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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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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3.

 

지난 3월 신간 중에서 눈과 마음이 꽂혔던 책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였다. 사적 삶의 변화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듯, 바르트 철학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철학을 삶의 무기로 만들어주는 철학자 강신주의 쉬운 언어가 없었다면, 바르트는 여전히 난해한 철학자로 나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을 나누는 언어가 메타포로 변주된다는 은유 가득한 책이다. 바르트의 문자(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강신주의 강의 덕분이었다. 한 시절, 바르트 철학은 내 실연의 원인을 분석하는 좋은 무기였다. 그의 사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욕망, 바르트 공부의 초석으로 삼고 싶은 바램이 이 책을 추천한 강력한 힘이다.

 

원래 말은 글보다 쉬운 법이니까, 이번엔 좀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녹취록과 강의안은 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역시나 기호학자답게 은유의 계보를 잇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만큼 지식의 계보를 따지는 집단은 없을 듯^^)

 

김영하의 말하다를 읽으면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사유하던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게 된다. 쓰는 행위는 나를 확인하고 발현하는 과정이다. 얼마 전 팟 캐스트 손미나의 싹수다방에서 건축가 오영욱이 초대되었다.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여행가로 더 잘 알려진 오영욱. 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결핍에서 찾았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음악적 재능이 없기 때문에 글쓰기가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어필하고 싶은데 실현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안을 찾는다. 욕망은 욕망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글쓰기는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다. 다른 무수한 방법들을 놔두고 글쓰기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어떤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바르트가 말년에 소설를 쓰고자 했던 것은 평생을 함께 한 어머니의 죽음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파괴되지 않고 기억되기를. 사랑의 발화가 수신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문학적 글쓰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전달되지 않는 사랑을 채워나가는 의지,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으로 그는 소설을 선택했을 것이다. 필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소설을 통해서 완성된다.

 

글쓰기에서 바르트는 17음절로 구성된 짧은 글인 일본의 하이쿠에 주목한다. 하이쿠는 가공되는 기억보다 현재의 한 순간에 집중하는 철학자가 관심을 두기에 충분한 텍스트다. 언어에 담긴 권력과 doxa를 이해하는 탈구조주의 철학자는 사태 보다는 표면에 주목”(584) 했을 것이다.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는 측면에서 바르트의 저자의 귀환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주체의 억압하는 권력을 밝혀냈던 이들이 다시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의 죽음독자의 소생을 소리 높여 외쳤던(585) 바르트는 말년에 극단적으로 선회하여 독자의 귀환을 외친다. 작품을 쓰는 동안만큼은 저자의 삶이 하나의 작품 안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글쓰기의 주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대상을 쓰는 수동적 위치에 놓인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586)” 글쓰기는 삶의 기록이고, 존재의 확인이다.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으로 메모와 하이쿠만한 것이 없다. 하이쿠는 삶과 죽음 사이의 순간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하이쿠 중에서 현전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몇 편 있다. 일상의 17개 음절이 만들어내는 느낌은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평범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순간을 담아낸다.

 

 

 

누워서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여름의 방

(야하)

 

   23. 정월 초하루

책상과 종이들은

지난해 그대로네

(마츠오, 뮈니에)

 

33. 첫눈을 보았다

오늘 아침

세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쇼, 야마타)

 

  

 

바르트는 일본의 하이쿠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다면, 나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글쓰기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자기다움에서 내가 꿈꾸는 마지막 소망은 부사 없이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 보는 일이다. 나의 생각이 글로 살아나지 못할 때, 강도를 키우기 위해서 자꾸 덧붙여지는 부사가 글의 격을 떨어뜨린다. ‘라는 출처 모를 접두사가 유행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정말 좋다는 표현이 살지 못하니 개쩐다고 하고, 멋있다는 말이 살지 않으니 개멋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싶다. 그런 접두사와 부사 없이도 담백하게 내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는 글로만 이루어진 책 한권을 남기고 싶다.

 

바르트를 수식하는 말만큼이나 그의 글쓰기는 전방위적이다. 문학 이론가, 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 기호학자, 문하 철학자(581), 그리고 소설 쓰기를 꿈꾸었던 문학가이기도 했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소설의 준비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미셀 푸코(Foucault)사회를 개혁해야 한다이후, 녹취록을 글처럼 끊어 읽고 이해하려 했던 오랜만의 경험을 상기하게 하는 책이다. 유고집인 이 책은 소설의 준비’ 2부와 두 개의 세미나 텍스트로 구성(581)되어 있다.

