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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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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거울 앞에 비친 자화상

도덕적 불감증,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책읽는수요일, 2015. 12.

 

도덕적 불감증에 앞서 사족 하나를 달고 시작하련다. 나 스스로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숱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지식을 쌓지도 않았고, 지적인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대신 타고난 감수성에 후천적 감수성까지 개발되었다. 내 주변인들은 나의 감수성이 타고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의 감수성의 상당량은 후천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감수성은 달리 말하면 공감 능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이는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나의 태도가 다정이 병()”인 듯 받아들여져 타인의 냉소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는 가급적 남은 세월도 이 능력을 개발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나는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때문에 한 사람을 만나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 여럿을, 여러 번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드문 만남이 각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은 통찰의 열쇠다. 평범하다 못해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악의 모습을 들춘다. 윤리적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 자신의 본질에 직면하게 한다. 바우만은 이론 중심의 강단 사회학과 차별화된 일상, 상상, 감정의 사회학자다.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포섭 속에서 어떻게 주체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결국 시선의 교란이다.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되는 일이다. 바우만은 보는 자를 보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며 말하는 자를 말한다(14).

 

기술은 당신을 방관자로 머물게 두지 않는다.(14)”

    

원치 않아도 페북을, 블로그를, 밴드를, 카톡을 한다. 지인들이 수시로 올리거나 링크한 글들을 눈팅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짐작한다. 보여주고 싶은 선택된 모습으로 존재를 구성한다. 서로 염탐하고, 누설하고, 댓글을 단다. 이 모든 행위는 자발적이다. 보여주기에 선택된 모습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사회(confessional society)’(54)은 현대사회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거리와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시선을 나누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폰에 고정된 시선으로 타자의 시선과 마주칠 일이 적어졌고, 우연히 마주쳐도 동시에 무심히 흘려보낸다. 이어폰까지 꽂으면, 소리까지 완벽하게 차단한다. 자신의 성 안에 들어가 있는다. 이런 태도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겠다는 갑옷처럼 보인다. 이제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우연의 필연을 경험할 기회는 매우 희박해졌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다. 선과 악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극적인 도덕 선택의 상황이기 보다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일상의 상황이다. 내가 소비하는 물건이 나를 표상하고, 내가 링크한 사진이 곧 나의 가치관이 된다. 시민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존재한다. 이러한 미시적인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일이 사회학이다. ‘우린 서로 다를 뿐이라고 말하면서, 가치 개입 자체를 거부한다면, 성찰과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덕 불감증 상태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철학자 레오니다스 도스키스의 대담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은 ‘1.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2. 정치의 위기, 감수성의 언어를 찾아서, 3. 감수성의 상실, 공포와 무관심 사이에서, 4. 소비하는 대학, 새로운 무의미와 기준의 상실, 5. <서구의 몰락>을 다시 생각하며를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펼친다.

 

1.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악은 늘 어디에나 존재한다. 단 시대마다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61)이다. 현대 사회의 악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에 있다. 이제 악마는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 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51).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52).” 거대한 사건에서 발생하는 악은 공통의 분노를 유발하지만, 악이 일상성은 우리의 감수성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헬조선을 만든 것은 권력자이기 이전에,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와 같은시민의 자발적 복종에서 기인한다.

 

2. 정치의 위기, 감수성의 언어를 찾아서

 

소셜 네트워크가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으나, 우리는 매체가 의도한 방향을 향해 흘러간다. 그 자체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대중매체에 의한 시뮬라시옹(모사)이 진품을 대신한다. 실제는 사라지고, 환영이 진실을 대신한다. 정치인은 이제 연예인, 스타의 자리를 탐한다. 탈정치화는 신자유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자본과 세계화가 대신하며 민영화의 길을 걷는다. 바우만은 정당이 고전적 운영 방식을 탈피하고, 진정한 의미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정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집단 지성의 참여가 필연적일 것이다.

