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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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 놓고 있는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의 두 책을 읽었다.

 

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번재 책인데, 박권일씨와 공동작업을 했던 앞선 두 책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보다는 짜임새와 정성, 분량이 아쉽다. 박권일씨는 결코 앞선 두책에 무임승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3국이 처한 경제적 상황이 평화를 유지하기에는 만만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일단 자원의 희소성과 그로 인한 에너지 문제들이 동북아시아의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나 중국, 일본의 경제체제는 굉장히 에너지 소모적인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형태가 아니다. 이러한 결핍은 외부 식민지에서의 수탈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와 다름아니다. 우리나라는 50년 전에 헤어진 반쪽인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러한 기회는 중국과 일본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는 자원의 희소성에 기초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국제정치학에 미칠 시나리오는 왜 우석훈이 혹자로부터 '공포경제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알게 한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경제체제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형태로 혹은 그런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오랜 역사속에서 켜켜이 쌓여있는 민족주의가 이런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다.

평화라는 공공재를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시킬 것인가?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좀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담고 있다. 동북아 평화경제학이 우석훈씨가 말하는 것 처럼 우리나라 10대들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조금 시간차가 있는 주제(물론 그 준비는 지금부터 시작해도 모자르지만...)라면,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대운하'를 비롯한 개발지상주의에 찌든 대한 민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대운하는 극소수의 이기주의만을 대변하는 너무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에 불과했지만, 현대건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체계적인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분석은 독자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든다.

 

일단 반도국가 대한민국의 경우 해안과 인접한 부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 50여년 동안 개발을 했고, 그 개발주의의 힘이 이제 내륙으로 흐르기 시작한다고 한다. 물론 그 내륙개발의 다른 이름은 대운하이다. 놀라운 것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개발정책들이 환상적인 조감도 한장으로 의사결정된다고 하는 그의 주장인데... 불행하게도 나는 이 내용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이 경제적인 합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정을 깔고 있는데, 사실 이런 '경제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상식'에 의한 판단인데, 여기에서의 상식은 경제이성처럼 아주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쌓아온 일반적인 지식체계를 의미한다. 주관적인 진실 정도랄까?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상식에 의한 결정도 자기의 전문분야가 아니면 동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미학적 차원에서의 경험이다. 유람선이 떠다니는 잘 정돈된 대운하 조감도 같은 것. 저자는 이것을 건설미학이라고 부른다. 뭐 디자인이 모든 것이라는 세스 고딘의 마케팅 메시지를 떠올린다면 실상 그렇다. 그런데 우리 나라 특유의 직선적인 건설미학은 너무도 그 질이 낮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성이나 효율성에 있어서도 무지하다. 청계천이 바로 그 아이콘이며, 어항이라고 불리우는 이 가짜 하천은 피상적인 수준에서 국민들을 어필했고, 이제 억지로 끌어오는 물길의 첫 자리에서 촛불시위가 진행중이다.

 

요즈음 읽은 또 다른 책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식인 그래프를 그렸다. x축은 좌파와 우파, y축은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다. 이 그래프에서 우석훈은 좌측 탈민족주의 좌표 어딘가에 생태주의라는 흐름 속에 묶여있다. 그렇다면 직선적인 건설미학에 대항할 흐름은? 그렇다, 바로 생태미학이다. 생태학이 갖는 경제적 가치와 지속가능성, 공공성, 연대성, 작은 것에 대한 지지.... 이러한 창조적이고 유연한 생태미학이 직선적인 건설미학을 대신할 가치라고 부르짖는데 아직 저자의 그 생태미학은 상상도에 그치고 있다. 물론 이 상상은 한사람이 할 것은 아니다. 생태적 자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할 숙제이다. 미뤄서는 안될... 안해서는 손바닥 세게 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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