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을이다 - 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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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 선생의 칼럼집, <다시, 마을이다 - 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 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근대적 사고 방식이 지배하는 딱딱하고 남성적인 문화 속에서 커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말이다.

 

이 칼럼집은 조한 선생이 기고한 여러 매체의 글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 내용은 거의가 비슷비슷하여 약간 실망스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 일관된 반복을 통하면 저자의 생각은 마치 많은 연필 터치를 통해 만든 소묘처럼 시각화 된다.

이 소묘 속의 여인은 오늘과 같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인가? 생각해 보니 참 딱하기도 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이자 세련된 취향을 선보이는 '조한'에게는

독선적이고, 마초적이며, 공공성에 대한 철학이라고는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신자유주의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도 한참 돌리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종의 재앙일 것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저자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몰취향의 도시에서 '마을'을 외친다.

자발적 참여와 소통이 모여 즐거움되고, 이를 통한 '관계'의 회복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다.

대안 학교인 영등포의 '하자 센터' 아이들의 성장 경험들과

'성미산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공성에 기반한 행복찾기에서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야기하려 하는데,

난데 없이 돌아 온 개발 독재시대의 가치가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린 셈이니 말이다.

 

아래는 아직 본격적인 재앙이 닥치기 전인 2003년의 글이다.

 

인간의 탄생은 축복만은 아니며,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인연이 있다고 해서 꼭 맺어지는 것이 아니며 삶은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삶은 항상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

끝없는 발전과 확장을 믿고 살아온 그간의 역사는 얼마나 폭력적이고 허무한가?

터무니 없는 낙관주의는 또 얼마나 많은 불행을 낳고 있는가?

 

근대의 끝머리에 선 인류는 이제 '지속가능한 생존'의 방식을 찾아 나선다.

'지금'이 중요하고, 살아 있는 존재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며, 태어날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130~131페이지.

 

울리히 벡이 말했다는 '위험사회'의 한 구석에서

조한혜정 교수를 비롯한 모든 '문화적 인간'들이 모여 심심한 위로의 공동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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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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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 놓고 있는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의 두 책을 읽었다.

 

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번재 책인데, 박권일씨와 공동작업을 했던 앞선 두 책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보다는 짜임새와 정성, 분량이 아쉽다. 박권일씨는 결코 앞선 두책에 무임승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3국이 처한 경제적 상황이 평화를 유지하기에는 만만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일단 자원의 희소성과 그로 인한 에너지 문제들이 동북아시아의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나 중국, 일본의 경제체제는 굉장히 에너지 소모적인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형태가 아니다. 이러한 결핍은 외부 식민지에서의 수탈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와 다름아니다. 우리나라는 50년 전에 헤어진 반쪽인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러한 기회는 중국과 일본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는 자원의 희소성에 기초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국제정치학에 미칠 시나리오는 왜 우석훈이 혹자로부터 '공포경제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알게 한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경제체제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형태로 혹은 그런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오랜 역사속에서 켜켜이 쌓여있는 민족주의가 이런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다.

평화라는 공공재를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시킬 것인가?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좀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담고 있다. 동북아 평화경제학이 우석훈씨가 말하는 것 처럼 우리나라 10대들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조금 시간차가 있는 주제(물론 그 준비는 지금부터 시작해도 모자르지만...)라면,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대운하'를 비롯한 개발지상주의에 찌든 대한 민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대운하는 극소수의 이기주의만을 대변하는 너무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에 불과했지만, 현대건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체계적인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분석은 독자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든다.

 

일단 반도국가 대한민국의 경우 해안과 인접한 부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 50여년 동안 개발을 했고, 그 개발주의의 힘이 이제 내륙으로 흐르기 시작한다고 한다. 물론 그 내륙개발의 다른 이름은 대운하이다. 놀라운 것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개발정책들이 환상적인 조감도 한장으로 의사결정된다고 하는 그의 주장인데... 불행하게도 나는 이 내용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이 경제적인 합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정을 깔고 있는데, 사실 이런 '경제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상식'에 의한 판단인데, 여기에서의 상식은 경제이성처럼 아주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쌓아온 일반적인 지식체계를 의미한다. 주관적인 진실 정도랄까?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상식에 의한 결정도 자기의 전문분야가 아니면 동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미학적 차원에서의 경험이다. 유람선이 떠다니는 잘 정돈된 대운하 조감도 같은 것. 저자는 이것을 건설미학이라고 부른다. 뭐 디자인이 모든 것이라는 세스 고딘의 마케팅 메시지를 떠올린다면 실상 그렇다. 그런데 우리 나라 특유의 직선적인 건설미학은 너무도 그 질이 낮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성이나 효율성에 있어서도 무지하다. 청계천이 바로 그 아이콘이며, 어항이라고 불리우는 이 가짜 하천은 피상적인 수준에서 국민들을 어필했고, 이제 억지로 끌어오는 물길의 첫 자리에서 촛불시위가 진행중이다.

