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의 시 95
김언희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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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흩어버리기’ 실험의 결과 보고서

 

 중세의 한 음습한 시골 마을 성의 주인은 봉건 영토를 돌보지 않는 마법의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여기 저기 부글부글 끓는 비이커와 시험관. 그 속에 담긴 노랗고 파란 것들이 끓고, 마법사는 시커먼 무쇠 항아리에 박쥐의 발톱, 사자의 눈썹, 지렁이의 환대 같은 것들을 집어 넣는다.

 아직 야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개는 연신 으르렁 거리고, 여기 저기 기괴한 초상화 들이 걸려 있는 거대한 성.

 

 2000년 한국에도 이에 못지 않은 분위기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언희’이다. 물론 이 사람의 작업실은 그다지 음침하지 않은 고층 아파트일 수도 있고, 이름 모를 약품들이나 재료들은 없다.

 그녀의 실험은 말이라는 추상의 재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언희’라는 이름은 필명이 아닐까? 물론 그 뜻은 말(言)을 놀린다(戱)는 뜻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성립되어 있는 언어의 질서를 바탕으로 살아가는데 작가는 온갖 말들을 이렇게 희(戱)하고 저렇게 롱(弄)한다. 그 재미있는 여러 가지 놀음 중에서 잔인하고 성(性)스러운 방향의 극단으로 흐른 것들을 한데 모아 내어 놓은 결과물이 바로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이다.

말을 흩트려서 말의 질서를 와해시키고, 이에 화난 말들은 독자들의 가슴 속을 질주하여 어지러운 말발굽들을 남긴다. 파격이 주는 감흥은 언제나 독특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게 떨린다. 그런데 문득 예전에 생각해 놓은 퀴즈가 떠오른다.

 

 Q –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선물은?

 A – 1. 찢어진 채 돌아온 연애 편지

      2. 사람의 목이 든 채 배달된 상자.

      3. 야광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성모 마리아상.

      4. 가장 재미있는 야구시합 구경 중에 날아든 입영 통지서.

 

 짐작대로 말하고 싶은 답은 3번이다. 연애편지야 시간이 가면 해결될 듯 하고, 상자는 신고하거나 버리거나 하면 되고, 입영통지서가 왔더라도 그 시합은 마저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야광으로 만들어진 마리아 상은 그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끌 때 마다 언제나 나타나 불완전해서 인간인 인간의 그 불완전함을 준엄하게 노려볼테니까말이다. 게다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철저한 파괴와 자극적인 언어의 실험은 강렬한 자극을 주는 데는 성공적이나 진정으로 강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유된 말의 질서 속에서 일상어를 사용해서 주는 감동은 지속적이고, 그 만큼 힘든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파괴적 언어 행위는 분명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극단으로의 체험은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주고, 다양함을 부여하기도 한다. 만약 유쾌하진 않으나 독특하고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집을 다시 읽는다면, 시집 속에 뚫려있는 구멍과 널려있는 똥을 바를 정(正)자로 표시하며, 아니 이 시집에 어울리고, 이 시집처럼 상상하지 못할 의외의 팔진법 아닐 비(非)자로 세어가며 읽어보고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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