 

3. 감수성의 상실, 공포와 무관심 사이에서

 

위험 사회에 대한 공포, 노후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의 삶을 살기 못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기본 지침이다. 바우만은 공포의 이유가 무지, 무기력, 굴욕감이라고 말한다. 불안에서 유발하는 공포는 자발적 복종을 불러 온다. 이 지점에서 바우만은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모멸적인 발언을 퍼붓는 것은 하나의 짝패를 이룬다. 이는 건강한 비판과 무관하다. 자신과 타인을 비하하며 느끼는 대중매체의 즐거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해법이 될 것이다. 바우만은 대중매체를 이렇게 만든 것이 권위주의라고 생각한다.

 

4. 소비하는 대학, 새로운 무의미와 기준의 상실

 

대학의 위기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헬싱키에서의 삶은 늘 일요일 오후 같은데 반해 리가(라트비아의 수도)에서의 삶은 언제나 월요일 아침이다.”라는 라트비아 출신 대학원생의 말에서 - 동유럽을 비롯해서 한국과 같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성장한 -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을 인지할 수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의 동생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더니, 정말 심심하다고 한다. 겨우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 앞의 눈 치우기, 그리고 집안 꾸미기가 전부라고 한다. 그래서, ....고 하는데, 그 말에 저절로 공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런 것이리라. 부서질 것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서 살아나기 위하여 쌓고 또 쌓아야 하는 스펙 이외에는 선택지가 별게 없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속되는 한,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산업인력 양성소의 역할을 벗어나기 어렵다.

 

5. <서구의 몰락>을 다시 생각하며

 

근대 국가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바우만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21세기의 경고서로 본다. 이 책들은 근대 초기의 우정과 사랑, 달리 말하면 감수성이 사라졌을 때, 인류가 직면할 사회가 어떠할지에 대하여 경고한다. 우엘벡은 니체와 다른 방식으로 신의 죽음을 폭로한다. 신은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가 완전히 파괴됨과 동시에 죽는다(338). 돈스키스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생로병사 주기를 벗어나는 연인 또는 친구라고 말한다. 우리의 존재함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존재하는 것(밀란 쿤테라)이다.

 

대담에 기초한 책이기 때문에 목차에 맞춰 촘촘하게 쓰인 글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전 방위로 사상을 펼쳐가는 두 사람의 대등한 담화는 고전문학에서 현대 일상생활까지 거침이 없다.

 

도덕적 불감증을 읽으면서, 연말, 나에게 또 다른 응답시리즈였던 <스타워즈 7>가 떠올랐다. 가면은 아주 중요한 장치다. 주인공 핀(존 보예가)이 저항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휴머니즘을 느끼게 되는 순간, 저항군의 피와 고통은 더 이상 대상으로 머물지 못한다. 그 순간 핀은 가면 안에 숨겨왔던 자신의 표정을 드러낸다. 또한 카일로(아담 드라이버) 역시 아버지 루크를 만나는 순간, 가면을 벗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가면을 하나의 메타포로 읽는다면, 우리는 표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도덕적 불감증 사회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참조한 문학들이다. 두 사람이 활용하고 있는 문학서를 알고 있다면, 더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지칭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는 오래 전 읽었으니, 우리들, 아서 퀘슬러의 한낮의 어둠와 같은 디스토피아 문학을 구해 읽어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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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아얀 히르시 알리 (지은이) | 추선영 (옮긴이) | 알마 | 2015-12-29

 

난민 중에서 여성의 비율은 적고, 난민의 정치적 권력 안에서도, 그녀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난민 여성은 성적 요구와 학대를 혼자서 견뎌 내고 있다. 그녀들에 대한 문제 의식의 공유를 위한 공론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욱 안타깝다.

