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성장의 유혹 -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
스탠 콕스 지음, 추선영 옮김 / 난장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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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탠 콕스가 지은 "녹색 성장의 유혹"의 원 제목은 Sick Planet 이다. 출판사에서는 아픈 지구를 뜻하는 이 영어 제목을 직역하기보다는 0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녹색 성장"이라는 단어를 책 제목에 넣고 싶은 유혹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에 저자는 녹색성장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서 상당한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우리가 발딛고 사는 하나뿐인 행성 지구가 어떻게 점점 병들어 가고 있는지, 녹색성장이라는 조어에서 녹색과 성장은 왜 양립할 수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 스탠 콕스는 생태사회주의자이다. 맨 마지막 챕터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생태학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이다. 그의 전공인 식물 유전학이나 그가 근무하는 토지연구소에서 뭔가 평화로운 녹색의 빛깔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근데 왜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수많은 연구와 고민 끝에 자본주의는 결코 생태학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태학적 관심은 날로 성장하는 병원 산업의 이면을 들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의료산업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진료가 곧 이익인 체계에서는 종종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환자로 규정된다. (본인이 하지불안 증후군, 과민성대장증후군, 주의력 결핍장애, 성기능 장애라고 느껴진다면 진짜로 환자의 수준인 지는 의심을 해 봐야 한다.) 엄청난 고가의 의료 장비는 필요없는 사람들에게도 그 장비를 이용한 진단을 강요할 수 밖에 없다. 과열된 의료 산업은 자원을 낭비하고 쓰레기를 양산한다. 제약회사는 규제라고는 없는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약을 제조하고 쓰레기를 방출한다. 이 모든 것이 '이윤'을 위한 하나의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 녹아 있다.

의료 산업의 본령은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 속의 의료 산업에서 인간의 행복과 건강은 뒷전이다. 그저 의료 산업계의 종사자 및 투자자들의 행복과 그들의 재정의 건강만이 중요할 뿐이다.

 

농업과 먹거리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작은 농장 주인들이 목재 건물 앞에 펼쳐져 있는 잔디밭에서 가족들과 즐기는 목가적인 풍경은 이윤이 우선인 현재의 농장의 풍경과는 걸맞지 않는다. 이제 농업은 공장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합성비료의 과다한 사용과 농약의 사용 등으로 농산물 자체의 오염은 물론이고, 수질오염과 대기오염 등을 일으켜 환경파괴가 지속되고 있다. 항생제가 남용된 고기와 유전자가 변형된 곡물들은 꾸준히 사람들의 식탁으로 올라 온다.

 

하나뿐인 지구의 한정된 자원들은 낭비되고, 낭비된 자원은 처리 곤란한 쓰레기로 남는다. 이 모든 것은 '성장'과 '집중'이라는 자본주의의 주된 테마의 산물이다. 집중은 효율을 낳고, 효율은 성장을 낳게 된다. 그러나 집중된 모든 것은 부작용을 낳는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특정한 위험에 전체가 노출된다.

예를 들어, 질소를 토양에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화학비료를 활용한 대규모 농업은 특정지역에 집중되어 관리 될때 일시적인 효율을 낼 수 있다. 매년 54만 4000톤의 살충제(미국의 경우)를 뿌리기에 용이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공장식으로 생산된 곡물들을 운반하는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 사람들은 결국 유해한 먹거리를 그다지 싼 가격으로 먹을 수도 없게 되며, 그에 따른 환경오염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계산한다면 비효율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기적 이윤 이라는 목적을 위해 저질러지는 비효율과 불합리를 들춰내고 있다. 그러나 그 전개 방식이 다소 산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산만한 전개로도 이윤에 대한 욕심을 기반으로 한 경제 성장은 어떠한 논리로도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과 환경을 유지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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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추천해주셨던 간디의 물레를 읽고, 녹색 성장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말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아요. 뭐, MB 들어서고나서부터는 여실하게 드러나긴 했지만요.
 
