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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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전염

김훈의 문체를 중심으로

 

 

 

      책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쉽게 느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환상의 통로로 들어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나의 경우엔 책과 친해지는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점을 넘어야 작품을 구성하는 문체와 구성 방식 등에 익숙해져서 책을 읽는 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십 페이지, 백 페이지를 넘어갈 때까지 재미가 붙지 않은 경우엔 손바닥은 점점 땀으로 흥건해지고 자꾸만 딴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포기해야 할까? 조금만 더 읽어야 할까? 물론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음에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책도 있었다. 그런 책들은 ‘왜 의미도 없이 이렇게 어렵게 썼어?’ 라고 볼멘소리를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두고 어느 학자는 “다양한 영역을 경쾌하게 넘나드는 특유의 현학성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엄밀한 내적 논리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이 훌륭하고도 적확한 문장을 변형해 김훈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영역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유의 탐사정신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김훈의 엄격한 사실적 글쓰기는 책 넘김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김훈의 책을 속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보르헤스와는 다른 어려움이다. 현학적이고 난해한 탓에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훈의 글은 대상을 왜곡하거나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대상의 본질을 재해석하지 않는다. 사실적 글쓰기를 추구하되 대상으로부터 얻는 자신의 심상을 존중한다. 그것을 어떤 과잉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절제하면서 서술한다.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인 정서를 섞는 것이다. 이것이 김훈의 문장을 시적인 문장이라고 함부로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바닷가 호텔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저무는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흐린 날의 그 큰 바다는 한마디로 불가해했다. 그 너머의 대안에 또다른 인간의 흔적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남태평양의 흐린 바다 앞에서는 불가능했다. (…) 물결 높은 해안선 호텔의 유리창 밑까지 바짝 달려들고 있었고 파도가 인간의 생각의 화살을 튕겨내 버리는 것이어서, 생각의 화살들은 해연의 캄캄한 깊이에까지 닿지 못하고 바다의 표면에 부딪쳐 무참히도 꺾어져버리곤 했다. (…) 그 여자가 내 시선의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옴에 따라 나는 저 저 낯선 바다, 그리고 시선과 생각의 화살이 가 닿지 못하는 해연의 캄캄한 깊이와 해풍이 멸렬하는 낯선 시간들이 마침내 나에 의하여 감지되고 인식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위에다 내가 하나의 삶이나 의미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분명히, 계절이 바뀌어오는 것을 느꼈다. <풍경과 상처p13>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적인 감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풍경에 대해서 말할 땐 독자 또한 풍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풍경에 대한 ‘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묘사의 기본이 ‘디테일의 힘’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김훈에게는 ‘디테일’은 다른 식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 현상적인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로부터 오는 감정을 ‘도구’를 사용해 어떻게 사실적이고도 정확하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 보인다. 김훈에게 ‘도구’란, 한국어다. 그는 형용사와 부사를 자주 사용하지 않음에도 단어 선택과 배치 등 표현의 힘으로도 문장이 큰 힘을 갖도록 한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낯선 단어들의 출현은 전혀 이질감 없이 문장 안에 녹아들어서 독자를 동요하게 만든다.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해도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 온전히 전달된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이와 같은 성질의 일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상황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현상만을 나열해서 마치 사건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나야 하는 취조서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니 말이다.

