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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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뇌! 그 궁극의 신비


 

 포만 중추가 손상당해 두 배는 뚱뚱해진 비만쥐와 공기분사와 순막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학습한 토끼가 뿜어내는 특유의 냄새가 가득한 '쥐방'옆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베르베르의 「뇌」는 읽지 않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마치 '최후의 비밀'과 같은....


 
 그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읽어 본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은 왠지 손이 가지 않는 심술중추가 활성화되었을까? 아니면 영어식 발음으로 하면 "버나드 웨버" 정도로 발음될 박박머리 작가가 프랑스에 태어나서 얻게된 경쾌한 운율의 이름이 그를 과대포장했다고 여긴 헛된 상상 때문이었을까?

 
 베르베르는 천재는 아니었다. 그 해박한 지식을 끌어와서 배치하는 것은 흥미로웠지만, 그는 타고난 글쟁이는 아니었다. 울창한 지식의 숲을 안내해주는 지식가이드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가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물어오는 철학적인 질문들이 쳇바퀴 도는 듯한 회사생활에 익숙해진 회사원에게 각성제처럼 날카롭게 다가왔다.

 
 뇌는 아직 신화의 세계이다. 과학으로는 뉴런 수준에서 이해되거나 추상적인 가설들로 연구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니까 말이다. 포탄 연기 자욱한 전쟁터에서 실려들어오는 두개골 열린 피투성이 환자들의 뇌에 의해 고무된 생리학자 펜필드가 연구할수록 불가지론자로 변해버린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더구나 그 의식이란 것은 더욱더 설명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테나 여신의 도움과 함께하는 신화 속의 오딧세우스의 이미지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뇌는 언제까지 신화의 영역으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는 또 다른 의문이다.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하자(이 역시 사기라는 문제제기가 있기는 했지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그저 적막한 광물덩어리로 변해버렸듯이... 뇌도 언젠가 그 모든 신비의 옷을 벗어내고 하나의 살과 핏덩어리로 변하고 말까? 실제로 이 시대는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을 통해 항우울제를 만들고, 광인의 병이라 불렸던 간질을 완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듯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물음들이 가득한 이 책은 내게 있어서 나름대로의 쾌락을 제공한 신선한 자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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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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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이 낳은 얇은 책

 얼마전 별로 재미도 없는 두꺼운 책을 한권 빌려갔던 후배 녀석이 느즈막히 그 책을 돌려주며 내민 책은 황지우 시인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란 시집이었다. 이 책날개에 쓰인 시같기도 하고 편지같기도 한 녀석의 네 줄의 인사말.

두꺼운 책이 낳은 얇은 책
여러 가지로 고맙구요
진지하게 놀고
재미나게 일하기를 바랍니다.

 마침 시험 때라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도서관에 앉아 전공서적을 보고 있었는데, 오금이 저리고 하품이 날 때나 집중이 잘되어 몇 장을 빨리 넘기고 너무 일찍 찾아온 뿌듯함에 가벼운 흥분이 일 때, 즐기지도 않는 커피나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핑계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난 나의 이 진득하지 못한 엉덩이에 진정제 주사라도 놓듯이 이 시집의 시를 한편씩 읽었다. 이런 방식은 꽤나 효과적이어서 오랫동안 꿈쩍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신적 진정제에도 내성이 생기고, 중독이 생기는지 난 곧 ‘공부하기’와 ‘시읽기’ 사이에 일어난 ‘주객전도’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시를 읽고는 시집을 덮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뭐 이래?”


 물론 비난의 소리가 아니다. 그의 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는 이런 자연스러움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시(詩)로 사유해야 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통과하면, 시어 (詩語)같지 않은 말들이 시가 되고,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상황도 시로 변한다. 아마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시고, 시 자체가 삶인 듯 하다. 

 이 시집에는 결핍과 그것에 따른 고통이 가득하다. 살아있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이 모든 결핍에 대한 근원적인 온갖 고통들이 시(詩)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종교적인 감성으로 이 고통들을 끌어안고 보다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인간적인 솔직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 어떤 것으로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오랜 고심 끝에 기꺼이 인정한다. 아주 솔직하게 말이다. 외롭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그의 시!