 

요즈음 읽은 또 다른 책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식인 그래프를 그렸다. x축은 좌파와 우파, y축은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다. 이 그래프에서 우석훈은 좌측 탈민족주의 좌표 어딘가에 생태주의라는 흐름 속에 묶여있다. 그렇다면 직선적인 건설미학에 대항할 흐름은? 그렇다, 바로 생태미학이다. 생태학이 갖는 경제적 가치와 지속가능성, 공공성, 연대성, 작은 것에 대한 지지.... 이러한 창조적이고 유연한 생태미학이 직선적인 건설미학을 대신할 가치라고 부르짖는데 아직 저자의 그 생태미학은 상상도에 그치고 있다. 물론 이 상상은 한사람이 할 것은 아니다. 생태적 자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할 숙제이다. 미뤄서는 안될... 안해서는 손바닥 세게 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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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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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 Mission 10만 달러 - 대한강국의 길 : 매일경제 대한강국 프로젝트팀.

 

위 두권의 책은 신문사의 특별프로젝트 팀이 펴낸 책이라는 점을 빼고는 닮은 것이 하나도 없는 책이다.

신문기자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지은 책들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은 87년 서울 항쟁이후 쟁취한 정치적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반추해 보는 기획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외부필자들의 적절한 활용, 균형잡힌 시각 등 무엇하나 나무랄 곳이 없다.

이 프로젝트 팀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지식인들의 표상이 바뀌었고, 지식이 전문화 대중화 되면서 지식인이 위기를 맞은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시민운동/정책지식/학술진흥재단과 미국/대중지성 등 2000년대 한국 지식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짚어 나간다.

 

짐작하는 대로 문제는 신자유주의 광풍 아래 지식인들이 자본의 자기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들도 있지만 핵심은 그것이다. 아는 것이 힘인 만큼 지식인은 대체로 힘이 있다. 과거 정치권력에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을 때, 지식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힘으로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고, 어느 권력에도 흡수고용되지 않고 독자적인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식인들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크고 거대한 형태에서 점차 일상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정치적 권위주의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늙수그레 할배씨들이 포진해 있지만, 이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보톡스를 아무리 맞아도 죽어갈 것이다.

 

그런데 더 무서워진 것은 신자유주의의 체제의 경제권력이다. 이제 지식인들은 그 지식의 경제적 효용만을 가지고 돈을 쫓는다. 공적인 차원에서 사적인 차원으로 지식은 사유화되고 지식인은 민영화 되었다. 승자 독식의 시장에서 마케팅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가진 지식을 포장하고 기득권에 봉사한다. 앞서 말한대로 지식인은 힘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힘은 사회의 균형을 맞추고, 신자유주의적 매정함을 비판하는데 쓰일 수도 있지만... 힘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환경이라면 대체로 돈과 명예, 지위, 권력 등을 갖는 쪽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에서 보이는 미국 박사들에 의존한 한국 지식의 재생산 체계는 끔찍한 수준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지은 그 장하준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교수를 하려고 했다가 영국 박사라는 이유로 임용에서 떨어지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잡지의 에디터인 그를 "3류 잡지 편집자가 어딜...." 했다는 기존 교수의 시각은 정말 호러블하다. 경제학에서의 시카고 학파 소위 '시카고 보이스' 들은 자유주의의 시각을 대표하는 바로 그 주류 경제학이다.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얼마전 정년 퇴임하면서 마르크스를 가르키는 교수는 없다고 한다. (내 전공인 심리학 분야도 비슷한 처지다.)

 

그럼 미션 10만달러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전형적으로 기득권자들의 힘에 붙어먹는 시각으로 쓰여진 책이다. 어찌 보면 우석훈의 평화경제론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정확하게 반대편 대척점에 서있는 책인데... 그야 말로 촌놈들이 1인당 국민소득 10만달러의 대한강국을 목표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자는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쓰여졌다.

 

한마디로 경제에 있어서의 모든 규제는 잘못되었고,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잔인한 골자다. 평화롭게 굽이쳐 흐르는 물길을 직강화하고 모든 강물을 개방해서 물살을 거세게 만들자는 것이다. 작은 물고기들은 물살에 떠내려가든 말든 큰 물고기 몇마리는 살아남자는 것이다. 규제의 예는 정말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규제들일 뿐이다. 규제가 있다는 것은 어떤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다. 그 규제가 왜 생겼는지 따져보는 자세는 필요없고, 무조건 규제는 나쁜 것이라고 강변한다.

 

사회심리학에는 Inoculation 이론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일종의 예방 접종하는 것인데,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에 반하는 주장들을 소개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생태학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생태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도널드 베일리 같은 환경낙관론자들의 주장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예방접종을 맞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나중에 환경낙관론을 접했을 때 훨씬 강한 면역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배신감을 느끼고 변절하는 골수주의자들의 경우는 대체로 이런 inoculation과정이 없었을 때 일어난다.

