 내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더군요.
직업의 굴레를 벗게 되고, 가족의 굴레를 벗게 되어도 한비야씨의 길은 무척 따라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조용한 비가 좋다고 하셨는데, 좀 서운하셨겠네요.

바람돌이 2005-10-1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왜냐하면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썼잖아요) 일단 다른사람이 뭐라고 썼나, 쭉 살펴보다가 님의 리뷰를 발견했습니다. 근데 님의 글 읽고 그냥 리뷰쓰기 포기했습니다. 왜냐고요. 남이 이미 다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거 좀 싱겁잖아요. 제가 굳이 쓰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이미 다 들어있네요. 좋은 리뷰 재밌게 읽고 갑니다. 만나봬서 반가워요. 전자인간님!(근데 이 닉네임은 무슨 인조인간 이런 냄새를 상당히 많이 피우는군요) ^^

전자인간 2005-10-1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눈치 채셨군요. 저는 사실 기상청 수퍼컴퓨터의 메인 메모리에 기생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랍니다. ^^ 저 말고 진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