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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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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우 소설가의 소설집 <신중한 사람>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제목이야말로 그다운 제목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간 작품이나 팟캐스트 인터뷰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내가 으레 짐작하고 있는 이승우 작가의 이미지가 '신중한 사람'이라는 단어에 꼭같이 매치됐기 때문이다. 그가 팟캐스트에 나왔을 때 자기가 경험한 자신의 일조차도 멀리서 바라봐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세심함과 겸손함을 보면서 그를 작가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좋아하게 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집에 담긴 인물들의 성격은 '신중'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리기엔 조금 어설프다. 그들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는 신중함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미루고 자신의 의견을 발설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행위여서 점점더 상황을 악화되게 만든다.

 

      <신중한 사람>의 주인공이 '신중함'이 한 사람을 어떤 지경으로 내모는지 가장 극단적이고 확실하게 그려내는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다. (……) 못 견뎌 하면서도 견뎌낸 것은 견뎌내지 않을 때 닥쳐올 또 다른,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이, 꺼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식이 그래서 성립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혹시 만들어낼지도 모를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끔찍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주택을 낯선 타인에게 빼앗기는 부조리한 상황과 맞딱뜨리게 된다. 그는 당장 어떤 조취를 취할 수 있었지만 사건의 원인제공자인 장팔식을 찾으면 그때부터 자신의 권리를 찾아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 하루에 만 원이라는 숙박비를 내고 다락방에서 투숙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때부터 주택을 원상복구시키는 일에 전념하여 고된 노동을 시작한다. 결국 그 행위는 어지럼증을 유발시키고, 그 어지럼증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심각한 수준의 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끔 세상에 기우뚱했지만 그럴 때면 몸을 반대 방향으로 약간 기울여서 중심을 잡았다."

 

     단순히 상황이 악화될까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고 또 참으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황을 더 악화되게 만드는, 그러한 신중함을 가진 주인공의 상황을 작가는 나타내고 싶었을까? 내가 보기엔 그것은 다양한 개개인의 특성일 뿐, 문제는 외부에 있다. 외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예측불가하고 불가항력적이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행위로 대비함으로써 불안을 상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노력일 뿐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어느 곳으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외국에 나가있을 때, 자신이 공들여 꾸민 주택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처참한 꼴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가 없는 곳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돌아왔고,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되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부터 개개인의 성향대로, 판단대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겠지만, 이 상황 자체가 부조리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세상의 거대한 수레바퀴, 삶의 부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신중함'이라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여워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바람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고 와해되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그 아이러니에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전반적인 특성도 그러하다. 그들은 거대 서사를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선이 간다. 그들의 과도한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태도를 염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특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내면심리 서술에 탁월한 이승우 소설가의 문체 덕분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 이승우 작가의 문장을 두고 '문장들의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썼다.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달리기를 하고, 그것이 동어반복을 가장한 복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동어 반복이라고 헷갈릴 수 있지만, 이 행위는 동어 반복을 하면서 내면 심리로 더욱 깊숙히 가닿게 만드는 이승우 소설가 특유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한 묘사와 대상을 향한 성실한 설명만이 깊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러한 방법으로 문장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며 축복할 만한 창작자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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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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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무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는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쿤데라의 책을 애독하는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간 소식에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작품을 일찍이 집필해 그 명성이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나이는 무려 만 85세! 어찌됐건 이 책으로 쿤데라가 건재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선물이다.

 