 

미션 10만달러는 대표적으로 예방접종이 없는 일방적인 주장들의 남발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용인된다. 북한을 식민지로 삼아 착취해야 한다(남북경혐이라는 이름이지만...)고 버젓이 이야기 한다. 속도와 힘에 취해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에 대한 고민은 없다. 아니 이 경제신문 기자들의 삶의 의미와 행복은 아주 단순히 1인당 국민 소득 10만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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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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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혁범 교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이다.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그는 우리 사회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남성주의와 민족주의, 국가주의, 군대문화 등등을 배격한다. 다수의 횡포에 의해 억압당하는 소수의 입장에서 자유의 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라는 책은 여러가지 자유의 모습 중에서 여성주의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 본 글들을 모은 것이다. 건강때문에 몇 년동안 고생했다고 밝혔듯이 출간년도(2006년)보다 한참 늦은 사례들이 약간 진부할지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읽다가 느낀 불편함이 생각난다. 그렇지만 권혁범의 책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나도 남성이고 권혁범도 남성이기 때문일까? 냉정하게 분석하면 정희진의 책은 뭔가 탄탄한 논리보다는 언어적 사례의 나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언어는 사고를 표현하면서도 규정하는 속성을 가졌기에 중요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 수준이 다소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 반면 권혁범의 책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기제들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권혁범의 책이 엄청난 깊이의 이론서는 아니다.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들의 모음이다.)

이 불편함의 차이가 남성이 가진 여성주의와 여성이 가진 여성주의의 차이일까? 남성과 여성이 설득하는 혹은 설득되는 방식이 서로 다른 차이일까?

 

내게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페미니즘 그 자체보다는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 것도 사실이다. 저자 권혁범이 가진 자유에 대한 관점을 지지한다. 앞에 '신'이라는 글자가 하나 붙었는데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이렇게 다를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어이없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는 힘을 가지고 억압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말하는 자유이고, (권혁범의) 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에서의 남성중심주의는 신자유주의와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유라기보다는 전횡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힘을 가지고 있는 기존 체제가 갖는 공고함은 무섭다. 그것은 그 세계의 게임의 룰이기 때문이다. 남성주의가 강한 조직에서 성공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남성적이고 권위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세계의 게임의 룰을 받아들여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그 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몇배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게임의 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많지 않다. (남성적) 권위를 포기할수록 권위가 생기는 새로운 세대의 게임의 룰은 과연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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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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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1966년 소설 <침묵>을 읽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떠올리는 것과 같이, 내게 있어 일본 소설은 "일상의 가벼움"을 떠오르게 해왔다.

하지만 소설 <침묵>은 그 조건반사의 연합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대단한 소설이다.

심연과도 같은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 속의 굳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갈등이 <침묵> 속에 있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주인공들이 처한 처절한 갈등 상황이 내 현실이 아닌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소설이 주는 최고의 미덕이다.

(가장 안전한 탈 것을 타고 가장 고약한 볼 것을 보는 느낌이랄까?)

 

인간은 나약하다. 전지 전능 완벽하게 지혜롭고 완벽하게 강하다면 그것이 바로 신이다.

다른 한편 인간은 강하다. 나약함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포르투갈의 신부가 1600년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겪게 되는 이 이야기는 인간과 신 사이의 믿음을 주제로 한 묵직한 소설이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추호도 의심이 없는 단 하나의 상태.

하지만 인간은 나약해서 믿음의 상태를 지속하기가 힘들다. 아주 작은 틈새로도 흘러드는 의심 때문이다.

신부 로드리고는 신을 믿는 인간이 난처한 상황을 겪게 되었을때, 침묵하는 신을 원망한다.

여기서 난처한 상황이란, 고문에 의해 배교를 강요받는다거나,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일본인 신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극도의 갈등상황이다.

 

믿음의 대상을 형상화한 그림을 발로 밟고, 침을 뱉고,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침묵하는 신.

그 믿음을 갖게하는 수단이자 그 믿음의 목적인 '사랑'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신부.

 

엔도 슈사쿠는 이 무지막지한 상황을 설정한 후 에둘러 가거나, 값싼 반전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난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라는 상황에 감사하고, 내 속에 있는 나약함을 대면하고, 소설 속의 갈등상황에 가슴 조렸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내밀하고 섬세한 성찰에서 비롯된 

종교적 감성이 갖는 힘은 실로 대단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많은 것을 용서하게 하고, 많은 것을 인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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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2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내 상황이 아닌게 정말 고맙죠. 저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ㅎㅎ 소설가 이승우씨가 이 책을 읽고 기치지로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세요....(라는 말밖에 드릴 방법이. 복사...라도 해드려야되나? 라며 말꺼내놓고 책임감을 ㅋ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2-2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회고록도 재밌습니다.가톨릭 계열 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은데 저자가 어릴 때 만주에서 살던 시절의 일화가 흥미롭더군요.평론가들은 유럽의 가톨릭 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가로 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