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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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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우 소설가의 소설집 <신중한 사람>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제목이야말로 그다운 제목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간 작품이나 팟캐스트 인터뷰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내가 으레 짐작하고 있는 이승우 작가의 이미지가 '신중한 사람'이라는 단어에 꼭같이 매치됐기 때문이다. 그가 팟캐스트에 나왔을 때 자기가 경험한 자신의 일조차도 멀리서 바라봐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세심함과 겸손함을 보면서 그를 작가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좋아하게 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집에 담긴 인물들의 성격은 '신중'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리기엔 조금 어설프다. 그들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는 신중함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미루고 자신의 의견을 발설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행위여서 점점더 상황을 악화되게 만든다.

 

      <신중한 사람>의 주인공이 '신중함'이 한 사람을 어떤 지경으로 내모는지 가장 극단적이고 확실하게 그려내는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다. (……) 못 견뎌 하면서도 견뎌낸 것은 견뎌내지 않을 때 닥쳐올 또 다른,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이, 꺼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식이 그래서 성립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혹시 만들어낼지도 모를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끔찍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주택을 낯선 타인에게 빼앗기는 부조리한 상황과 맞딱뜨리게 된다. 그는 당장 어떤 조취를 취할 수 있었지만 사건의 원인제공자인 장팔식을 찾으면 그때부터 자신의 권리를 찾아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 하루에 만 원이라는 숙박비를 내고 다락방에서 투숙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때부터 주택을 원상복구시키는 일에 전념하여 고된 노동을 시작한다. 결국 그 행위는 어지럼증을 유발시키고, 그 어지럼증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심각한 수준의 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끔 세상에 기우뚱했지만 그럴 때면 몸을 반대 방향으로 약간 기울여서 중심을 잡았다."

 

     단순히 상황이 악화될까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고 또 참으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황을 더 악화되게 만드는, 그러한 신중함을 가진 주인공의 상황을 작가는 나타내고 싶었을까? 내가 보기엔 그것은 다양한 개개인의 특성일 뿐, 문제는 외부에 있다. 외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예측불가하고 불가항력적이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행위로 대비함으로써 불안을 상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노력일 뿐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어느 곳으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외국에 나가있을 때, 자신이 공들여 꾸민 주택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처참한 꼴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가 없는 곳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돌아왔고,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되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부터 개개인의 성향대로, 판단대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겠지만, 이 상황 자체가 부조리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세상의 거대한 수레바퀴, 삶의 부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신중함'이라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여워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바람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고 와해되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그 아이러니에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전반적인 특성도 그러하다. 그들은 거대 서사를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선이 간다. 그들의 과도한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태도를 염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특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내면심리 서술에 탁월한 이승우 소설가의 문체 덕분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 이승우 작가의 문장을 두고 '문장들의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썼다.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달리기를 하고, 그것이 동어반복을 가장한 복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동어 반복이라고 헷갈릴 수 있지만, 이 행위는 동어 반복을 하면서 내면 심리로 더욱 깊숙히 가닿게 만드는 이승우 소설가 특유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한 묘사와 대상을 향한 성실한 설명만이 깊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러한 방법으로 문장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며 축복할 만한 창작자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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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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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무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는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쿤데라의 책을 애독하는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간 소식에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작품을 일찍이 집필해 그 명성이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나이는 무려 만 85세! 어찌됐건 이 책으로 쿤데라가 건재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선물이다.

 

      스물한 살 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90년에 나온 송동준 교수의 번역본이었다. 누런 종이를 매만지면서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마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도가 나갈수록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4개월이 지난 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굵은 뼈대, 대강의 줄거리뿐 그 안에 내포된 철학적인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일 년을 주기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신작 『무의미의 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쿤데라가 이전에 어떤 소설을 써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작품 중에서 그의 세계관을 총집약한 작품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토마스, 테레사, 프란츠, 사비나와 그들에게 놓인 사건과 역사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염두하며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뿐만 아니라 쿤데라의 작품 대다수가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을 염두해볼 때, 작품 안에 존재하는 작가를 완벽하게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쿤데라의 서술은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마치 인물들 위에 군림해 상황을 설명하고 판단하는 신과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던질 수 있는 또다른 질문은 '이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쿤데라의 시선에 열광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오랜 질병은 허무주의다.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네 인물의 삶을 통해서 그는 독자들에게 '무거움을 선택할 것인가? 가벼움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인간은 네 가지(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유형이 있고, 두 가지의 갈림길(가벼움, 무거움)이 있다. 필연적으로 무거운 인생은(프란츠, 테레사) 숨막힐 듯한 부자유와 맞닿뜨리게 되고, 가벼운 인생은 (대표적으로 사비나(토마스는 테레사로 인해 가벼움에 세계에서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한다) 공허와 허무를 맞땋드리게 된다. 삶을 말할 때, 무작위성과 아이러니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살아왔든) 상관없이 토마스와 테레사처럼 어느 평범한 날에 교통사고로, 프란츠처럼 낯선 땅에서 지뢰를 밟아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독자들이 말하는 '뒷맛이 씁쓸한 쿤데라식 유머'가 아닐까. 그의 책 『농담』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젊은 시절, 유머를 빙자한 치기어린 농담이 자신의 인생 전반을 망가뜨리지 않는가. 이를 갈면서 오랫동안 꿈꿔온 복수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우스꽝스럽게 종결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하찮고 의미 없는 것 (무의미의 축제에서 거론되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의 희망과 낙관이라는 환상을 깨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러한 삶의 근본적인 '무의미'를 독자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했던 그가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의 나이를 염두해볼 때 이 책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태껏 그가 써왔던 묵직한 작품들의(분량을 보든, 내용을 보든) 대를 잇는 작품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독자가 받은 책은 두 시간만에 다 읽을 것 같은 적은 분량의, 가벼운 에피소드를 모아놓는 듯한 작품이다. 전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인물들의 깊이가 덜하고, 명확한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책의 특성을 제목의 핵심인 '무의미를 염두한 듯한 소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소설 속 뤽상부르 공원의 평온한 고요, 어떤 무심함이다.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나도 한 번 가보는 샤갈전, 달리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울타리 너머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이유도 모르는 채 꺄르르 웃는 아이들, 전혀 쓸모 없는 공연…. 작가는 라몽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구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 물론 획일성은 어디에나 퍼져있지만. 그래도 이 공원에서는 획일성이 좀 다양하게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개체성의 환상을 지킬 수 있다는 거지."

