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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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전염

김훈의 문체를 중심으로

 

 

 

      책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쉽게 느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환상의 통로로 들어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나의 경우엔 책과 친해지는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점을 넘어야 작품을 구성하는 문체와 구성 방식 등에 익숙해져서 책을 읽는 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십 페이지, 백 페이지를 넘어갈 때까지 재미가 붙지 않은 경우엔 손바닥은 점점 땀으로 흥건해지고 자꾸만 딴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포기해야 할까? 조금만 더 읽어야 할까? 물론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음에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책도 있었다. 그런 책들은 ‘왜 의미도 없이 이렇게 어렵게 썼어?’ 라고 볼멘소리를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두고 어느 학자는 “다양한 영역을 경쾌하게 넘나드는 특유의 현학성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엄밀한 내적 논리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이 훌륭하고도 적확한 문장을 변형해 김훈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영역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유의 탐사정신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김훈의 엄격한 사실적 글쓰기는 책 넘김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김훈의 책을 속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보르헤스와는 다른 어려움이다. 현학적이고 난해한 탓에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훈의 글은 대상을 왜곡하거나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대상의 본질을 재해석하지 않는다. 사실적 글쓰기를 추구하되 대상으로부터 얻는 자신의 심상을 존중한다. 그것을 어떤 과잉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절제하면서 서술한다.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인 정서를 섞는 것이다. 이것이 김훈의 문장을 시적인 문장이라고 함부로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바닷가 호텔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저무는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흐린 날의 그 큰 바다는 한마디로 불가해했다. 그 너머의 대안에 또다른 인간의 흔적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남태평양의 흐린 바다 앞에서는 불가능했다. (…) 물결 높은 해안선 호텔의 유리창 밑까지 바짝 달려들고 있었고 파도가 인간의 생각의 화살을 튕겨내 버리는 것이어서, 생각의 화살들은 해연의 캄캄한 깊이에까지 닿지 못하고 바다의 표면에 부딪쳐 무참히도 꺾어져버리곤 했다. (…) 그 여자가 내 시선의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옴에 따라 나는 저 저 낯선 바다, 그리고 시선과 생각의 화살이 가 닿지 못하는 해연의 캄캄한 깊이와 해풍이 멸렬하는 낯선 시간들이 마침내 나에 의하여 감지되고 인식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위에다 내가 하나의 삶이나 의미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분명히, 계절이 바뀌어오는 것을 느꼈다. <풍경과 상처p13>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적인 감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풍경에 대해서 말할 땐 독자 또한 풍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풍경에 대한 ‘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묘사의 기본이 ‘디테일의 힘’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김훈에게는 ‘디테일’은 다른 식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 현상적인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로부터 오는 감정을 ‘도구’를 사용해 어떻게 사실적이고도 정확하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 보인다. 김훈에게 ‘도구’란, 한국어다. 그는 형용사와 부사를 자주 사용하지 않음에도 단어 선택과 배치 등 표현의 힘으로도 문장이 큰 힘을 갖도록 한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낯선 단어들의 출현은 전혀 이질감 없이 문장 안에 녹아들어서 독자를 동요하게 만든다.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해도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 온전히 전달된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이와 같은 성질의 일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상황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현상만을 나열해서 마치 사건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나야 하는 취조서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니 말이다.

      그의 서재에는 독자가 상상하는 것만큼 많은 분량의 책은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나, 애정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따로 소장해두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서재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작업에 필요한 ‘도구’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도구’란 앞서 말한 한국어 보다 더 넓은 의미이다. 바로, 사전이다. 다양한 국가의 사전들과 어원사전들, 한자 사전을 서재에 두고 글을 쓸 때 사용하고 있다. 광부가 탄광 맨 끝까지 들어간 곳을 막장이라고 하듯이 그는 광부의 마음으로 갱도 가장 깊은 자리인 작업실이라는 막장에서 단어라는 석탄을 캐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잠깐 숨을 고르면서 문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에 홀리게 한다. 그러니까 책 넘김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용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한 문장에서 맴도는 즐거움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산문집처럼 마음을 풀어놓고 문장을 읽어나가서도 안 된다. 신문 기사 읽듯이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글이다. 그의 글의 진정한 매력은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볼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훈은 풍경은 필시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봤다. 바깥에 있는 풍경은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상처를 만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고, 풍경은 상처의 존재를 확인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상처를 글이라는 매개를 경유해 만난다. 실제로 풍경을 만나지 않아도 문장에서 풍경을 느낄 수 있다는 어떤 경이와 마주한다. 이것은 전염에 가깝다. 아픔을 전염시키는 힘, 공명을 만드는 힘, 통각이 발달하도록 읽는 사람의 마음을 추동하는 아름다운 문장은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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