흐름을 꿰뚫어보는 경제독해 - 가장 한국적인 시각, 가장 현실적인 시점에서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바라본 최초의 책!
세일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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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흐름을 꿰뚫어보는 경제독해"는 매우 친절한 책이다. 책이 경어체로 작성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친절의 이유는 아니다. 친절하려면 그 분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친절을 베풀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세일러다. 물론 필명이고 꽤나 유명한 인터넷 경제 논객이라고 한다. 지난 번에 읽은 SDE의 '공황전야'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는데, 세일러라는 분의 생각이 좀더 거시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본명으로 책을 저술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세일러의 경제 독해가 다른 분들의 책과 가장 차별화 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신용창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자세하게 들어보니 고등학교 때 정치/경제라는 과목에서 배운 한도막임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맥락없이 나열된 그 신용창조라는 과정이 실제 경제에서는 작용하고 있는지를 저자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신용창조'의 신용은 빚의 다른 말이다. 은행이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된 유동성 창조의 수법인데,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논리적 혹은 도덕적 뿌리는 상당히 허약하다. 자본주의의 핵심이자 인체와 비교할 때는 '피'로 생각되는 '돈'이 돌아다니는 방식이 이렇게 허약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은행업이라는 것이 호시절에는 땅짚고 헤엄치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불황기에도 심장이 멈추면 결국 다 죽는다며 세금으로 메워주니 불황도 그다지 나쁠 것이 없다.

 

뱅크런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은행에 가서 내가 맡긴 내 돈 달라면 은행이 망한다는 것. 아니 맡긴 돈이 있는데! 왜 달라는데 못줘? 여기에 바로 신용창조의 기법이 들어있다. 월가에서 문제가 되었던 일종의 폰지사기와도 비슷한 논리라고 한다.

은행에 본원통화 5,000억원이 공급되면(누군가 예금을 했다면...) 은행은 법적 지불준비율 3.5%인 175억원만 남기고 4,825억을 다른 사람에게 대출할 수가 있고, 그 대출받은 사람이 4,825억원을 은행에 넣어 놓고 쓰게 될 때, 또 다시 3.5%만 떼어놓고 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한다면 5,000억원은 최대로 13조 7857억원으로 늘어나 세상에 유통되게 되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닥치고 신용경색이 우려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용창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시장에서 통화의 유동성이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SDE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원화와 같이 기축통화로 사용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사용하고, 정부가 대규모 재정적자를 내는 정책을 사용하게 되면 공포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친다고 경고했던 것에는 이 신용경색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선제적이고 무제한적인 달러의 공급을 이야기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신용경색의 이유이다.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지급준비율을 3.5%로 낮춰 잡아도 된다고 정했을 때부터 우리는 이러한 환상적인(?) 유동성이 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결국 돈이란 것도 통화량에 따라 가치가 오르내리는 것이다. 중국 작가가 지은 "화폐전쟁"이라는 책의 Currency란 구체적인 화폐가 아니라 통화량을 말하는 것인듯 하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이 통화량을 교묘하게 조절해 나가면서 제도권 내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그려낸 것.

 

이 책의 저자는 이 신용창조의 문제 뿐 아니라 한국 경제가 혹은 세계 경제가 당면한 여러가지 변수들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그 결과로 나타날 통화량의 정도 즉 인플레이션 혹은 디플레이션 상황에 대해서도 대응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도 친절하게....

 

('신용창조'에 대해서 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웠다면, 이런 문제의식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어야 하는 데, 현상은 알려주고 그것이 가진 함의를 이야기 해주지 않으니 그저 들어 본 정도로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교육은 사람들의 창의력을 억압하는데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정작 내가 그 피해자였다니! 이 기본적인 내용과 그 함의를 경제를 운영하고 있는 책임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텐데.... 그런 사람들은 제대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되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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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단련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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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치바나 다카시.

일본에 있다는 그 고양이 빌딩의 주인공.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저작을 내 놓는 것으로 유명한 괴짜 저널리스트.

그의 책 지식의 단련법을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내일이면 반납해야 해서, 이렇게 몇자 남겨야 할 것 같다.

 

그는 인지심리학과 뇌의 연구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인지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정보처리 기계라는 메타포로 바라본다.