      스물한 살 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90년에 나온 송동준 교수의 번역본이었다. 누런 종이를 매만지면서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마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도가 나갈수록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4개월이 지난 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굵은 뼈대, 대강의 줄거리뿐 그 안에 내포된 철학적인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일 년을 주기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신작 『무의미의 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쿤데라가 이전에 어떤 소설을 써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작품 중에서 그의 세계관을 총집약한 작품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토마스, 테레사, 프란츠, 사비나와 그들에게 놓인 사건과 역사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염두하며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뿐만 아니라 쿤데라의 작품 대다수가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을 염두해볼 때, 작품 안에 존재하는 작가를 완벽하게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쿤데라의 서술은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마치 인물들 위에 군림해 상황을 설명하고 판단하는 신과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던질 수 있는 또다른 질문은 '이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쿤데라의 시선에 열광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오랜 질병은 허무주의다.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네 인물의 삶을 통해서 그는 독자들에게 '무거움을 선택할 것인가? 가벼움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인간은 네 가지(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유형이 있고, 두 가지의 갈림길(가벼움, 무거움)이 있다. 필연적으로 무거운 인생은(프란츠, 테레사) 숨막힐 듯한 부자유와 맞닿뜨리게 되고, 가벼운 인생은 (대표적으로 사비나(토마스는 테레사로 인해 가벼움에 세계에서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한다) 공허와 허무를 맞땋드리게 된다. 삶을 말할 때, 무작위성과 아이러니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살아왔든) 상관없이 토마스와 테레사처럼 어느 평범한 날에 교통사고로, 프란츠처럼 낯선 땅에서 지뢰를 밟아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독자들이 말하는 '뒷맛이 씁쓸한 쿤데라식 유머'가 아닐까. 그의 책 『농담』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젊은 시절, 유머를 빙자한 치기어린 농담이 자신의 인생 전반을 망가뜨리지 않는가. 이를 갈면서 오랫동안 꿈꿔온 복수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우스꽝스럽게 종결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하찮고 의미 없는 것 (무의미의 축제에서 거론되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의 희망과 낙관이라는 환상을 깨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러한 삶의 근본적인 '무의미'를 독자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했던 그가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의 나이를 염두해볼 때 이 책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태껏 그가 써왔던 묵직한 작품들의(분량을 보든, 내용을 보든) 대를 잇는 작품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독자가 받은 책은 두 시간만에 다 읽을 것 같은 적은 분량의, 가벼운 에피소드를 모아놓는 듯한 작품이다. 전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인물들의 깊이가 덜하고, 명확한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책의 특성을 제목의 핵심인 '무의미를 염두한 듯한 소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소설 속 뤽상부르 공원의 평온한 고요, 어떤 무심함이다.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나도 한 번 가보는 샤갈전, 달리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울타리 너머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이유도 모르는 채 꺄르르 웃는 아이들, 전혀 쓸모 없는 공연…. 작가는 라몽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구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 물론 획일성은 어디에나 퍼져있지만. 그래도 이 공원에서는 획일성이 좀 다양하게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개체성의 환상을 지킬 수 있다는 거지."

 

         개체성은 환상의 핵심, 우리는 이제 개별성의 상징인 가슴과 엉덩이가 아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배꼽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쿤데라는 말한다. 이제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 유일한 것, 어떤 반복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의 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쿤데라가 이 시대의 사랑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드러난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사랑은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채성의 실종 문제는 시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개채성은 인간의 환상, 즉 존재의 본질, 무의미였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너머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고 쿤데라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쿤데라가 작품을 통해 집요하게 말해온 삶에 대한 문제의 답이 '사랑하라'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이 긴 세월을 살아온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짠해지지만, 문제는 주장 뒤에는 '왜?'라는 물음이 항시 뒤따른 것이다. 독자가 '왜' 이 무의미한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 작가는 사건을 통해 말해주었어야 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주제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드러났다는 게 섭섭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쿤데라의 작품이구나!' 외칠수밖에 없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 그 가운데 살풋이 드러나는 냉소의 흔적들.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리의 젊은 네 명의 남자를 세련된 방식으로 그려냈다. 85세라는 나이에 어떻게 이런 젊은 시선을 유지하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작가의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는 작가의 나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몇 번 다시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피어오르는 물음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훗날 나에게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언젠가 섬광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목도하는 날이올까? 하는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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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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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단편 소설보다 더 짧은 분량 개념인 꽁트로 창작 역량을 체크당하곤 했던 것 같다. 콩트나 단편소설은 시처럼 한 문장도 낭비해서는 안 되면서도 읽고 난 뒤 독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겐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쓴 콩트는 대부분 주제가 모호했고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가끔씩 참고용으로 모파상의 짧은 소설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모파상의 짧은 소설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거창한 비밀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들, 간혹 예외적이고 낯선 사건 또한 인간 전형의 굴레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장의 끝인 마침표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다 읽고난 다음 한 번은 숨을 고르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석 언저리에 박아둔 삶의 파편일지도 몰랐다. 모파상은 우리가 언젠가 경험해본 감정을 기억의 수면 위로 호출한다. 독자가 어떤 위대한 작가의 폐부를 찌르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에 '나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어!'라면서 무릎을 치듯이 말이다. 그러나 쉽게 지나칠 만한 감정을 붙잡아 기록하는 것, 그 노력만으로 모파상 같은 작가의 자질이 완성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독심술은 오직 관찰과 의지로 가능하다"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문장처럼, 위대한 작가란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관찰자가 되어 인간의 한 가지 행동에 내포된 수 십 개, 수 백 개의 감정의 결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파상의 소설들은 분량이 짧고 진부하지 않아서 금방 속도가 붙었다. 아무리 단편이라고 해도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이토록 속도가 붙은 적은 처음이라서 신기했다. 유독 기억에 남은 단편들은 <의자 고치는 여자>와 <29호 침대>다.