      그의 서재에는 독자가 상상하는 것만큼 많은 분량의 책은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나, 애정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따로 소장해두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서재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작업에 필요한 ‘도구’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도구’란 앞서 말한 한국어 보다 더 넓은 의미이다. 바로, 사전이다. 다양한 국가의 사전들과 어원사전들, 한자 사전을 서재에 두고 글을 쓸 때 사용하고 있다. 광부가 탄광 맨 끝까지 들어간 곳을 막장이라고 하듯이 그는 광부의 마음으로 갱도 가장 깊은 자리인 작업실이라는 막장에서 단어라는 석탄을 캐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잠깐 숨을 고르면서 문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에 홀리게 한다. 그러니까 책 넘김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용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한 문장에서 맴도는 즐거움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산문집처럼 마음을 풀어놓고 문장을 읽어나가서도 안 된다. 신문 기사 읽듯이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글이다. 그의 글의 진정한 매력은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볼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훈은 풍경은 필시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봤다. 바깥에 있는 풍경은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상처를 만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고, 풍경은 상처의 존재를 확인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상처를 글이라는 매개를 경유해 만난다. 실제로 풍경을 만나지 않아도 문장에서 풍경을 느낄 수 있다는 어떤 경이와 마주한다. 이것은 전염에 가깝다. 아픔을 전염시키는 힘, 공명을 만드는 힘, 통각이 발달하도록 읽는 사람의 마음을 추동하는 아름다운 문장은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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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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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수많은 관계에 연루된다. 선택한 적이 없는 성별로 태어나 이름을 부여받은 후 정해진 가정에서, 거주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제한된 인간관계를 만들게 된다. 누군가에겐 손자와 손녀로, 딸과 아들로, 친구로, 연인이 되어 성장한다. 어쩌면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기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환경의 틀 안에서” 라는 전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국가’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은 국가의 한 일원인 국민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된다. 그것이 강요된 것인지 의구심을 품을 새도 없이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며 (혹은 그렇게 믿으며) 국가 안에서 자연스레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반하여 자신이 국가를 선택하고자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고국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의 낯선 풍경들과 가까워지고자 시도한다.

     

       그들 중에는 난 우처럼 고국에 대한 환멸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여행을 떠나온 이들이 있다. 주인공 난 우는 개인을 억압하는 고국인 중국을 떠나와 제1세대 이민자로 자유의 땅 미국에 정착한다. 여태껏 중국에서의 시간을 버리고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 자유의 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창한 느낌과는 다르게, 미국에서 난 우가 아내와 자식과 꿈꾼 것은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정직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족에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그러나 그 바람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난 우는 고된 노동을 하며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고 ‘여기-미래’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온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모래로 쌓은 성처럼, 여러 상황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곤 하기 때문에 활자 속의 난 우는 불행하게만 느껴진다. 난 우는 미국의 생활이 안정되면 될수록 편안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불안한 모습을 내비친다. 자신이 꿈꾸던 '자유'가 진정 현재의 모습이 맞는지 뒤늦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우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그곳에는 아직도 '시'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유로운 삶>은 한 중국인 가족이 이민자 1세대로 미국 생활에 정착하며 겪는 일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에피소드들이 허구인지 작가 하 진의 경험에서 채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허구적 인물인 주인공 난 우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난 우라는 개인을 통해서 하 진이 말하고자 했던 것, 난 우라는 독특한 인물의 특별한 생이 아니라, 세상의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난 우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난 우에게 자유는, 작가 하 진에게 자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추구해오고, 바랐던 자유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조심스러운 대답을, 타하르 벤 젤룬의 <자유를 생각한다> 안에 담긴 글과,  김훈이 쓴 추천사로 대신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가고 싶어하는 그 곳의 이름을 모를 때, 너무도 막연해서 윤곽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곳을 가리킬 때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를 생각한다> 타하르 벤 젤룬

 

 

      "이 잔혹하고도 치매한 전쟁 속에서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슬프고 답답하다. 이 구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자유를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 구절은 ‘자유’라는 그 멀고 막연하고 또 절실한 환영에 대하여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슬프고 답답한 구절에 따르면 ‘자유’란 너무나도 막연해서 윤곽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짐작할 수 없는 곳을 향해서 기어이 가야 하며, 가지 않을 수 없는 열정과 긴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란 환장할 만한 기갈이며 결핍일 뿐이다. 인간은 그 기갈의 힘으로, 그 결핍의 힘으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또다른 결핍의 고통으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자유를 만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자유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인가. 이 자유는 너무나도 잔혹한 시련이며, 견딜 수 없는 결핍이어서,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는 그 자유를 차라리 버리고 싶다."