 

이 책은 이단자, 아얀 히르시 알리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저자 아얀 히르시 알리의 인생역정을 담은 자서전이다. 소말리아 내전의 난민으로 유럽에 넘어가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겪었고,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난민 여성이 겪어야 할 진실에 귀 기울이고 싶다.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 절대 빈곤층과 상위 1%, 두 국민의 이야기

김상연 외, 지음, 서울신문 특별기획팀, 한울(한울아카데미, 2015. 12.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은 공감한다. ‘?“라고 질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모두 답을 알고 있다. 상위 1%와 하위 1%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호는 국가‘, ’대한민국이다. 이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 모든 여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를 하나의 집단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지, 모든 싱글을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4명의 기자의 밀착취재, 있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다. 통계에 가려져 있는 미시사적 삶을 보게 될 것이다. 결혼, 출산, , , , 여가까지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만나게 될 삶은 무엇일까?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5. 12.

 

나는 이제 응답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때가 좋았다.”는 향수로 소비하기엔 우리 삶을 가로 막고 있는 생존의 위협이 너무 크다.

 

헐리웃 영화 세계에서 자란 나는 다음 세대인 조카들과 함께 아이맥스관에서 J. J. 에이브람스의 <스타워즈>를 봤다. <스타워즈>시리즈는 매번 미국인을 향해 응답한다. SF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정복했던 역사, 용광로(Melting Pot)를 샐러드 접시(salad bowls)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다문화 사회 미국이 외계 생명체들과 함께하는 미래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 미국인이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를 극복하고 아들의 시대가 열린다. 조지 루카스에서 시작된 역사는 이제 J. J. 에이브람스 시대로 이어졌다. <스타워즈>를 본 김에 <인터스텔라><마션>, <그레비티>를 다시 봤다. 시공간의 열쇠인 중력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다.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부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문학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상상하라

최지범 지음, 살림, 2015. 12.

 

분절된 학문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없다. 국어 독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도표를 읽고, 외국어를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 예술을 더 잘 이해하는 것도 분명하다. 융합과 통섭은 특별한 원리가 아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다. 우리의 공부는 물리를 깨치는 과정, 과정이다.

 

문학은 인간에게 지식을 주지는 않지만, 지적으로 만들어준다는 어느 인문학 강사의 말에 공감한다. 문학을 읽으면 상상력이 깊고 풍부해질 것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과학은 정보로만 남을 것이다. 과학에서 중요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힘은 문학과 별개가 아니다. 생물학부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공부한다는 저자는 문학에서 과학 원리를 끌어 온다. 이호우의 바다, 알퐁스 도데의 , 김소월의 초혼10편의 문학 작품을 가지고 과학 이야기를 풀어간다.

 

 

 

 

 

 

 

 

 

 

 

 

 

 

 

 

젠더 허물기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12.

 

저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로 알려진 여성학자다. 그녀는 자신을 퀴어, 여성, 유대인, 철학자라고 칭한다. 이 책은 저자가 1999년에서 2004년 사이에 쓴 글을 엮은 것으로 윤리적 폭력, 사회 소수자의 공동체, 정체성과 보편성 등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범주화된 자신을 거부하고, 여성 남성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되어 가는 과정만큼 절실한 것도 없다.

 

2015년에도 한국은 천만 영화가 여러 편 쏟아졌다. 6천만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천만이 보는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별개로 치더라도, 이런 문화 풍토가 가능한 것은 분명 자본의 힘을 것이다. 이 속에서 어떻게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한 문화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페미니즘은 패러다임이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젠더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강력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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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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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으로 바로 서기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문학동네, 2015. 9.

 

신간에 뜨자마자 오랫동안 기억했던 책이다. 내가 읽는 개인주의자 선언이 벌써 5쇄라니, 독자의 반응이 대단하다. 사람들도 나처럼 개인주의 선언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조직에서 버티기로 마모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의 갑갑함이 크다. ‘는 작아지고,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무게는 점점 커져간다.