Information Processing을 통해 뇌 속에 저장된 정보들이 서로 만나 화학작용을 거쳐 새로운 앎을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앎의 과정은 오묘하다. 왠만해서는 그 이해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정보처리 과정을 블랙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그의 빌딩은 일종의 블랙박스이다.

묘심 즉 고양이의 마음은 학자가 가져야할 마음자세라고 최재석 선생은 말하셨다.

호기심 어린 두눈이 반짝이는 그 검은 블랙박스의 노하우를 나름 정리한 책이 바로 이 지식의 단련법이다.

 

이 책은 1984년도에 씌여졌다. 조지오웰의 그 소설 제목.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최근 출간되었다는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

지금 회사에는 1984년 생이 꽤나 많으니 그 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번역되어 나왔다.

그 당시에 상상할 수 있었던 온갖 효율적인 정보의 입출력 방식에 대해서 쓴 이 책은 확실히 요즈음의 상황과는 맞지 않다.

초록 혹은 노랑 검색창에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고, 알찬 정보의 생산자들의 블로그에 RSS리더기를 연결해 놓으면 먹여주는 정보들....

그의 노하우인 튜브 스크랩북과 2공 펀치와 색인들은 마치 철기시대의 유물과 같이 보인다.

 

하지만, 철기 시대 인간들이 하루에 먹는 양보다 현대인이 먹는 양이 많으면 얼마나 많을까?

정보처리 기계로서의 인간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이 입력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시간은 똑같이 한정되어 있다.

정보의 절대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지만, 불량식품과 같은 쓰레기 정보량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절대적인 입출력 시간의 제한, 정보의 수집방법과 분류, 정보에 대한 태도와 윤리,

출력(글쓰기)을 위한 방법과 같은 실용적인 내용들에 대한 조언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정보처리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스며 나오는 (정보처리) 인간에 대한 통찰들까지....

 

다치바나 다카시의 최근작을 찾아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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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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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를 보면 기막한 장면이 나온다.

9.11 때 월드트레이드 센터에서 자원봉사하다가 폐가 망가진 사람들이 의료보호를 받지 못하자, 그들을 배에 태우고 관타나모에 간다.

메가폰으로 관타나모에 갇혀 있는 9.11 테러 용의자들의 의료보호는 잘 되고 있는지 묻는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물론 잘 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9.11을 위해 몸을 바친 사람들이 9.11을 일으킨 용의자들보다도 의료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밝히는 장면이다.

천재적인 장면 구성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를 읽기 전에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대답대로 의료보호를 제대로 받고 있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거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관심은 지식을 추구하게 되고, 지식은 더 큰 관심과 생각을 낳는 법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마비쉬 룩사나 칸이라는 마이애미 대학 로스쿨의 여학생은

"관타나모"라는 미국의 치부를 탁월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천부적 인권>이라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단어를 깊히 생각하게 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미국에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 수백명이 갇혀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 수는 전혀 미국에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온화한 의사, 염소치기, 잘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 등등)

단지 미국인이 걸어 놓은 엄청난 현상금 때문에 잡혀온 사람들이 많은데, 보통은 정당한 법적 절차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니다.

이역만리 타향에 잡혀와서 구속을 당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 대해 결백함을 주장할 만한 방법이 없다.

그런 중에 어떤 변호사들은 억울하게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 관타나모를 찾는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법률서비스를 살 수 있을까? 국가에서 돈을 대주는 것이다. (물론 변호사들이 만족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억울한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이해가 안된다. 자신들을 잡아 가둔 미국이 변호사들에게 비용을 대 줘가면서 그들을 변호하다니...?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법률적 안전판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도저히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법률 서비스에 아프가니스탄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인 여학생은 통역으로 활동하게 되고, 그 이야기가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늘이 내려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는 가지고 태어난다.

그 최소한의 권리는 인간 본연의 도덕과 상식, 사회적 제도, 법률 등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도덕, 제도, 법률 들이 정교하게 발달한 것을 보면, 역으로 그것들이 얼마나 자주 파괴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그 인권 파괴의 비합리적인 힘들이 여러가지 얼굴로 그려지고 있다. 