 

김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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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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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 블룸은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필립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토마스 핀천을 꼽았다는데, 나는 한 번도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니 여기저기서 그의 작품과 마주칠 일은 많았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기가 꺼려지는 묘한 상태에 놓여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두께만 보아도 겁부터 나는 토마스 핀천의 역작인 <중력의 무지개>를 보면서,'다음에, 다음에'를 외쳤던 것이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발간 소식을 듣고 유독 기뻤던 이유는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어떤 글을 쓰는지 알 수 있겠단 기대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내 의도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산산조각까진 아니더라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탈모 환자의 머리카락이 빠지듯 '그의 소설집을 읽으면 토마스 핀천의 스타일을 알 수 있겠지!' 라는 기대도 뭉텅 뭉텅 빠지고 말았다. 스타일 파악은커녕 텍스트를 쉬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핀천의 단편 소설을 읽은 후 첫 느낌을 '쉽지 않다'라는 단순한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그 원인 중 하나인 핀천의 문체에 대해서 얘기해보면, (해설 부분에도 <핀천의 문체와 번역>이라는 주제로 나와 있다.) 우선 핀천의 문체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말장난 같은 동음이의어나 처음 보는 약어를 자주 사용하고, 문장이 길고 복잡하다. 또 소설을 읽다 보면 작품 속에 끌어들인 지식의 범위의 방대함, 그 정보들에 압도돼 사건의 흐름을 놓칠 수가 있으므로 책 읽는 내내 초집중 상태를 요한다. (핀천 문학의 특징을 <방대함, 난해함, 복잡함>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도 내게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핀천스러움'은, 익숙하지 않은 전문적 지식들의 나열과 시대적 배경, 즉 배경 지식의 문제였으며,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쫓아가는 일이었다. (한 인물에 이입할라치면, 다른 인물이 가늠하지 않았던 행위를 했기 때문) 그래도 '난해'라는 수식어를 달 게 된 많은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이런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재차 읽어보면 그 의도와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점은 표현력이 탁월한 문장들을 보며 즐겁게 밑줄을 쳤다는 것, 읽으면 읽을수록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그의 세상에 대한 탐구정신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는 소설집 안에는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는 단편이 없다. 보통 소설집은 단편들 중 대표작을 표제작으로 선정하는데, 핀천은 제목을 수록된 단편을 아우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1958년부터 1964년 사이에 씌어진 <이슬비>, <로우랜드>,<엔트로피>, <언더더로즈>, <은밀한 통합>은 6년이라는 세월동안 핀천의 성장 기록인 셈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로우랜드>와 <엔드로피>다. <로우랜드>의 주인공 데니스 플랜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데니스 플랜은 가장이 주는 책임감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한다. 데니스 플랜의 환상은 존재가 불분명한 여인인 '네레사'로 형상화된 듯 보인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혁명을 꿈꾸었던 테러리스트들이 파놓은 지하세계를 집시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는데, 그곳에서 데니스 플랜은 네레사를 만나고 소설은 끝이 난다. 두 사람의 만남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네레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네레사'는 데니스 플랜의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이러한 모호함과 환상성이 주는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엔트로피>는 아파트에서 사흘째 광란의 파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담고 있다. 아파트 사층에는 학자로 보이는 칼리스토가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고 분투중이고, 삼층에는 멀리건이 재즈 사중주단 친구들과 함께 광란의 파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삼층과 사층을 번갈아가면서 상황이 제시되고, 층수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해설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의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 또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 작품뿐만 아니라 핀천의 모든 단편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배경을 알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핀천의 소설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나 정서를 반영하는 것 외에 시대적 , 환경적인 요소들이 강렬하게 소설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향 안에서 지배 받는 것이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예컨대 서문에서 핀천은 <엔트로피>를 쓰면서 "1950년대가 사람들에게 어떠했는가를 조명하는 방식에 눈길을 두었다"고 밝혔다. 토마스 핀천이 강조하는 ‘비트 정신’ 그것을 간접적인 과학의 방식으로 복잡하게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핀천은 짧지 않은 서문에서 이미 집필 시기가 한참을 지난 소설들을 내놓은 이유와 바람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은 “유의어 사전을 구석구석 뒤져서 근사하고 유식하게 들리거나 대체로 나를 멋져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 같은 단어들을 그게 무슨 뜻인지 사전에서 공들여 찾아보지도 않고 적어두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엄청나게 지루하"고, "유치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결함이 여전히 쓸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치기도 한다. 젊은 시절 쓴 자신의 소설들이 "초보적 수준의 소설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점과 젊은 작가들이 피했으면 하는 사례들에 대한 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핀천은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습작생들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의 결함을 가감 없이 내비치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면 조금 쉽게 거쳐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소설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핀천의 문학적 명성과 권위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거나 어쩌면 재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온전히 꾸준한 '배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정한 눈빛으로 애둘러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글을 쓰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느리게 배우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토머스 핀천의 조언이 담긴 편지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조언'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거창함에 핀천은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래는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조언'들이다.