 

글쓰기는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글을 편견과 선입견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지금은 글 쓰는 행위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라도 쓸 수밖에 없는 자기표현 수단이 글쓰기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살아있는 한 포기하지 않을 글쓰기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하게 한다. 단 한 번의 일독으로는 미진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의 권력성을 상기할 때 다시 꺼내 들어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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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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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낸 존경 혹은 무의식적 카피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책이 도착한 내내 행복했다. 침대에 두고, 서재에 두고,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텍스트 보다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시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몰랐다. 이 책을 보다가 문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유화가 없어 집에 있는 아크릴을 꺼내어 캔버스 밑 작업만 해도 하루가 달라진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아는 화가들은 늘 좋아하는 작품을 따라서 그려 보라고 했다. 그게 가장 좋은 그림 훈련(!!)이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를 매혹한 화가의 작품엔 나의 의식. 무의식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사람도 꽃도 힘들게 했던 꽃샘추위가 지나고 나니, 벚꽃 아름다운 것은 잠시였다. 해마다 봄이 있지만, 그 봄은 모두 달랐다. 자라면서 맞이했던 매 해 봄이 남긴 인상이 내 기억 안에 켜켜이 쌓여 유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어떻게든 그해의 봄을 고유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여기 저기 아름다운 벚꽃을 많이 보았지만, 이번 봄엔 시간을 함께 보낸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는 차안에서, 사람 많은 곳에서 벚꽃을 보는 사람은 하수다. 인적 드문 장소와 시간, 도수 낮은 알콜을 마시며 서너 시간 족히 앉아서 바라보는 벚꽃 그늘은 천상의 세계를 열어준다. 미리 보는 천국. 거기에 우리가 꿈꾸는 삶의 메타포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은 책이 늘어갈수록 드는 생각이다. (나를 포섭하지 못하는) 남들의 명품 백 욕망이 내겐 책이었다. 명품백과 책의 차이가 있는가? 탐욕스럽게 책을 쌓아두고, 보며 행복해했던 시간의 도덕적 명분은 저자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책은 매력적인 인간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주는 선물이었다. 당연히 신간을 가장 먼저 사서 보면서, 나는 이미 그 책을 읽었다는 우월감. 남보다 선점하는 기쁨을 누렸다.

 

욕망을 적당히 채우고 어느 지점에 도달해보니, 이제 신간의 매력이 조금씩 사라진다. 제목은 새로웠으나, 내용이 새롭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른들의 구태의연한 말이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신간 열권 보다 원전과 고전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더 낫다. 인류의 지적 자산은 선대의 지혜를 새롭게 번역하고 덧입혀 가는 과정인 듯하다. 최근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에 올랐다. 책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 현실에 안주해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큰 탓이다.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그것보다 더 ‘hook’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 그런데. 책을 사서 읽어보니, 내용은 아들러의 심리학이었다. 아들러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아들러를 여러 번 제대로 읽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후학들은 앞선 학자의 생각을 적당히 가공하여 팔아 치우는 소매상에 지나지 않을까?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드러내놓고 존경하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카피하거나 이는 모사의 과정이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모사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까워. 흑백의 명암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색채의 언어로 풀어내는 거지.(5)”라고 말한다. 어쩌면 베낀다는 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CCTV로 있는 현상을 풀로 찍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편집과 연출을 통하여 예술이 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다. 유사하나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의 탄생이며, 원작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작의 권위를 파괴(12)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카피의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표현된 주제, 채택된 형식, 장르의 개념을 지준으로 세 개씩 짝을 이루는 3부작으로 이루어졌다. 읽다(보다) 보면 주제 보다는 소재 중심으로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후의 만찬’, ‘누비 소매 옷을 입은 남자’, ‘시스티나의 성모’, ‘다정한 모자로 분류하여 분석하다가 나중에는 화가의 작업실’, ‘발코니’, ‘알제의 여인’, ‘유럽의 여다리등 소재 중심으로 선회한다. 시기별로 사조를 나누는 미술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대별로 지배적인 장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장르는 여러 세기를 가로 질러서 지속되기도 한다.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 서평에 모든 작품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의미 없다. 렘블란트의 자화상, 로비스 코린트의 <삼미신>이 보여주는 나체, 사랑, 죽음, “꿈의 조립공구스타브 모로의 <환영>,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습작>, 클로드 모네의 <런던, 국회의사당, 안개를 뚫고 비치는 햇빛> 등등 알고 있으나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한번 보고 서가에 꽂아두기 아까운 책이다. 그림은 글과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이 책은 그림도 좋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격을 높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207),”지만, 글은 그림으로 들어가는 열쇄가 된다. 과거는 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번 새롭게 해석하고 변주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현재가 된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7). 하늘 아래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은 아이디어가 convergence의 과정에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과거를 드리우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게 마련이다.