 

세대보다는 시대의 범주로 문제를 접근하는 문유석 판사의 접근이 훨씬 설득력 있게 나가온다. 장하성 교수가 쓴 신간 왜 분노해야 하는가(헤이북스, 2015. 12.)는 이십대의 역할을 강조한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젠다를 세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법은 쉽지만, 한 세대를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하는 장하성 교수의 태도가 몹시 불편하다. 세대로 묶으면 너무 많은 개개인의 편차가 희석되어 버린다.

 

인생에는 숱한 역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든가, 세상이 비관적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든가,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등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죽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므로. ‘그러니까’, ‘어차피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한다.

 

저자 문유석의 글,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찌꺼기처럼 붙어 있는 잉여의 불편함이란 그가 너무도 당당하고 위악스럽게, ‘개인의 행복 추구.’,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직업.’을 말하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는 나의 비도덕성을 비난한다면, 당연히 할 말은 없다.)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악을 떨 수 있지만, 자신이 악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다. 문유석의 위악은 조금 조심스럽다. 반듯한 사람, 건강한 소시민, 그러나 딱 거기까지.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팔려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리라고 하니, 비난해야 할 까닭도 없다.

 

지난 주 인터뷰에서, 앵커 손석희는 배우 황정민에게 마지막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관객 천만을 달성한 국제시장제보자들중 어느 쪽에 마음이 더 기우냐는 것이었는데, 대답은 아주 쉬웠다. 고민할 것도 없이, ‘국제시장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질문에 쉬운 답이라니. 거기까지가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한계라는 걸 알겠더라. 거기에서 나는 찝찝한 잉여가 남는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279).”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댓글을 달고 싶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려하기에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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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반비, 2015. 11.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 대한 논쟁과 분석이 십년을 넘어서고 있다. 개인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우리 모두의 삶의 화두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 <베테랑>, <내부자들>은 정경유착의 한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조폭 문화가 심장을 조여 온다. 단지 특정 집단의 문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답답하기만 하다.

이를 극복할 대안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저자는 직장, 학교, 병원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변화된 정체성과 윤리에 대한 성찰 없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우리는 자기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능력주의는 허구다 -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 되고 있는가

스티븐 J. 맥나미,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옮김, 사이, 2015. 11.

 

요즘 사법고시와 로스쿨 재학생의 집단 자퇴 서명이 사회적 쟁점이다. 이는 금수저 & 흙수저논쟁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학생부 종합 전형이 대입의 60%를 넘어서면서 이제 수험생의 능력이 새롭게 정의 된다. 겸손은 사라지고, 어떻게 자기를 과시하고, 포장하는지가 관건이다. 골방에서 몰래 읽은 수많은 책은 중요하지 않다. ‘적자생존’, 기록만이 살 길이다. 읽은 책보다 학생부에 기록된 책이 더 중요하다. 조기 선발은 학생의 가정 배경이 절대적 변인으로 작용하게 만든다. 잠재 가능성 보다 갖추고 있는 능력이 중요해질수록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자본 뿐 아니라, 사회관계자본, 학력문화자본이 훨씬 중요해지고 있고, 자본 간의 전환율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읽고 싶다.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김영란 창비, 2015. 11.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김영란 전() 대법관의 인터뷰가 있었다. 여성 최초의 대법관, ‘김영란법으로 이름을 알린 그녀의 언어 선택은 매우 섬세했다. 토씨 하나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는 진보적 대법관의 진짜 모습은 사람 사는 상식을 되찾으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내린 판결을 다시 되돌아본다. 이 판결들은 우리 사회를 읽은 핵심 키가 될 것이다.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2015. 11.

 

니체는 들뢰즈의 해석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들뢰즈의 해석은 나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텍스트는 변주하며 무한 생성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만의 체계를 가지고 라캉, 르장드르, 푸코를 연결하고 통합한다. 독자 또한 사사키 아타루의 해석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 맞게 텍스트를 적극 활용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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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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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별 다섯이 된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2015. 9.

