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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두꺼운 책이 낳은 얇은 책
얼마전 별로 재미도 없는 두꺼운 책을 한권 빌려갔던 후배 녀석이 느즈막히 그 책을 돌려주며 내민 책은 황지우 시인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란 시집이었다. 이 책날개에 쓰인 시같기도 하고 편지같기도 한 녀석의 네 줄의 인사말.
두꺼운 책이 낳은 얇은 책
여러 가지로 고맙구요
진지하게 놀고
재미나게 일하기를 바랍니다.
마침 시험 때라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도서관에 앉아 전공서적을 보고 있었는데, 오금이 저리고 하품이 날 때나 집중이 잘되어 몇 장을 빨리 넘기고 너무 일찍 찾아온 뿌듯함에 가벼운 흥분이 일 때, 즐기지도 않는 커피나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핑계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난 나의 이 진득하지 못한 엉덩이에 진정제 주사라도 놓듯이 이 시집의 시를 한편씩 읽었다. 이런 방식은 꽤나 효과적이어서 오랫동안 꿈쩍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신적 진정제에도 내성이 생기고, 중독이 생기는지 난 곧 ‘공부하기’와 ‘시읽기’ 사이에 일어난 ‘주객전도’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시를 읽고는 시집을 덮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뭐 이래?”
물론 비난의 소리가 아니다. 그의 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는 이런 자연스러움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시(詩)로 사유해야 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통과하면, 시어 (詩語)같지 않은 말들이 시가 되고,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상황도 시로 변한다. 아마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시고, 시 자체가 삶인 듯 하다.
이 시집에는 결핍과 그것에 따른 고통이 가득하다. 살아있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이 모든 결핍에 대한 근원적인 온갖 고통들이 시(詩)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종교적인 감성으로 이 고통들을 끌어안고 보다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인간적인 솔직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 어떤 것으로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오랜 고심 끝에 기꺼이 인정한다. 아주 솔직하게 말이다. 외롭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그의 시!
난 때때로 이 시집을 꺼내 든다.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인 양 새로운 시(詩)들이 고맙고, 이 시를 지은 시인이 고맙고, 이 시집을 소개해 준 후배녀석이 고맙다. 물론 시험 결과는 그저 그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