 

      디온(Dion)이 늘 노래하듯이, 내가 얻은 교훈은 슬프지만 사실인데, 지나치게 개념적이거나 지나치게 멋지면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등장인물은 종이 위에서 죽는 법이다. p24

 

     많은 경우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생의 초년기에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좀더 그럴싸하게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무지의 범위와 구조에 대해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지는 그저 개인의 정신적 지도 위에 존재하는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에는 등고선과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작동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쓴 결과로서,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해 좋은 이야기를 망칠 수 있는 가능성에 익숙해져야 한다.

 

      추상적인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나서야 플롯과 등장인물을 진전시키려고 하는 그런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쪽 분야의 말로 하면, 그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인간의 실제 삶에 근거하지 않는 한, 연습생의 또다른 습작에 머물기 쉽다.

 

     포털 사이트에 '토마스 핀천'이라는 다섯 글자를 써 넣으면 고등학교 때로 추정되는 사진이 프로필 사진으로 나온다. 공식적인 활동을 포함해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 채 작품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는 '은둔형' 핀천의 모습을 보면 새삼 '작가'란 무엇일까? 라는 커다란 질문과도 맞닿게 된다. "작가의 사적인 삶과 작품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며 오직 작품 자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핀천의 생각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일까? 답은 오직 핀천만이 알 것이다. 내가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소설에 몰입하여 그 세계가 전부인듯 유영하며 떠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핀천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샌가 핀천의 내면의 힘이 안개처럼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지 않을까?  핀천의 작품을 빠른 시일내에 도전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핀처네스크(Pynchonesque)를 즐기고 싶으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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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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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김중혁의 신간 출간 소식을 듣고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의 "정체"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거창하게 정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그러니까 주인공이 좀비인지, 사람인지, 그렇다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혹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김중혁의 지난 작품들을 봤을 때 그에게 '소재'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비교적 내용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소설집의 경우에도 하나의 거대한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악기들의 도서관>은 음악에 대한 소설들이, <1FB1>은 도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주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위 말해 '오타쿠' 냄새가 나는 작가랄까. 한국 문단에서 이런 특징을 가진 작가가 드문 게 사실이다. 또한, 소재로 쓰인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처럼 전혀 지루함 없이 소설집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소재'를 이끌어 나가는 이야기의 힘도 한 몫했을 것이다. 물론 줄거리를 전개하는 데도 거침이 없고, 대화체를 맛깔스럽게 잘 쓰는 김중혁의 이야기꾼 다운 면모, 탁월한 능력도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이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의 정체는 "딜리터"다. 딜리터는 고객이 죽은 뒤에 고객이 의뢰했던 물품을 제거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자신이 죽은 뒤에 남아 있으면 꺼림칙한 흔적들, 죽은 뒤에도 발칵된다고 생각하면 얼굴부터 빨개지는 물건들, 딜리터인 구동치에게 꽤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돈을 내면서까지 비밀로 남겨두고 싶은 일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부질 없다. 사람들은 흔적이 사라지면 자신의 체면이 자신이 변호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일어나도 별 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흔적보다 중요한 건 타인의 기억 속에서 평생을 다칠 자신임을 모른다. 한 존재의 삶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편입하여 기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구동치는 일을 그만 둔다. 의뢰자들의 요청을 잘 들어주었다고 믿지만, 실은 구동치의 일처리 방식은 비밀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물건을 자신만 볼 수 있는 장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구동치가 언제든 표면 위로 드러날 수 있는 비밀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비밀을 보면서 그는 어쩌면 비밀은 어떻든 사라지지 않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길 바라면서 산다. 