 

책의 서문에 있는 말을 상기해보면, 피카소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사유(思惟)라고 믿는다.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고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피카소, 1934.

.

시대와 시대를 가로 질러서 사이의 여백을 메우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카피하는 이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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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Ida (이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Music Box Films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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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과의 조우 <이다>(Ida>, 2013) &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이미 죽어버린 은유지만, 인생은 여행길이다.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는 예측불허, 그래서 삶은 의미를 갖는다. 봄과 눈의 결합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듯, 평범한 일상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운을 가져오는) 진실과의 조우는 이전과 이후의 삶을 분절하는 명확한 기준점이 된다. 로드무비는 공간 이동의 과정에서 시간을 회귀한다. 사람과 사태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여정의 틀을 무한 변주한다. 이번에 소개할 두 편의 영화는 현재를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잃어버린 과거에 관한 이야기다.

 

<이다>(Ida, 2013) 감독 : 파벨 포리코브스키 주연 : 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안나), 아가타 쿠레샤(완다 루즈), 조안나 쿠릭

 

<이다>1960년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가톨릭 수녀원에서 자란 고아 소녀 안나는 정식 수녀로서 인정받는 서원식을 위하여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된다. 본명은 이다 레벤슈타인, 부모는 2차 세계대전에서 살해당한 유태인. 탈속과 세속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두 사람의 삶은 극과 극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고아로 자란 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과 함께하며 금욕적으로 살아왔다. 격리된 채 잘 짜인 공간에서 생활한 이다와 달리, ‘피의 완다라고 불렸던 이모는 공산정권이었던 폴란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으로 내몰았던 검사 출신으로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과거를 잊기 위해 퇴폐적으로 살아가는 이모 완다에게 불현 듯 나타난 이다는 과거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동기가 된다. 이다 역시 완다가 묻는 결정적인 질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상반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축에 위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러닝타임 82, 단순한 서사 구조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은 만만치가 않다. 관객은 신기한 콤비가 된 두 사람이 이다의 부모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한다. 부모의 시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수녀원을 벗어나 폴란드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이다는 자신이 수녀원에서 쌓아올려 왔던 존재와 세계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 이다는 혼란 속에서 그동안 구축해 왔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모를 만나고 온 후, 이다는 수녀원 식사 중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수녀원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폴란드 현대사를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다와 완다의 실존이다.

 

사랑을 나눈 침대에서 섹소폰을 부는 남자와 이다가 나눈 대화는 이다 자문자답이기도 하다. 함께 바다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앞으로 이어지게 될 예측 가능한 삶의 끝에서 이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선?”

 

<이다>를 한편의 시로 만든 것은 흑백 영화 특유의 절제미와 최소한의 대사에 있다. 감독은 (우리가 익숙한 1.86 : 1 비율 대신 1.37:1의 화면 비율을 고수하는) 작은 화면 비율과 흑백 톤의 영상에 절제된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을 담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화면 정면에 담지 않고, 클로즈업조차 차창과 같은 여과 장치를 투과하여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앵글 중심에서 비켜 있는 인물은 여백의 미를 살리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다. 인물이 스크린의 측면에 놓이거나 걸쳐 있을 경우, 영상은 인물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과 위태로워 보이는 상태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완다의 상실감이 극에 달했을 때, 카메라는 턱선 위쪽만 담아낸다. 롱테이크와 고정된 카메라는 고요함과 공허함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낯선 연출은 관객과 화면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엔딩 씬의 유일한 핸드 헬드 촬영은 이다의 확고함을 표현하는데 최선의 선택이다. 그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앵글에 위태롭게 갇혀 있던 이다가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온 느낌이 배가된다. <이다>는 영상으로 캐릭터를 완성해 가면서, 어떻게 내면을 시각화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감독 파벨 파블리코브스키는 십 때 이후 영국에서 성장하며 영국 영화를 만들어왔다. 대표작인 <사랑이 찾아온 여름>에서도 국적이 드러나지 않지만, 오랫동안 고국에서 폴란드에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기획의 성과가 영화 <이다>이다. 영화 속에서 이다와 완다는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험과 성격을 드러내지만, 실제 배우로서의 커리어 역시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다를 연기한 아가타 트르체부코브스카는 우연히 캐스팅 된 대학생이다. 반면 완다 역의 아가카 쿨레샤는 20년 경력의 폰란드를 대표하는 여배우다.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다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완다 역으로 더없이 적절했다.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감독 :드니 빌뇌브 주연 : 루브나 아자발(나왈 마르완)