 난 때때로 이 시집을 꺼내 든다.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인 양 새로운 시(詩)들이 고맙고, 이 시를 지은 시인이 고맙고, 이 시집을 소개해 준 후배녀석이 고맙다. 물론 시험 결과는 그저 그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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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의 시 95
김언희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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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흩어버리기’ 실험의 결과 보고서

 

 중세의 한 음습한 시골 마을 성의 주인은 봉건 영토를 돌보지 않는 마법의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여기 저기 부글부글 끓는 비이커와 시험관. 그 속에 담긴 노랗고 파란 것들이 끓고, 마법사는 시커먼 무쇠 항아리에 박쥐의 발톱, 사자의 눈썹, 지렁이의 환대 같은 것들을 집어 넣는다.

 아직 야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개는 연신 으르렁 거리고, 여기 저기 기괴한 초상화 들이 걸려 있는 거대한 성.

 

 2000년 한국에도 이에 못지 않은 분위기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언희’이다. 물론 이 사람의 작업실은 그다지 음침하지 않은 고층 아파트일 수도 있고, 이름 모를 약품들이나 재료들은 없다.

 그녀의 실험은 말이라는 추상의 재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언희’라는 이름은 필명이 아닐까? 물론 그 뜻은 말(言)을 놀린다(戱)는 뜻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성립되어 있는 언어의 질서를 바탕으로 살아가는데 작가는 온갖 말들을 이렇게 희(戱)하고 저렇게 롱(弄)한다. 그 재미있는 여러 가지 놀음 중에서 잔인하고 성(性)스러운 방향의 극단으로 흐른 것들을 한데 모아 내어 놓은 결과물이 바로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이다.

말을 흩트려서 말의 질서를 와해시키고, 이에 화난 말들은 독자들의 가슴 속을 질주하여 어지러운 말발굽들을 남긴다. 파격이 주는 감흥은 언제나 독특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게 떨린다. 그런데 문득 예전에 생각해 놓은 퀴즈가 떠오른다.

 

 Q –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선물은?

 A – 1. 찢어진 채 돌아온 연애 편지

      2. 사람의 목이 든 채 배달된 상자.

      3. 야광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성모 마리아상.

      4. 가장 재미있는 야구시합 구경 중에 날아든 입영 통지서.

 

 짐작대로 말하고 싶은 답은 3번이다. 연애편지야 시간이 가면 해결될 듯 하고, 상자는 신고하거나 버리거나 하면 되고, 입영통지서가 왔더라도 그 시합은 마저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야광으로 만들어진 마리아 상은 그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끌 때 마다 언제나 나타나 불완전해서 인간인 인간의 그 불완전함을 준엄하게 노려볼테니까말이다. 게다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철저한 파괴와 자극적인 언어의 실험은 강렬한 자극을 주는 데는 성공적이나 진정으로 강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유된 말의 질서 속에서 일상어를 사용해서 주는 감동은 지속적이고, 그 만큼 힘든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파괴적 언어 행위는 분명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극단으로의 체험은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주고, 다양함을 부여하기도 한다. 만약 유쾌하진 않으나 독특하고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집을 다시 읽는다면, 시집 속에 뚫려있는 구멍과 널려있는 똥을 바를 정(正)자로 표시하며, 아니 이 시집에 어울리고, 이 시집처럼 상상하지 못할 의외의 팔진법 아닐 비(非)자로 세어가며 읽어보고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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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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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바람 속에서 부릅 뜬 빛나는 눈

“먼지 바람 속에서도 난 눈을 뜨고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룹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가사 중 한 대목이다. 혼란과 복잡함, 무질서한 변화 등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도 방향감각을 흩트리는 먼지바람이 가득하다. 이런 먼지 바람 속에서 눈을 뜨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난 얼마 전 이런 먼지 바람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 거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바로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이다. 학문적으로도 이미 가장 훌륭한 언어학자, 심리학자인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일을 바라보는데도 게으르지 않은 외계인 같은 사람이다. 특히 그는 냉전의 종식이후 마치 물이나 공기와 같이 당연해져 버린 소위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롭게 경쟁해서 이긴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억울하면 출세해라….”라고 한마디 하는 것을 세련되게 포장해 놓은 힘의 논리, 적자 생존의 논리이다. 물론 이런 경쟁적인 요소가 변화와 진보를 위한 원동력이 되는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힘의 논리의 맹점은 게임이 진행되는 법칙에도 이러한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한 예를 들면, 운동 경기에서 심판을 매수하여 이긴 편에서 “심판을 매수하는 능력도 힘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가장 저열한 수준의 힘의 논리가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논리가 근본적으로 이미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힘은 또 다른 힘을 낳고 그것은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한다. 보통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힘은 돈으로 나타나는데, 실제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돈과 힘의 편중현상은 과거에 비해 더욱 확실해 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여러 분야의 기득권층이 얽혀서 설계한 선전술과 같은 기만책에 의해 교묘하게 가려진다.
 
