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설의 살인
우치다 야스오 지음, 홍영의 옮김 / 초록배매직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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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게 살해된 개인 ; 그리고 그들의 입장

“당신은 누구시죠?”
이 난해한 질문은 개인과 집단이 갖는 밀접한 관계에 의해 더 이상 난해하지 않다.
“저는 **학교(회사)에 다니는 XXX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이용해서 쉽게 답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빙설의 살인’은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어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다. 특히 아주 거대한 관료집단(자위대, 군수업체, 경찰청)과 그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계획에 대해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집단의 속성과 그것에 반대하는 한 구성원이 등장한다. 물론 그 사람은 살해되고, 이 사건을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르포라이터 겸 탐정인 주인공이 파헤쳐 간다.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특유의 긴장으로 가득하다. 그 긴장은 집단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개인과, 개인에 의해 붕괴되지 않으려는 집단 간의 균형점으로 향해 있다. 이 절묘한 균형을 찾아내고 유지한다면 개인은 집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집단은 이러한 개인들을 동력으로 지속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체조선수나 씨름선수가 보여주듯, 균형을 잡아가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이렇듯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궁금하지만 풀리지 않는 미묘한 역동으로 계속되어 왔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집단은 그 구성원인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런 환원주의의 방식으로 바라보면 집단은 하나의 상징체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유용한 것 같지 않다. 집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듯이, 활발하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춘다. ‘집단은 어쩔 수 없는 괴물’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개인보다 강력한 상징인 ‘집단’에 대항하는 더욱 강력한 개인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달콤한 주제였다. 그 사람은 바로 영웅이고, 사람을 넘어서는 ‘수퍼맨’이다. 집단이 일종의 인간(法人)으로 존중받고, 그 규모가 더욱 커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상상은 더욱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비현실적일수록 그 상상은 더욱 달콤해질 것이다.

추리소설로서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내용 전개 방식을 가진 이 책에 그나마 호감을 갖는 이유는 그 종결부이다. 작가는 그 종결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고심한 것 같다. 그는 개인이 집단을 완전히 뒤엎는 패스트푸드처럼 느끼한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거대한 철옹성은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체념으로 소설을 끝내기도 싫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절충이 상업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와 타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암울한 상태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의한 불씨를 남겨두는 일은 그럴 듯 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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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잘 표현한 영화 :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카프카’ ;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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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의 용기
마광수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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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치혼합의 사회를 꿈꾸며….

 주위를 둘러 보다가 문득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맞추고 응시하고 있자면 그것이 전부터 이 세상에 있던 것인지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어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낯설게 경험한 것은 바로 ‘이 세상은 수없이 다양한 색(色)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에는 이 당연한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조화를 이룬 채 말이다.


 색(色)은 그 다양성과 그것에 따른 구별의 용이함 때문에 물리적 세상 뿐만 아니라 상징의 세상에서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데 상징의 세상에서의 색들은 물리적 세상의 색들 만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시절에 빨간색은 무조건적인 금기의 색이었다.

 그러다가 정치적 대립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자 이제 복숭아색(桃色)이 매도 당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세상에서 색들이 다양하게 공존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상징적 세계의 획일성과 경직성은 그 일상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고약한 테러집단의 폭탄테러보다 심하다.

‘자유에의 용기’는 이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광수 교수의 이야기이다.

자유주의자 마광수 교수의 생각을 가장 자유로운 형식인 에세이에 담은 글 모음이라!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를 읽고 나서 느낀 그 감흥을 떠올렸다.

개인적이고 자유롭고 야한 상상을 엿보고 나는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지었었던가?

그런데 이 책은 자유로운 문학가로서의 마광수가 아니라 불평 많은 사회학자로서의 마광수의 작품이었다. 자유로운 형식의 기지가 번뜩이는 내용의 글은 별로 없고, 쾌락에 대해 닫혀있고 경직된 우리 사회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 책이다. 게다가 그 논의 방식은 온통 ‘진실을 알려주마!’ 식의 계몽적인 것 뿐이다. 
 위선적인 도덕의 계몽과 훈육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독한 반복으로 펜끝을 겨누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 역시 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마광수 교수는 자유주의를 훈육하고 있는 모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즐거운 사라’ 악몽은 대단한 것이었나 보다.