 

이 책을 읽음으로 하루를 득템한 기분이다. 책날개를 젖히면 서문과 목차에 앞서 책에 대한 깨알 같은 찬사가 가득하다. 이 책은 독자 개개인의 불안증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전문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쉽게 기술되어 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번역자조차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 역자 후기를 채우고 있다. 리뷰를 쓰는 나 역시 나의 불안증에 집중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스콧 스토셀 대신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의 평가를 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별 다섯을 준 이유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적 역사를 들춰보아야 한다.

    

불안은 타인의 반응에 대한 과도한 의식일까?

 

내 불안증의 출발은 죽은 쥐를 만진 경험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학교 봉사 활동으로 지역 정화 사업에 전교생이 참여했다.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학교 앞 하수구 같은 하천에 들어가 젖은 쓰레기를 줍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충 청소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담임선생님의 체면을 세워주느라 꽤 열심히 쓰레기를 주웠다. 집게도 없었다. 오로지 손으로 오물을 집어 봉투에 담아야 했다. 질척거리는 흙속에서 뭔가가 잡혔다. 죽은 생쥐였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서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대상은 가 되었다. 결벽증도 심해졌다. 친구의 도시락 반찬도 먹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화장실을 가는 것도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아이

 

한 번의 사건으로 불안증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역시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이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다. 백번쯤 망설이다가 담임선생님께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선생님은 곧 수업이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사실 소변을 참느라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심장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였다. 겨우 일어나려는 순간, 바지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 오줌싸개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집에 전화하고, 엄마 가 와서 조퇴를 했다. 한 낮의 밝은 햇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후 나는 수년 동안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다음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약도 꽤 오래 먹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역시 또 같은 시기였다. 면 동네에 살던 나는 엄마와 자주 전주에 나갔다. 시장에서 한 눈 판 사이에 엄마를 놓치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야하는데, 한참 어린 나는 발자국 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엄마와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때 내 나이 여덟 살, 삼십 초반이었던 부모님은 거의 매일 싸웠다. 두 분의 성정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사는 일이 고단하고 강팍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밤낮없이 일을 다니셨다. 하루걸러 하루씩 부모님이 싸우면, 나는 매일 밤 불안했다. 두 분이 헤어지면 누구를 따라가 살지 어린 나이에 고민이 많았다. (당장이라고 이혼할 것 같았던 두 분은 47년째 부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사춘기부터 나는 동생들과 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먹고 사는 일로 바빴던 부모님은 밤늦게 잠시 들러 음식만 주고 지체 없이 시골집으로 가셨다. 나는 부모님이 다녀가신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서 두 분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안으로 위로 받는 것은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내가 자꾸 걱정을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성장하면서 나의 걱정과 불안은 점점 강화되었다. 걱정을 하면 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다. 혹은 최악의 상황에 미리 적응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최악만은 막아야 한다는 자세로 일한다.

    

마지막 반전이라니. 불안의 긍정 효과

 

불안은 창의성의 토양이다. 불안 없이 예술, 운동, 창작, 성취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불행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삶을 풍부하게 살아가야 한다. 일단 30년 전만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Freud에게 감사하다. (내가 가장 몰두하는 주요 환자는 나 자신일세.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빌헬름 플리스에게(1897. 8. 43) 또한 자신의 삶 자체를 임상으로 제공한 저자에게 감사하다. 그는 기대 이상의 위로를 독자에게 제공했다. 불안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을 아는 일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나 또한 느끼고, 깊어지기도 전에 정리되었던 몇몇 사랑에 대해서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특별한 경험이 때론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평생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지 싶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현란한 지적 삶을 사는 것이 유희나 목표가 아닐 것이다. 나를 알고, 세계를 좀 더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적당한 두려움과 떨림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불안 그 자체이지만, 꽤 근사한 흥분 상태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끊임없이 메모하고, 그때그때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불안해하던 과거의 나, 다시 그때의 내가 된 설렘이 있다. 요즘 도서관 책의 강점도 알게 되었다. 밑줄 긋는 즐거움을 포기했더니, 약속한 기일 안에 읽어내는 부지런함이 발휘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53)”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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