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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 화자가 엄밀히 말해 관찰자 입장에 불과한 소설들이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앙드레 브로통의 나자,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등 많은 소설들… 이와 같은 소설들의 공통점은 화자의 시선으로 한 인물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대개 보편의 사람들과는 다르며 독보적이다. 그의 존재는 화자에게 강렬한 인상과 자극을 주며 세계의 이면을 향하는 현자(賢者)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화자는 작품 내에서 존재감을 상실하기도 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예외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에 대해서 묘사하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적었지만,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의 자리를 분명하게 남겨둔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품 속에서 집중되어 묘사한 파울보다 베른하르트라는 인간이 더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베른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파울은 “인물과학과 예술 분야를 환상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참으로 뛰어간 조화의 천재”이다. 냉소적인 베른하르트가 찬탄해 마지않은 ‘새로운 인간’인 파울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강력하게 묶어놓는 것은 ‘병’이다. 파울은 어릴 적부터 정신질환이 있었으며, 베른하르트는 폐병이 있었다. 병원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기이한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병원을 나온 뒤에도 상습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두 사람은 자신을 지킬 방법으로 세상에 대한 적대적 시선과 증오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기질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예술과 학문으로 자아추구를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편의 부류를 역으로 우스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런 아웃사이더 부류인 두 사람이 교류하는 연대의 끈이란, 사실은 지극히 이기적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인간적인 감정 위에서 새겨진 게 아니라, 지독한 자기애로부터 시작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질서에 타협하지 않는 고집과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향하는 지독한 증오심,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지식애의 갈망과 열정……. 하지만 유별난 특성이 가진 두 사람에도 결국 인간이라는 한계,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며, 그것을 병을 통해서 매순간 느끼며 쌓여가는 건 삶에 대한 공허일 뿐이다.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가끔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지옥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파울의 아내가 죽고 병세가 심해지자 어느새 죽음의 영역에 가닿아 버린 파울을 보면서 베른하르트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파울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파울의 변화가 자신을 파괴시켜버릴 파울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이 끝끝내 외면하고 있는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번 구차한 변명을 만들어서 파울을 피하고, 가능하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파울이 자신의 가장 훌륭한 친구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견딜 수 없어진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베른하르트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는 지독한 자기혐오가 존재하지만 그를 매혹하는 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무엇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결국 베른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비극적일 정도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죽음의 맨얼굴을 보겠다는 투쟁을 삶 속에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것인지,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를 그의 서술을 통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병 때문에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믿어왔고, 또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베른하르트가 결국엔 자신의 거울과도 같았던 친구, 파울을 통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결코 죽음은 확신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생애 최후의 슬픈 몇 년 동안, 그가 과거에 실제로 살아왔고 체험했던 일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허구로 변해가는 듯했다.… 피상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삶의 총체를 살아 낸 것은 그 어떤 점에서도 피상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그 반대인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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