 어떤 영화의 제목과 같이 ‘사라의 악몽’ 대한 불안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잠식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태도는 과거 빨간색이 무조건 허용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노란색이나 복숭아색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닫혀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 보다 심한 상태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자유주의 훈육과 지독한 반복은 어느 정도 유효한 것도 사실인 듯 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정도로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색만을 강조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과거 신인상파를 이끌었던 시냑과 쇠라 등의 화가가 사용한 점묘화들은 중요한 함의를 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색들을 작은 점들로 병치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물감이 갖는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혼합하는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각각의 색들이 자신의 색을 버리지 않고 존재하면서 혼합되어 걸작을 이루는 그런 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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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은 계속된다 - 개정판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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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배신자 되기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잠재적인 배신자이다.
(진리와 진실은 다르다고 하겠다. 진리가 좀더 궁극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면, 진실은 보다 개인화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진실이 있듯이...)
 그런 의미에서 Noam Chomsky는 대단한 잠재적 배신자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언어학자이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정치비평가인 놀라운 지식인인 Chomsky를 보고 배신자라고 하다니?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그렇다! 확실히 그는 잠재적인 배신자이다. 

  Chomsky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맞서는 반미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며, 그가 하는 일은 단지 그가 가진 진실의 잣대에 벗어나는 그의 조국 미국이 저지른 무자비한 힘의 행사 방식과 그 방식이 유지되는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리는 관계의 파괴자를 뜻한다. Chomsky는 관계보다는 진실의 기준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집단이나 개인이라도 그의 기준을 넘어선다면 그는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진실의 편에 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잠재적으로 배신자이다. Chomsky와 같은 인물은 어떤 막강한 이익집단에 속하여 공고한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명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받았을 유혹을 짐작할 수 있기에 그가 물리쳐 온 타협과 안주에 대한 저항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힘을 바탕으로 한 자유시장경제의 상징이 무너졌다. 이 충격은 유일 강대국의 자존심 회복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눈에 보이는 방식의 힘의 사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가시적으로 보인 동계올림픽에서의 본 힘의 행사방식과 북한에 대한 악의 축 발언은 평등과 억압에 대한 반골정신을 숨쉬듯 달고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초유의 반미감정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사사로운 "관계"에 대한 감정적 대응 방식일 뿐이다. 분노의 감정이 사라질 즈음 같이 사그라드는 감정의 일시적 분출. 만약 객관적으로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자의적으로 불량과 양호의 기준을 나누는 오만한 힘에 대해 잠재적 배신자가 되어보려면, Chomsky의 이 대단한 책을 봐야 할 것이다.

 이 작다면 작은 사각형에는 중남미에 대해 미국이 행사하는 부당한 힘과 동티모르에 대한 진실, 이러한 체제가 유지, 확대되기 위한 구조적인 방식들에 대한 그의 통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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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d 2010-08-1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평을 되게 힘들게 써놨네. 그냥 번역 옮겨논거 같애.

동녘새벽 2010-08-13 12:37   좋아요 0 | URL
미안~!
 
달빛이 있었다
임영태 지음 / 창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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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주는 존재의 사색

 사실 달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은 빛을 내는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색의 빛을 던져 주곤 한다. 비록 지금은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광물 덩어리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달에 얽힌 모든 상상과 사색들은 나에게는 아직 생생한 신화로 남아 있다.
 게다가 달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래서 달빛은 헤어지는 두 아이를 모두 집까지 바래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달빛 역시 세 명의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상처와 고통의 삶을 비추어 준다.