 

<그을린 사랑>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전쟁 이야기다. “세상을 등질 수 있게 시신을 엎어 놓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한 여인이 죽었다. 비밀스런 여인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의 평탄치 않았을 삶을 짐작케 하는 유언이다. 영화의 열쇠는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은 그녀의 서사다. 나왈의 상사이자 공증인인 르벨은 쌍둥이 자녀 잔느(멜리사 드소르모-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에게 유언장을 공개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으라는 어머니 나왈의 유언에 잔느와 시몽은 당황한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질 때 무덤에 비석을 세워다오.”라는 말속에서 남매가 만나야 할 가족사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된 여권과 흑백 사진 한 장을 단서로 - 캐나다에서 거주하던 - 남매는 중동 출신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낯선 지형을 통과하는 긴 여행에서 어머니의 진실과 직면한다.

 

이 영화는 분노, 진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잔인한 운명은 매순간 강한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분노 혹은 침묵 이면의 어두운 진실과 상처를 깊게 응시하게 한다. 수학공식처럼 난해하여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이 여정을 지탱하는 사람은 공증인 르벨이다. 그는 죽은 나왈을 대신하여 남매가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 당위를 부여한다. 전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는 마주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다. 르벨은 잔느와 시몽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과거로의 회귀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한다. “공증인의 임무 중 하나는 고인의 유지와 그들의 성스러운 비밀을 돌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증인은 마치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의 사공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르벨은 죽은 나왈과 살아있는 남매를 연결하는 고리다.

 

퀘벡에서 명성을 쌓아올린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단편 <Next Floor>와 장편 <폴리테크닉>으로 주목 받았다. <폴리테크닉>은 평화롭기만 한 몬트리올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폴리테크닉 학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198912월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 공대에서 마크 르팽이라는 기계공학도가 여대생만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전을 벌였고, 결국 14명의 소녀가 목숨을 잃었다. 드니 빌뇌브는 아이러니한 흑백의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 이 사건을 돌아봤고, 캐나다의 권위 있는 영화상 지니 어워드에서 최우수영화상을 비롯해 9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폴리테크닉>에서 살인자로 분한 배우 맥심 고데트는 <그을린 사랑>에서 쌍둥이 중 시몽으로 출연했다. 그에 이어 1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그을린 사랑>은 베니스, 토론토 등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였고, 2010년 부산영화제 화제작이기도 했다. 중동 내전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의 역사를 지극히 영화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주제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

 

영화의 원제는 Incendies, 불어로 화재, 큰불, 넓게 퍼진 붉은 광채, 공란, 전란의 뜻을 담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현미경을 들이대어 밀도 있게 보여주지만, 통곡에 젖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을린 사랑이라고 옮긴 우리식의 표현 또한 적절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명은 지구상에 실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구체적인 지명이나 나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가상의 지명을 사용했다. 전쟁의 잔인함을 이야기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비극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전쟁 자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유지한다. 이는 캐나다와 중동의 지역 색을 강조하지 않는 감독의 의도에서도 알 수 있다. 캐나다의 회색빛 겨울과 뜨거운 중동의 갈색 풍경을 매우 중립적인 채도로 설정하였다. 카메라 프레임의 여백은 대사보다는 공간과 인물의 감정이 흘러가는 분위기가 훨씬 더 격렬함을 사유하도록 한다. 폭력은 한결같이 고요한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모르는 기억과 만난다는 면에서 닮아 있다. 사건의 비밀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에서 동일하다.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도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운한 과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는 폴란드에서 흔하게 불리는 이름인 이다와 완다를 사용한다. <그을린 사랑>은 세상에 없는 지명을 사용하여 특정 지역에 고정하지 않고 사태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우리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반면 <그을린 사랑>이 플래시백을 주로 사용하여 과거를 끌어온다면, <이다>는 플래시백 없이도 과거와 현재를 접합한다.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표현하는 직접적인 연출은 없지만 끝없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간결하고 시적인 <이다>와 달리 <그을린 사랑>은 무겁고 독하다. 이미 봄은 왔으나, 꽃샘추위도 다녀가고, 한번쯤 더 늦은 봄눈이 다녀갈지도 모른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 사이사이 어떤 독한 사건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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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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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쓰기에 대하여 말하고, 말을 글로 옮겨 다시 말하다·Talk·