살아가면서 흔적을 남기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다행스러운 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흔적을 지우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필연적으로 관계라는 사실에 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지우고 싶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은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계획을 들으며 구동치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p.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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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 화자가 엄밀히 말해 관찰자 입장에 불과한 소설들이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앙드레 브로통의 나자,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등 많은 소설들… 이와 같은 소설들의 공통점은 화자의 시선으로 한 인물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대개 보편의 사람들과는 다르며 독보적이다. 그의 존재는 화자에게 강렬한 인상과 자극을 주며 세계의 이면을 향하는 현자(賢者)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화자는 작품 내에서 존재감을 상실하기도 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예외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에 대해서 묘사하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적었지만,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의 자리를 분명하게 남겨둔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품 속에서 집중되어 묘사한 파울보다 베른하르트라는 인간이 더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베른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파울은 “인물과학과 예술 분야를 환상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참으로 뛰어간 조화의 천재”이다. 냉소적인 베른하르트가 찬탄해 마지않은 ‘새로운 인간’인 파울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강력하게 묶어놓는 것은 ‘병’이다. 파울은 어릴 적부터 정신질환이 있었으며, 베른하르트는 폐병이 있었다. 병원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기이한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병원을 나온 뒤에도 상습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두 사람은 자신을 지킬 방법으로 세상에 대한 적대적 시선과 증오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기질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예술과 학문으로 자아추구를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편의 부류를 역으로 우스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런 아웃사이더 부류인 두 사람이 교류하는 연대의 끈이란, 사실은 지극히 이기적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인간적인 감정 위에서 새겨진 게 아니라, 지독한 자기애로부터 시작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질서에 타협하지 않는 고집과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향하는 지독한 증오심,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지식애의 갈망과 열정……. 하지만 유별난 특성이 가진 두 사람에도 결국 인간이라는 한계,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며, 그것을 병을 통해서 매순간 느끼며 쌓여가는 건 삶에 대한 공허일 뿐이다.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가끔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지옥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파울의 아내가 죽고 병세가 심해지자 어느새 죽음의 영역에 가닿아 버린 파울을 보면서 베른하르트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파울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파울의 변화가 자신을 파괴시켜버릴 파울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이 끝끝내 외면하고 있는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번 구차한 변명을 만들어서 파울을 피하고, 가능하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파울이 자신의 가장 훌륭한 친구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견딜 수 없어진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베른하르트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는 지독한 자기혐오가 존재하지만 그를 매혹하는 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무엇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결국 베른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비극적일 정도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죽음의 맨얼굴을 보겠다는 투쟁을 삶 속에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것인지,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를 그의 서술을 통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병 때문에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믿어왔고, 또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베른하르트가 결국엔 자신의 거울과도 같았던 친구, 파울을 통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결코 죽음은 확신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생애 최후의 슬픈 몇 년 동안, 그가 과거에 실제로 살아왔고 체험했던 일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허구로 변해가는 듯했다.… 피상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삶의 총체를 살아 낸 것은 그 어떤 점에서도 피상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그 반대인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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