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희대의 희극인 찰리 채플린이 한 말이란다.

 

나도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인데...

스위스인가? 독일인가? 스위스에 가까운 독일인가? 독일에 가까운 스위스인가? 어쨌든....

길을 가고 있는데 고개를 넘으니 기막히게 아름다운 풀밭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와~ 이건...

여행사에서 사진작가의 협의도 없이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넣어 만든 홍보용 달력이 그대로 눈앞에 있다.

나와 친구는 배낭에 있던 점심거리를 바로 이 달력 속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성큼성큼 풀밭에 들어가서 판쵸를 넓게 펴고, 자리를 잡았다.

뜬금없고 운이 좋게도 전라의 여인이 끼어든다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이 되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본 풀밭은 그렇게도 아름다웠으나, 직접 들어 간 풀밭에는 똥이 많았다.

양이나 말, 개나 소 혹은 사람 따위의 포유류나 들쥐, 두더쥐, 가출한 집쥐,

산골짜기에서 소풍 온 다람쥐 따위의 설치류들이 싸놓은 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배낭 여행객이야 수퍼마켓에서 골라 배낭에 넣은 빵쪼가리와 요거트, 쥬스 등을 먹지만,

파리를 비롯한 수많은 곤충은 중식으로 널려있는 X을 섭취하려 저공비행 중이다.

게다가 경운기같은 것을 타고 길가던 농부 한 명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호통을 친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농부의 완고한 억양에 나와 친구는 서둘러 달력 속에서 빠져 나오고 만다.

 

서론이 길었다.

젊은 직장인 유재인씨가 지은 '위풍당당 개청춘'은 바로 이런 내용의 책이다.

아무리 스펙쌓기 경쟁을 해도, 구조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20대에게

직장생활이란 달력 속에 펼쳐져 있는 황홀한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풀밭에는 똥이 많은 법~!

"위풍당당 개청춘"은 달력 속 풍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똥, 똥파리의 저공비행, 농부의 호통 등)을 코믹하고, 기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책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풀어내는 방식은 아주 명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애잔하다.

답답하고 슬픈 현실을 명랑하고 코믹하게 그려내는 속에 애잔하고 짠한 분위기가 있는 복잡한 구조의 책이다.

그리고 직장생활에 대한 작가의 자세는 바로 내가 직장에 대해 가진 태도와 90%이상 일치한다.

난 이 책을 읽으며 행보다 행간에서 많은 공감을 했고, 내가 가졌던 '명랑'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반성도 많이 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20대라는 이유만으로 88만원 세대라는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작가는 직장을 잡기위해 여러 해 구직자로 애는 썼으되, 현재는 공사라는 일종의 가장 멋진 달력 풍경에 들어 와 있다.

'행정'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따분한 일상에 쩔어 있지만, 직장 생활이 주는 안락함 역시 선뜻 버리기는 힘든 상황일 것이다.

회사 생활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기본적인 자존심은 가지고 일하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접하는 진정한 88만원 상황에 처한 독자들은 작가가 얄미울 것이고, (아니, 좋은 대학나와서 공사 들어간 사람이?)

늙수그레 어르신들은 작가가 가진 무딘 현실 감각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남의 돈 먹기가 쉬워 어디?)

 

하지만,

이 책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는 직장생활이 사실은 구린내도 나고, 근본적으로 삶을 파먹는 비루한 구석이 있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어떤 일을 하건 안망하는 회사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만이 진리"라는 거짓이나 참인 듯 회자되는 상식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금융위기와 고용난, 청년실업문제 같은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다.

직장생활을 아름답게만 보는 젊은이들과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은 없는 것으로 보는 어르신들 사이에 낀 30~40대들은

근본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근본적인 삶의 형태를 고민하고 바꾸어 나가야 한다.

이 고달프고, 비루한 삶의 형태만을 미래의 세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굉장한 수준의 유머감각이 있고 (특히 여성들이 갖기 힘든 종목의 유머에도 탁월하다.), 매우 지적이고, 동시에 자유분방하다.

'행정'에 몰입하기에는 아까운 종류의 자질이 있다는 것이고, 그 자질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결국 뚫고 나왔다.(출판사에 의해 발굴됨.)

(비록 출판사는 이 책을 고민을 지닌 직장인들이 아닌 88만원 세대를 타겟으로 어필하는 마케팅적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행정'에서 벗어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더많은 공감을 주는 작품을 더 써 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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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4-1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런 책도 읽으시고. 의외십니다.
남의 블로그 글 읽는 기분으로 큭큭거리면서 읽다가, 공감도 하게 되고, 뭐 그런 책이었죠. ㅎㅎㅎ 저도 꽤 즐겁게 읽었었던. ㅎㅎㅎ

동녘새벽 2010-04-13 08:04   좋아요 0 | URL
ㅋ 작가와 작가 남편 블로그를 찾아냈다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