국가라는 권력, 전쟁, 종교에 대한 모욕, 고문, 뻔히 보이는 거짓말, 상식에 반하는 권위에의 복종, 책임회피, 은폐와 기만 등등

물론 "인권"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결실도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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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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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에도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도서전에 갔었다.

커다란 배너에 "온다! 리쿠!" 라고 써 있었다.

일본 소설가 온다 리쿠씨가 온다며 써 놓은 글귀다.

특정 상황에서 모두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만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는 유머를 본 듯한 느낌.

재치있다기보다는 용감하다는 면에서 공감이 간다.

꽤나 인기있는 작가인 것은 알았지만, 싸인을 받으려는 줄이 싸인회 부스를 뱅뱅 두바퀴는 감겨 있다.

마치 밤의 피크닉의 두 주인공이 보행제를 하듯이...

난 그녀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싸게 파는 책이나 더 뒤적여 보고 있었다.

문득 플래쉬가 터지길래 뒤돌아 봤더니 부스에 난 틈새로 온다 리쿠 씨의 뒷통수가 보인다.

살짝 몸을 틀어보았더니 옆얼굴도 보인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잘 안나왔지만.... 내 사진기에는 온다 리쿠의 '직찍'이 들어있는 것이다.

더구나, 친구 녀석은 밤의 피크닉은 읽을만 하던데... 라고 했다.

게다가, 이제 팔 만큼 판 "밤의 피크닉"은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에 팔고 있었다.

주문 했고, 왔다. 리쿠.

 

일요일 내내 밤의 피크닉을 읽었다.

읽는 내내 조금 닭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매력적인 두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낸 이야기이다.

보행제라는 행사를 통해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일로부터 얽힌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고 화해가 이루어진다.

세상은 사실 그렇게 쿨하지 않고 질퍽거리는데.... 고등학생들의 생각과 시선은 마흔 넘은 아주머니 작가 마냥 성숙해 있고, 쿨하다.

트렌디 드라마같은 이 소설은 영화로도 나왔을 것이다. (아무렴... 검색해 보니 있다.)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일본의 한자어들은 그 쓰임새나 사용빈도가 한국과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미묘하게 낯선 경험을 전해 주는 것 같다.

그 작은 차이가 일본 소설이 의도하지 않는 채 갖게 된 일종의 경쟁력은 아닐까? 

 

예를 들면, 일본에 진출한 야구선수 이승엽의 경기를 일본 해설자의 해설을 생각해 보자.

(일본어를 하는 야구광이 자막까지 넣었다.)

 

" 이슨요프 선수의 이번 호무랑(홈런)은 이전의 어떤 것과는 다르네요. 마음으로부터의 기백을 담은 호무랑이랄까요?"

 

기백이라는 말은 한국어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많이 쓰는 모양이다.

우리는 잘 쓰지 않는 그 단어를 알고 있다. 그 말이 쓰이는 것이 달라 뭔가 신선하게 여겨지는 듯 하다.

이런 낯선 단어가 주는 경험은 글(특히 소설)을 읽는데 중요하다. 정확히 쓰인 낯선 단어에는 힘이 실린다.

하지만 한국소설에서는 좀체로 이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낯설만큼 어려운 한국어 단어는 이미 이질적이다.

반면 서양의 단어들은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작지만 미묘한 쓰임새의 차이가 주는 낯선 즐거움. (정신물리학에서 말하는 JND(Just Noticeable Difference) ? :)

그렇지만 이러한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자칫 잘못된 번역체나 정확하지 못한 일본식 단어선택에 익숙해져 버릴 수도 있다.

(일본 소설을 탐독하며 자란 세대의 작가들의 소설이 나오면 검증가능할 것이다.)

 

월요일 밤에 정신이 제멋대로 피크닉을 다니고 있다.

이상 밑도 끝도 없는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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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20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밤의 피크닉은 좋았어요. ㅋㅋ 그나저나 온다! 리쿠에 대한 생각 ㅋㅋㅋㅋㅋ 카피제작자의 용기에 박수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