 

김영하, 문학동네, 2015. 3.

 

 

1980년대 중학생 시절, 전교생이 매주 월요일마다 일기장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여행이 수학여행, 재미없는 독서가 독후감 제출 독서, 재미없는 시험이 내신 시험이었다. 자발성 없이 이루어진 일은 배움은 있어도 재미는 없었다. 지나고 나면 모두 다 추억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의지와 무관한 일들을 수없이 하면서 어른이 된다. 여수, 경주, 설악산은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수학여행이 떠올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그 근처도 가지 않았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과 시는 시험 문제가 떠올라서 오랫동안 문학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십대의 일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보여주기 위한 것과 치유 받기 위한 것. 진솔한 일기는 대부분 편지가 되어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퍼져 나갔고, 보여주기 위한 일기는 다른 반 검사가 끝나면 검사 끝난 친구의 것을 내 일기장으로 속여서 검사 받는 식이었다. 다행이 선생님께 걸리지 않았다. 일기를 빌려준 친구의 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안지아. (화교학교에서 전학 왔던 영민한 그 친구는 지금도 안녕하겠지? 부디 그러하기를.) 친구에게 빌려온 일기장을 내가 그냥 돌려 주었을리 만무하다. 유사 문자 중독 증상이 농후했던 나는 친구의 일기를 읽는 첫 번째 독자로서 영광(?)을 누렸다. 지아 역시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썼겠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은 일기 내용과 무관하게 흥미로운 경험이다.

  

내게는 치유의 일기장이 따로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1학년은 미움도 분노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했다. 기록은 언제가,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음악실에 두고 온 일기장을 발견한 한 아이가 교실에서 큰 소리로 내 일기를 읽었다. 사소한 장난은 여러 사람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겐 비방이었고, 내게는 치유였던 글들은 다시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다. 친구들에겐 모욕이었고, 내게는 실연이었다. 일기에 기록된 친구들은 그 날 이후 나에게 등을 돌렸다.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쓸 수 없었다.

  

일기를 쓸 수 없게 된 아이는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기 시작한다. 당시는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이 500원을 내고 영화를 보았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음은 같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보고 재미있으면 동생을 데리고 가서 다시 보기도 했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순진했던 시절이다. 그 습관은 오래도록 남아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시험이 끝나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영화를 보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귀가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밤새 읽었던 책들, 도스트예프스키, 헤르만 헷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들, 안톤 체홉, 오 헨리, 앙드레 지드의 단편들, 삼중당 문고로 만들어진 한국 근대 문학은 자발성에 기초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의 일기와 같은 글들을 기꺼이 내어주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이.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지적 허영이 결합하여 책은 꼭 사서 보았다. 빌려 본 책도 서점에 가서 구입했다. 그것이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를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빌려보는 친구를 살짝 경멸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좋은 부모님 덕분에 책값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난해도 책은 당연히 사서 읽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어설픈 교육열도 한몫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화와 책은 내 성장의 팔 할을 차지했다.

  

김영하 작가의 신간 말하다·Talk·를 읽다보니 나의 어린 시절 치유와 상처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글쓰기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내가 쓴 글이 나를 겨냥한 칼날이 된 이후, 글을 쓸 수 없게 된 사태가 나의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떠오르면서 그냥 쉽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라메르의 이야기처럼 나는 종이 위에서만 그것도 아주 조금 존재할 뿐이었다. 쓴다는 것은 많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당연히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구성된다.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내가 글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성찰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내 삶은 약간의 품격을 갖추어 간다.

  

말하다·Talk·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면을 지켜라.

예술가로 살아라.

엉뚱한 곳에 도착하라.

기억 없이 기억하라.