 빛나는 두 눈을 가진 촘스키는 이 책에서 절대강국인 미국이 저지른 중남미 등에서의 경제적, 정신적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WTO, NAFTA, MAU) 그러나 냉철한 촘스키의 분석 뒤에는 따뜻한 가슴이 느껴진다. 그가 진정으로 고발하는 것은 형식적인 제도의 맹점 뿐만이 아니라 한없이 추락하는 ‘사람의 가치’인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사람을 넘어서는 이윤(profit over people)’ 이다. 그는 이윤을 위해 다수를 기본적인 인간의 생활로부터 소외시키는 소수의 욕심과 그 책략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권력에도 흡수 고용되지 않고, 다수의 정당한 이익을 대변하는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를 보이는 촘스키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런 감동은 감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애틀에서 일어난 WTO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나 다자간 투자협정(MAU)을 저지시킨 사건이 그 예이다.
 

 이 즈음에서 이렇게도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라는 힘의 논리를 대하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한숨이 나온다. 선진국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사회 복지의 기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라는 논리가 미국보다 더욱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에 대한 의심없이, 소외되는 다수에 대한 배려없이, 모든 것을 가지는 소수에 편입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 같다. 이 방향 모를 질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먼지 바람 속에서도 눈을 떠야 할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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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수진 외 옮김 / 큰나무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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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세상, 뒤죽박죽 인간 ; 세기를 뛰어넘는 한 천재의 성찰


 

 “천재는 악필이다.”


 

 글씨를 못쓰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주 인용하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문득 "천재는 악필"이 아니라, "악필이 천재를 만드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줄에 맞춰 또박또박 쓰인 글씨에는 정형의 아름다움은 배어있으나, 파격과 일탈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다.

반면 삐뚤 빼뚤 쓰인 악필 사이로는 이미 존재하는 당연한 것들에 대한 의심과 자신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생각이 스며 들어가는 틈새가 보인다. ; 내가 생각하는 ‘천재’란 기존의 것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파괴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천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위의 논리를 따르면 그의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이 그를 천재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그의 이름과 달리 1800년대를 살다 간 사람이다. 그 시대는 인간의 이성(理性)이 가장 신뢰 받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은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이야기 한다.(그의 소설에는 언제나 일반적 기준에서 보면 반쯤 미친 사람들이 등장한다. 죄와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악령의 키릴로프,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 이런 생각은 한 세기 뒤에 인간의 집단적 광기가 표출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증명되었고, 이 사건들은 반이성주의, 실존주의 등에 영향을 주었다.

 
 세계대전 후에는 어떠한가? 기막힌 기획으로 자행된 테러행위나, 터무니 없는 욕심으로 인한 명분없는 전쟁과 그것으로 인한 빈곤과 고통. 돈이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고, 사람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도구의 도구가 되는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이성적인 세계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니 이렇게 큰 시대정신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서도 이런 생각은 유효하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일상은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사소한 감정적 기복에 더 크게 좌우되지 않는가?
작가는 ‘질투’라는 책에서도 이성적이지 않은 삶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묘지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의 기묘한 대화를 엿듣는가 하면(아마도 그의 섬망증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질투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나 크리스마스에 얼어 죽는 한 모자의 이상한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위대한 ‘이성의 힘’을 통해 인간은 좀더 긴 삶을 살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인간들이 축적한 훌륭한 지적 자산들도 이성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부정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이고, 인간의 삶도 마음도 뒤죽박죽이라는 것 역시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작가가 말하듯이 불완전한 인간은 영원한 "수정궁"(‘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밝혀지는 '수정궁'의 숨은 뜻은 이성으로만 돌아가는 차갑고 투명한 사회를 말하고, ‘죄와 벌’에서도 선술집의 이름으로 암시적으로 등장한다.)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씀이다.
 

--------------------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작은 단서 -----------------


 

 도스토예프스키 읽는 순서 : 지하생활자의 수기 -> 죄와벌 -> 악령 ->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
(‘백치’라는 소설은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죄와벌과 악령사이에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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