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의 용기
마광수 / 해냄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병치혼합의 사회를 꿈꾸며….

 주위를 둘러 보다가 문득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맞추고 응시하고 있자면 그것이 전부터 이 세상에 있던 것인지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어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낯설게 경험한 것은 바로 ‘이 세상은 수없이 다양한 색(色)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에는 이 당연한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조화를 이룬 채 말이다.


 색(色)은 그 다양성과 그것에 따른 구별의 용이함 때문에 물리적 세상 뿐만 아니라 상징의 세상에서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데 상징의 세상에서의 색들은 물리적 세상의 색들 만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시절에 빨간색은 무조건적인 금기의 색이었다.

 그러다가 정치적 대립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자 이제 복숭아색(桃色)이 매도 당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세상에서 색들이 다양하게 공존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상징적 세계의 획일성과 경직성은 그 일상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고약한 테러집단의 폭탄테러보다 심하다.

‘자유에의 용기’는 이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광수 교수의 이야기이다.

자유주의자 마광수 교수의 생각을 가장 자유로운 형식인 에세이에 담은 글 모음이라!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를 읽고 나서 느낀 그 감흥을 떠올렸다.

개인적이고 자유롭고 야한 상상을 엿보고 나는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지었었던가?

그런데 이 책은 자유로운 문학가로서의 마광수가 아니라 불평 많은 사회학자로서의 마광수의 작품이었다. 자유로운 형식의 기지가 번뜩이는 내용의 글은 별로 없고, 쾌락에 대해 닫혀있고 경직된 우리 사회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 책이다. 게다가 그 논의 방식은 온통 ‘진실을 알려주마!’ 식의 계몽적인 것 뿐이다. 
 위선적인 도덕의 계몽과 훈육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독한 반복으로 펜끝을 겨누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 역시 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마광수 교수는 자유주의를 훈육하고 있는 모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즐거운 사라’ 악몽은 대단한 것이었나 보다.

 어떤 영화의 제목과 같이 ‘사라의 악몽’ 대한 불안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잠식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태도는 과거 빨간색이 무조건 허용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노란색이나 복숭아색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닫혀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 보다 심한 상태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자유주의 훈육과 지독한 반복은 어느 정도 유효한 것도 사실인 듯 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정도로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색만을 강조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과거 신인상파를 이끌었던 시냑과 쇠라 등의 화가가 사용한 점묘화들은 중요한 함의를 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색들을 작은 점들로 병치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물감이 갖는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혼합하는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각각의 색들이 자신의 색을 버리지 않고 존재하면서 혼합되어 걸작을 이루는 그런 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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