        <의자 고치는 여자>는 한 남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본 의자고치는 직업을 가진 여자가 평생 그 남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내용인데, 마지막 부분이 강렬하다. 의자 고치는 여자가 돈을 주면서까지 사랑을 갈구하던 남자는 의자 고치는 여자의 사연을 제3자인 의사를 통해 듣게 된다. 자신을 향한 절절한 사랑의 사연을 들으면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자는 크게 분노하며 불쾌해한다. 그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의자 고치는 여자가 그의 앞으로 남긴 돈이 있다고하자 그와 아내는 반색하며 그 돈을 받아든다. 한술 더 떠서 그는 그녀의 유품 중 쓸만한 것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물건까지 찾으러 온다. 이처럼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권력화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이 사악해지기도, 한없이 미련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자 고치는 여자가 사랑한 그는 악인이고, 그녀는 단지 연민의 대상일 뿐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끝내 거부당했다는 것을 연민할 게 아니라 그녀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야 할 것이다.

        <29호 침대>는 잘생기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모든 여자가 한 번쯤 흑심을 품을 만한 만인의 연인인 에피방 대위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미르바와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들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전쟁이 발발해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에피방 대위는 훈장까지 수여받으며 명예롭게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미르바는 전쟁 와중에 프로이센 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독이 걸린 채로 병원에 입원한 신세가 되어있다. 그런 미르바를 본 에피방 대위가 처음 느낀 감정이 당혹스러움, 거부감이라는 게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피방 대위가 보이는 행동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프로이센 군에게 복수를 하고자 마음을 먹은 미르바가 병에 걸린 것을 숨긴 채로 여러 프로이센 군인을 상대하며 그들을 죽이는 내용을 전해들으면서 에피방 대위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녀에게 잘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미르바의 이야기가 자신의 연대까지 소문이 퍼져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자 미르바에 대한 격한 분노를 느낀다. 미르바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지만, 미르바에게 더한 말을 들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뒤 미르바는 결국 죽고, 소설은 끝이 난다.

 

        모파상은 사랑과 삶, 사람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 이면에 있는 사악함과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심도 있게 관찰한 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매력이 있다. 모파상의 작품은 옮긴이의 말처럼 특정한 유파로 구분하기가 힘든 것 같다. 모파상의 소설을 <자연주의>로 보기도 하고 <사실주의>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연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더욱 가까운 것 같지만) 이 구분이 유의미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에 실린 65개의 단편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모파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너무나도 소설창작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이야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 모파상의 이 책은 오래도록 보관하면서 두고두고 꺼내 보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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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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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놀라운 것 아닌가요?

살아왔다는 것.

그것도 이 나라에서,

이 시대의, 우리로서.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스위드’는 시모어 레보브의 별명이다. 북구인의 준수한 외모를 타고나 어린 시절 ‘스위드’(스웨덴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운동선수로 활약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가로서 자랑스러운 사회적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는 명성에 걸맞게 행동했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하게, 그러니까 품위 있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이제까지 지나온 인생의 편평한 고속도로를 뒤돌아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한 스위드도 잔혹한 ‘인생의 무작위성’에서 열외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무장단체에 가입해 가출한 사춘기 딸 메리가 마을 우체국에 폭탄을 설치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인 사건으로 스위드의 정상적인 생활은 파탄난다. 메리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스위드의 완벽한 인생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 위치하기까지, 유대인으로서 미국 사회에 편입하여 뿌리를 내릴 때까지, 이방인이 아닌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믿게 된 그 순간까지, 삼대에 걸쳐 온 간절한 꿈, 그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어찌 이토록 쉬운가. 세상은 왜 이처럼 부조리한가?

 

“야구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지 않는 속도가 있는데, 그것은 선수가 떠올랐다가 추락하는 속도다.”

 

“누군들 앞으로 벌어질 불가능한 일에 대비가 되어 있겠는가? 누가 비극에, 그리고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고난에 대비가 되어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지 않다. 비극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비극 - 그것은 모든 사람의 비극이다.”

 

        스위드는 자신의 아버지에 복종하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메리의 반항이 낯설고 두려울 뿐이다. 자신 부부가 메리를 잘못 키운 것은 아닐까 지난날을 반추하고, 여러 원인을 만들어서 합리화해보기도 한다. 스위드는 꿋꿋하게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메리와 대화를 하려고 애쓰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끝에는 회한만이 남을 뿐이다. 열심히, 모범적이게 살아온 스위드의 삶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의 동생 제리 레보브처럼 타인으로부터의 정당화도 없이, 규약 따위는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면서 살아왔어야 옳은 삶이었을까? 정체성의 혼란, 그것이 필립로스가 천착해온 요소 중 하나인 ‘유대인’을 거들지 않더라도 미국 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수많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부분일 것이다.

    

“스위드는 삶이 가르쳐줄 수 있는 최악의 교훈을 배웠다.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배우게 되면 행복은 두 번 다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없다.”