깡패와 시인, 그리고 둘과는 위상이 좀 다른 이름을 가진 여자.
이 세 명의 주인공은 남다르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진정한 주인공인데 다른 소설에 비해서 배경이나 관념적 설명, 다른 인물들의 비중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어 있고, 오직 이 세 명의 인물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의 배경은 놀라울 정도로 인물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공간이 너무나 협소해서 세 명의 주인공들은 큰 개연성 없이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이 세 명의 주인공이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데, 그래서 이 소설의 공간은 마치 작가의 머리 속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혹시 이 세 명의 인물은 작가의 Id, Ego, Superego가 소설 속에서 형상화 된 것은 아닐까? 물론 본능적인 삶을 사는 폭력적인 깡패는 Id, 시적 영감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 고뇌하는 시인은 Ego, 놀라운 언어 능력에 종교적 감성을 지닌 여자는 Superego이다.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폭력이다. 그 폭력에 사고를 제한당한 심리학 전공자의 억지스럽고 유치한 상상일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소설을 다 읽었다. 그리고는251쪽에서 작가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작가가 밝히는 이 소설의 주제는 ‘상처를 통해 획득하는 존재증명’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나는 생각하고 그래서 존재한다.’는 서양의 철학자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존재를 연역하는 서양의 이성중심, 뇌중심 사고에 비해서 인생의 고통에서 존재의 확신을 얻었던 동양적 존재의식!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단지 앎이 아닌 삶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불교의 사색이 이미 읽었던 소설에서 밀려온다. (내용없는 형식이 없듯이 서양철학자의 앎도 삶과 철저하게 유리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존재에 관한 진지한 생각을 접할 때면, 난처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형이상학적 내용자체가 낯설고,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을 언뜻 밖으로 내어 놓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왠지 모를 생각이 내 속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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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간 20번이나 고쳐 쓰고, 스스로에게 만족이 되는 이 소설을 반나절에 읽은 것이 작가에게 조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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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독약 1 - 에덴 동산 이후의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책세상총서 17
알렉산더 쿠퍼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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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작가들에 도취된 자료수집가의 지루하고 못된 이야기

“신의 독약 : 에덴 동산 이후의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이 책의 제목과 부제이다. 물론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내겐 아주 그럴 듯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이 그럴 듯한 제목이 점차 빛을 잃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제목을 따라가며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좋은 방법인 듯 하다.

* 신의 독약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진행된 ‘앎의 역사’에 있어서 술을 비롯한 약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이성의 냉철함이 결여한 새로운 앎의 수단으로서의 약물은 결코 역사의 주변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상식의 견지에서는 약물에 의한 새로운 앎의 방식이 편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상식 역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앎에 열광해 왔다.
 저자는 알코올을 비롯한 약물에 그다지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이 결여된 사실만을 늘어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물에 대한 긍정을 역사적 사실에 적당하게 숨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상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 참 ‘못된 이야기’이다. 누구나 금지된 것을 좋아하듯 이런 못된 저자의 생각은 흥미를 끈다. 마치 결사조직의 비밀을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독약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중독과 도취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독약을 제목으로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하긴 애당초 나의 관심도 약물 보다는 도취에 있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에덴 동산 이후의


에덴 동산 이후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에덴 동산 이후라면 장구한 시간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고, 인류 보편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시간적인 고찰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고찰에 있어서도 너무나 협소한 19-20세기 서양의 낭만주의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약물이 새로운 문화 창조의 힘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서양의 많은 작가나 예술가들이 약물에서 비롯된 영감을 통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에머슨, 앨런 포, 윌리엄 제임스, 보들레르, 니체, 고흐, 노발리스, 실험에 불과했지만 괴테나 실러조차….) 그러나 이러한 뒷이야기들을 스포츠 신문의 흥미거리 기사처럼 나열하는 것으로는 ‘도취의 문화’를 제대로 해석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취의 의미나 사회적, 심리적 메커니즘 같은 성찰도 없고, 문화사라고 할 만한 내용은 더욱더 아니다. 같은 유형으로 계속해서 제시된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사실 지루했다.

이제 저자가 지닌 진정한 관심을 알만하다. 나중에 뒤져보니 그의 전공은 약물학자도 역사학자도 사회심리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닌 영문/독문학자 였던 것이다. (물론 영문학이나 독문학이 위에서 언급한 학문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단지 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이 내용과 잘 맞지 않고, 그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사람의 관심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19-20세기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약물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이 책에서 다루는 그들의 뒷이야기들은 작가와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19-20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약물에 얽힌 뒷이야기들” : 재미는 덜해보이지만 새로 붙여본 이 책의 좀더 정직한 제목이다. 

* 도취에 대한 성찰을 위해 이책을 골랐다면 얇지만 깊이 있는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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