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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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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으로 고민하는 이를 위한 (21세기 실천적 지식인의) 합리적 조언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2016. 2.

 


 

1998, 다른 번역본으로 결혼과 도덕을 읽은 적이 있다.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김영철 옮김, 자작나무, 1997.) 꽃도 제 때를 만나야 피듯이, 책도 시절인연인지라,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십여 년이 시간이 필요했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서재에서 그 책을 꺼내보니, 밑줄이 빼곡하고, 느낌표와 물음표가 가득하지만, 실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번에 읽은 결혼과 도덕은 러셀의 친절한 설명뿐 아니라, 번역도 부드럽다. 이번에 다시 러셀을 처음 접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러셀 사상을 이해했다면, 내 인생에서 사랑, 결혼, 가족은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간의 성()은 본능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내가 가지고 살아가는 올바름(도덕)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게 된다. 결혼과 가족은 변화에 대한 이해, 새로운 도전과 적응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성 행위는 본능이 아니라,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성 윤리,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성교육 역시 중요하다.

 

21세기에 우리는 러셀의 결혼과 도덕을 읽어야 하는가?

 

러셀은 올바른 성교육, 자유연애, 계약 결혼, 성적 자유화를 통해서 건강한 개인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9년 쓰인 이 책은 아직 우리가 넘어 서지 못한 구시대의 한계. 구태의연함에 대하여 혁명적인 질문을 한다. 그 당시 러셀의 주장이 얼마나 도발적이었을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1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결혼과 도덕에 관한 사회 시스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의문이 갖게 한다.

 

러셀이 이 책을 집필한 당시와 비교해 보면, 이제는 결혼과 도덕에 관한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전, 반핵 운동으로 구속 되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러셀의 뉴욕시립대학교 교수 임용이 취소된 것도 결혼과 도덕때문이다. 니체는 가부장사회에서 성, 결혼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고, 성 담론이 금기 되었는지를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에서 기독교와 천주교, 근대까지 역사적 분석을 토대로 탄탄한 주장을 펼친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이해는 문화 인류학적 연구가 필수다. 종교가 결혼과 가족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던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성 관계를 왜곡한다. 성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했던 원시 부족과 달리 문명인은 성적 피로와 함께 금욕주의를 동시에 경험한다.

 

결혼과 도덕이 한 사람의 인생 발목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스템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성 문제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얼마 전, 강신주 철학자의 전 부인이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지인과 언쟁(not 논쟁)을 벌였다. 강신주가 쓴 책이 문광부의 청소년 권장 도서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 철학자의 전 부인이 수년 전에 도서 추천을 취소해달라는 요청 글이었다.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고, 개인적으로는 관심도 없다. 그 글은 강신주의 아들이 일탈한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나열과,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철학자의 책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정답인지도 의문이고, 자기 자식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교육한 사람만이 철학자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며 잡스럽게살기를 자처한 철학자에게 규범화된 바른 삶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논쟁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 “인생에서 사랑의 지위에 대한 러셀의 주장은 사랑의 힘과 방식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이 반드시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 출세를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랑을 통해서만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성교는 사랑을 목적으로 한 실험이다.”) 십대, 이십대에 러셀을 읽는다면 사랑을 긍정하며 -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 합리적인 제안으로 가득하다. 아이 없는 부부의 계약 결혼, 간통에 대한 법적 대응보다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태도, 억압적이지 않은 성교육, 국가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모계 사회, 성의 개방과 피임 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본 다음, 자기의 성()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고뇌하는 청춘에게, 결혼을 보험이나 적금으로 생각하는 결혼 정령기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결혼이 자기 인생을 불행의 늪으로 만들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이 책을 보면서, 밴쿠버 챕터 서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문고판을 사서 읽던 오래 전 겨울도 떠올랐다. 이 책을 추천하며 썼던 글을 다시 옮겨 본다. - 영어가 안 되는 내가 단기 어학연수를 가서, 끼고 살았던 책은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었다. 얇은 책이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읽고 해석하리라 목표도 세웠다. 어려운 건 영어가 아니라, 러셀의 사상이다. 내겐 노동으로 부터의 소외가 빼앗아 간 여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발적 게으름은 가능한가? (이번에 본 영화 <풍푸 팬더>에서 무술을 가르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아들 팬더에게 요구하는 것이 늦게 일어나기, 오래 자기 등등이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웃음이 터진다. 사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그렇지 않은가?) 니체 방식으로 사유하자면, 결혼과 도덕은 시대의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 다시 또 고전이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올린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결혼과 도덕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식의 결혼과 도덕으로 자기 배려를 실천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성에 대한 무지가 미덕도 아니고, 성을 금기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리비도는 예술의 근원이다. 우리는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를 통한 미학적 삶의 실현하기 위한 삶의 기획이 필요하다.

 

 

덧붙임 :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편집자를 저자와 함께 위치시켰다. 역자 역시 창작자다. 왜 이 책은 역자의 흔적과 에필로그를 찾을 수 없을까? 행간의 의미 하나하나까지 사려 깊게 고민했을 역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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