 

       이것은 완벽하게 미국 사회에 정착했다고 믿는 우월한 스위드도 주저앉게 할 만한 근본적인 것, 그것이 개인의 노력과 역량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미국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찾아낸 것이다. 소설은 보편적으로 개인에 대해 다룬다. 그것이 한 명이든, 네 명이든 언제나 주인공이 존재하며 부조리한 -혹은 부조리함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위태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 소설의 전형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오직 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 천착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 훌륭한 소설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러한 소설의 깊이를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완전히 신뢰하기는 힘들다. 한 개인은 오직 홀로 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통해 개인이 만들어지고, 그 수많은 관계들이 사회를 만든다. 한 개인이 직면한 사회는 개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영향력이 전부일 때도 더러 있다.

 

       미국의 목가의 시대배경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대 초다. 베트남 전쟁, 그에 대응하는 반전운동과 민권 운동, 성 혁명 등의 격변이 일어난 시기이다. 미국 주류 사회에 깊숙이 진입한 인물의 몰락을 이야기하지만, 미국 사회의 몰락이라는 더 큰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온전히 삶의 위기 앞에 놓인 개인의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스위드’라는 인물만 겪을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였을까? 이 허구적인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는 공감하고, 그때의 시대 상황을 보며 알지 못하는 개인을 상상해볼 것이다. 살아 있다고 믿을 것이다. 실제로 스위드의 실제 모델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스위드’ 메이신. 소설을 읽은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지만, 만일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책에 나오는 것과 거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주사위 놀음처럼 잔혹하기만 한 인생의 무작위성을 견디지 못하고 너무나도 쉽게 생의 나락을 떨어지는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위로해주는 듯하다.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 견뎌온 삶은, 그 안에서 가치를 찾기 위해 발버둥친 삶의 노력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자기 인생의 아이러니와 불가해성은 도처에 널려있고, 인간은 그 안에서 무력할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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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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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 전부터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이 내게 특별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80년 5월 광주'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 문학사에서 희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작가들이 저마다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역사적 증언에 힘을 보탰고, 그 행위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깊은 울림을 가진 메시지로 전달되어 왔을 테니 말이다. <소년이 온다>를 기대한 이유는 순전히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품 전부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어본 그녀의 장편 단편 소설, 시집 등을 떠올렸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한강 소설가는 내게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의 영역에 깊이 침투해 감각적이고 섬세한 문장으로 표현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강 소설가라면 먼저 5월 광주에 쓴 작가들처럼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를 수집한 후 신중하게 글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실적 글쓰기와 감각적 재능을 어떤 식으로 분배하여 한강만의 작품으로 소화시킬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얇은 종이 사이로 선연하게 그녀의 슬픈 표정이 비치는 것만 같았는데, 이번 소설에서도 그러할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소설이 역사적 진실을 담아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모니터 속 하얀 페이지가 작가 자신의 상상력과 예술적 역량을 맘껏 펼치는 곳이 되기 이전에 사건 인식과 판단의 문제, 진실에 대한 추구, 집요함 등 의식적인 부분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궁극적으로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소년이 온다>의 몇 장은 작가의 문장은 전 작품들 보다 훨씬 물기 없이 단단해진 느낌을 받는다. "나의 목소리를 되도록이면 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날 정도로, 작가는 주관적인 감상을 배제시켰다. 사건과 인물에 깊이를 담고, 실제 일어난 일들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직접' 생각하고 '느끼도록' 유도했다. 어떤 부분은 심연을 떠도는 것처럼 불투명하고 감정적인 카오스를 마주하는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불쑥 틈입하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문장들 (잔혹한 고문과 폭행의 장면 등)

때문에 이것이 '허구'가 아닌 '진실'임을 환기시킨다. 적확한 문장들, 그 아름다움에 목이 메는 것은 독자인 우리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온한 시기가 오기 이전, 누군가는 삶을 송두리째 도둑 맞았음을 말이다.

 

      소설은 단지 '집단'만을 탓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들에게 죄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본다. 도대체 이 세계, 이 세계를 장악하는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근본은 대체 무엇이길래 80년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왜 이 비극은 끝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인간은, 근복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p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의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그들이 원래부터 '대단한 존재'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여문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하여 가해자의 위치에 서고, 침묵하는 존재들과는 다른 '예외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양심'을 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그 외침 안에서 당당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학살의 주범의 역할을 도맡은 인간이 있는 반면에, 똑같은 상황이 주어졌어도 전혀 다른 행동으로 가슴 속 '깨끗한 무엇'을 발현시킨 인간 또한 존재했다는 희망 말이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막연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세계의 다양한 비극 앞에서 인간에 대한 증오와 회의를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고, 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더 이상 낙관적인 바보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우리는 이 무력 앞에서 거짓의 단어가 된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 가야 할 것이다.  잊지 않는 것이 시작이 될 것이다. 소설은 말하고 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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