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과 현 실 과 금 지 와 저 항 과…….
허기(虛飢)나 몰아내려 아무렇게나 비빈 점심 밥그릇에 콩이 설걱인다. 유달리 매끈거리는 한 개의 콩을 집어내다 실패하기를 서너차례….. 얼굴까지 벌개지며 기어코 문제의 콩을 집어낸다. 젓가락 사이의 콩을 바라보니 입가에는 피식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렇게 문득 스틸 사진과 같은 삶의 단면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때면, ‘현실’이란 두 글자가 실체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현실’ 뒤에는 그림자처럼 늘어붙은 ‘꿈’이 숨쉬고 있다. 현실과 꿈은 이렇게 단짝 마냥 언제나 붙어 다니다가 일상(日常) 속에 환상(幻想)적으로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 현실과 꿈은 서로 뗄 수 없는 단짝이다. 꿈과 현실은 서로 다르지 않은 이형동체(異形同體)의 존재인 것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도 있지만, 극과 극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다른 것으로 확대해석하면 안된다. 양극단이라는 것은 동일한 컨티넘(continuum)을 가정한 말이기 때문이다. 본래 극과 극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정말 다른 것은….. 음….. 예를 들자면….. 음…….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하는 어린 누(gnu)와 조밀하게 지어진 아파트에서 사생활을 보호하는 버티컬 블라인드(vertical blind). 이런 것들이 정말 다른 것일게다.
에로스와 문명 – Marcuse ; 꿈과 현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꿈이고, 아폴론은 현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이드(id)는 꿈이고, 에고(ego)는 현실이다.
마르쿠제에게 에로스(eros)는 꿈이고, 문명(civilization)은 현실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사람들을 명료하게 해준다. 그래서 때로는 이분법이 갖는 엉성함과 전체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둘로 구분하기’는 유용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둘이 아니라던 꿈과 현실을 거친 기준으로 이간질 시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꿈은 폭발적인 생산성의 원천이고, 근원적 에너지다. 이것은 자유롭기가 기체와 같아서 잡으려해도 좀처럼 잡을 수 없고,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장난스레 유랑한다. 굳이 나누자면, 철학과 문학, 신화와 문화가 꿈의 영역이다.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 속성을 지닌 것들.
현실은 딱딱한 속성을 지닌다. 정적이고, 정제되어 있으며, 세밀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내맘같지 않게 엄격하기도 하고, 일의 성격이 강하다. 법과 도덕, 정치와 경제가 현실의 영역이다.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을 금지하고 안정을 원하는 속성을 지닌 것들.
어느 영역이 좋고, 어느 영역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꿈은 현실을 만드는 원동력이고, 현실은 새로운 꿈의 자료를 제공한다. 이 두가지는 적절한 긴장과 균형 속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꿈을 억압하는 것에서 현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네오-프로이디안이라고 할만하다. 기본적인 억압은 고삐 풀린 말의 힘을 유용한 노동력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날아다니기만 하는 것을 모아 결정(結晶)을 이루는 것이다.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대한 문화적 변용. 이것이 바로 문명의 발생이다. 이것이 계통발생이다. 그리고 개체발생은 이미 프로이트가 이야기 했다. id에 대한 억압이 만들어낸, 현실원칙을 따르는 ego . 다르지 않다.
문화가 갖는 금기적인 속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러나 마르쿠제가 말하는 억압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최소한의 억압을 ‘기본억압’ 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억압의 강도가 지나치다. 그것은 딱딱해 지기 쉬운 속성을 지닌 현실에 대한 자살 행위다. 지나치게 딱딱한 것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 딱딱한 것 같다.
공산당 선언 – Marx & Engels ; 꿈꾸는 것은 금지된다.
1848년 1월. 30세와 28세의 두 젊은이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결과가 ‘공산당 선언’이다. 이들의 꿈은 그 후 펼쳐질 현실에 막대한 동력을 제공했다. 그들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으며, 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들의 꿈은 여전히 중요한 듯 보인다.
1994년 20세의 젊은이가 그들의 꿈을 4500원에 엿보려 했을 때, 서점 직원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것은 금서(禁書)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또 다른 대형서점에서 20세 젊은이는 아무런 제지없이 ‘공산당 선언’을 구입할 수 있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과잉이라기 힘든 과잉억압이다.
꿈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지배자들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공고한 그들의 업적을 부정할 지도 모를 그런 자유로운 것. 하라는 영어공부나 열심히 하고, 군말 없이 현실세계의 듬직한 일꾼이 되어주면 참 좋겠는데,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꿈이라니…. 영 마땅치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주요 경계 대상은 야한 꿈이다. 단지 꿈인데 그것이 그렇게 위험할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어쨌든 장정일과 마광수 등 꿈꾸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꿈으로 인해 사법처리까지 받아야 했다. 현실의 가치로 꿈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의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 없고, 미숙해 보이는 Wet dream(夢精)일지라도….. 현실의 속성이 안정과 생존이듯 꿈의 속성이 자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조금 과하다 싶어도 말이다.
형성된 현실이 자기 방어를 위한 노력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쁘지 않다. 문명은 본래 이런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이다. 지금 꿈은 현실에 비해서 터무니 없이 평가 절하되고 있고,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권력과 지성인 – Said ; 금지된 것을 꿈꾼다.
사이드에게 지성인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권력은 현실이다.
지성인은 좀더 독창적이고 세련된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드는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의 금지와 회유에도 꿋꿋하게 꿈꿀 것을 촉구한다. 꿈꾸는 자의 역할은 현실에 활력을 주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독특한 꿈을 생산해 내는 것이지 현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많은 지성인들은 현실을 위해 권력에 흡수 고용되어 현실을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구애됨은 꿈의 본질을 망각한 것으로 이것들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꿈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것에 대한 의심, 빈정거림, 저항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바타이유가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 또는 철학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고 <에로티즘>에서 말했던 것 처럼……
꿈은 끊임없이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언제나 자기 파멸적이다. 꿈은 늘 새로워야 하고, 저항적이어야 한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억압으로부터 꿈의 가치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간질된 꿈과 현실을 다시 화해시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니다. 꿈이 위축되면 곧바로 현실은 저열해지고 만다. 활기없고, 딱딱해서 썩어가는 환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을 위해 꿈을 꾸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기능을 한다.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니기에 그 가치는 동등하다.
꿈꾸는 망아지들이 고삐를 풀고 자유롭게 더욱 자유롭게 뛰어다니다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
*에로스와 문명, 마르쿠제, 김인환 역 ;
프로이트 이론을 철학적, 사회적으로 연구한 책. 프로이트를 20여년 꾸준히 읽으셨다는 김인환 선생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여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엥겔스 ;
마르크스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읽혀진 고전으로 길지않은 분량과 친절한 해석, 원문이 같이 들어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권력과 지성인, 에드워드 사이드 ;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3년 영구 BBC의 리스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지성인의 구속되지 않는 역할과 태도를 강조한 이책은 올바른 지성인의 표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2003년에 돌아가신 이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