  

2010년 이후 여러 곳에서 말해왔던 강의의 편집·왜곡을 바로잡고 싶은 작가의 결벽의 산물이고, 말은 글보다 불완전하다는 작가의 신념이기도 하다. 강의에서 들은 그의 도 좋았으나, 그의 육성을 가늠하며 읽을 수 있는 은 더 좋다. 그의 글과 사유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나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함을 제거해준다. 오래전 연암 박지원의 책을 읽으며,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 다르고, 계급도 다른 우리가 같은 감수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감사했듯, 나와 같은 허무주의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김영하 작가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다. (과한 펜심이라고 해도 실제 내 마음에 비하면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침범당하지 않는 고독한 개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키워가도록 힘을 실어주는 말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면 쓰고 싶은 ‘Thanks to“는 다음과 같다.

 

문학이 절망의 순간에 나의 무기가 될 것임을 가르쳐준 작가 김영하,

자신의 재기와 천재성을 정의(正義) 실현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총수 김어준,

세상에 중립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앵커 손석희,

공공 건축을 통하여 공간적 사유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건축가 고() 정기용

 

그들 덕분으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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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추천합니다.

 

대중들, 제프리 슈나프 지금, 매슈 튜스 엮음, 양진비 옮김, 그린비, 2015. 3.

 

 

 

 

 

 

 

 

 

 

 

 

 

 

대중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함의한다. 보통선거, 의무교육,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19세기) 초기 대중은 의식있는 참여적 존재였다면, 지금의 대중은 자본에 의해 기획된 수동적 객체로 전락했다. 스탠퍼드 인문학 연구소는 지난 2000년부터 대중 프로젝트에 착수해서 이 책을 발간했다고 한다. 또한 신뢰로운 출판사 그린비 프리즘 총서 18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기획이라고 판단된다. 대중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후 대중이 나아갈 방향성을 탐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 하승창 지음, 휴머니스트, 2015. 3.

 

 

 

 

 

 

 

 

 

 

 

 

 

 

 

87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에 시민단체가 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슈와 함께 한 시민단체의 25년을, 시민운동가 하승창이 정리했다. 저출산, 고령화와 함께 도래하고 있는 저성장 시대에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통찰이 필요한 시기에 살펴보아야 할 분야의 책이다. 90년대 참여하는 개인은 활발한 시민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다시 한번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민운동은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학의 열쇠, 로버트 M. 헤이즌 · 제임스 트레필 지음, 김영훈 그림, 이창희 옮김, 교양인, 2015. 3.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면서 과학 분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과학사회과학을 전공한 나에겐 외국어만큼 낯설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새롭게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 든다. 과학의 19개의 가 통찰의 수단이 되길 기대해본다. 원제는 Science Matters. “과학 앞에서 작아지는 보통 사람들이 읽으면 딱 좋을 최적의 과학 입문서라는 책 소개를 믿어보자면 우리에게 과학에 한걸음 다가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과학에 대하 지적 호기심을 인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도전하고 싶은 책이다.

 

과학과 인문학,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지음, 김동환 · 최영호 옮김, 지호, 2015. 3.

  

  

 

 

 

 

 

 

 

 

 

 

 

 

자기계발 열풍과 함께 삶과 무관한 불온한 인문학이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수단이 되고 있다. 진정한 인문학은 무엇일까? 인문학은 어떤 상황에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인문학을 시작하기에 앞서 정신과 몸의 일원론적으로, 혹은 이원론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문제 제기한다. 전공을 넘어선 통섭의 연구가 인문학을 상생하게 할 것이다. 저자는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과 상부상조하는 공동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면서 몸과 정신을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신체화한 인문학에 호기심이 당긴다.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창비, 2015. 3.

 

 

 

 

 

 

 

 

 

 

 

 

 

 

진중권의 미학 강의와 평론도 좋지만, 이 책에서 살펴보게 될 예술가들이 더 매혹적이다. ‘사진가 구본창, 건축가 승효상, 배우 문성근, 미술가 임옥상, 소설가 이외수,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미디어아티스트 박찬경. 이들을 한권의 책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대된다. (비판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횡무진 한국 사회 이슈를 분석하는 논객 진중권도 좋지만, 대중과 미학의 거리를 좁혀왔던 미학자 진중권은 더 좋다. 그의 정치적 판단과 해석에 매번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진정성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를 통해서 한국 거장들에 대해서 깊게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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