 

         개체성은 환상의 핵심, 우리는 이제 개별성의 상징인 가슴과 엉덩이가 아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배꼽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쿤데라는 말한다. 이제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 유일한 것, 어떤 반복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의 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쿤데라가 이 시대의 사랑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드러난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사랑은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채성의 실종 문제는 시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개채성은 인간의 환상, 즉 존재의 본질, 무의미였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너머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고 쿤데라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쿤데라가 작품을 통해 집요하게 말해온 삶에 대한 문제의 답이 '사랑하라'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이 긴 세월을 살아온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짠해지지만, 문제는 주장 뒤에는 '왜?'라는 물음이 항시 뒤따른 것이다. 독자가 '왜' 이 무의미한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 작가는 사건을 통해 말해주었어야 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주제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드러났다는 게 섭섭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쿤데라의 작품이구나!' 외칠수밖에 없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 그 가운데 살풋이 드러나는 냉소의 흔적들.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리의 젊은 네 명의 남자를 세련된 방식으로 그려냈다. 85세라는 나이에 어떻게 이런 젊은 시선을 유지하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작가의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는 작가의 나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몇 번 다시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피어오르는 물음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훗날 나에게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언젠가 섬광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목도하는 날이올까? 하는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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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 에밀졸라

 

에밀 졸라의 문학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보다 그의 유명한 글(나는 고발한다)이 담긴 책을 먼저 <전진하는 진실>을 접했다.

에밀 졸라의 삶 자체가 워낙 극적인 탓에 그에 대한 관심이 먼저 작동한 것 같다.

그러니까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라는 수식어 이전에 정의롭고 용기 있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졸라의 책을 읽으려고 마음만 다잡았지, 첫장도 펼치기 전에 그의 소설 뒤에 따라오는 여러가지 평 때문에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번에 에밀졸라의 소설 <나나>가 문학동네에서 새로 나온 읽어볼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무네 첫 번째 기대하는 책으로 정했다.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 빛 / 정홍수

 

황석영과 김원우부터 김연수 김애란, 김사과까지.

정홍수 문학평론가가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만 보아도

그의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 빛>은 지면에 발표했던 작가론과 작품론을

주로 모았으며 문학에 관한 글, <씨네 21셍 발표한 영화평론까지 담고 있다고 하니 기대되는 평론집이다.

 

 

 

여자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무리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어떤 분위기일지 대충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러니까 신간 소식에도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일까? 하면서 기대되기 보다는

또 다시 하루키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설레는 것이다. 

일관된 개성이 존재하는 하루키, 장편 소식에 기뻐했던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소설집이 새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니 기쁘다.

그의 생각의 조각을 만난다는 기대로 그의 단편들을 한 편씩 읽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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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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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갈 때마다 낯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면 처음 본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고 나를 지나쳐 갔다. 빠른 발걸음으로 걷는 한 남자, 손을 잡고 행복하게 걷는 연인들, 키가 큰 사람, 긴 머리의 여자, 짧은 머리의 남자, 메마른 얼굴, 뽀얀 살결이 통통하게 올라온 사람, 표정과 눈코입의 모양이 모두 저마다의 특징을 지닌 사람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존재하는 것이며, 나와 공존하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을 느끼면서 마치 방금 태어나 처음으로 눈 뜬 아이처럼 세상이 낯설게만 보일 순간이 내게는 종종 있었다.

 

      TS엘리엇이 말했듯이, 우리는 '탄생-성교-죽음'이라는 단순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보다 현재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삶은 짜여진 각본처럼 어딘가 모르게 부조리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일정한 나이 때 거쳐야 할 관문을 만들어 직접 자유를 박탈하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둔다. 

 

      예외도 물론 있지만, 관문의 모범적인 모델은 이렇다.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을 반납한다.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다. 취업을 한 후 결혼을 한다. 저축을 해 집을 마련하고 가정의 재정적인 안정을 위해 회사 생활을 성실히 한다.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크면 대학교를 보내고, 결혼을 시킨다…… 무한반복. 이런 식으로 열심히 관문을 통과하다보면 '나'라는 자아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나'임을 유지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통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만이 가진 유년의 유일한 추억들, 친구들, 연인들, 사람들…… 정체성은 점점 사라지고 '너도 그 마음 알지'하는 이상스러운 연대만 생겨난다. 회사 출입문 앞에 나와 담배를 피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어 봤자 공허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달라지는 게 무언가? 이제껏 너와 나의 삶이 똑같았고, 현재도 같으며, 앞으로도 같을 거라는 암시밖에 더 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인가? 아니다. 그럼 온전히 사회의 잘못인가? 그렇다고만 하기에도 뭔가 껄끄럽다.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던 그 순간에도, 마지노선이라도 내게 선택의 열쇠가 쥐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물음들이, 세상의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괴로움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김만수는 투명인간이다. 자살 다리로 유명한 마포대교 위에 서 있는 한 남자, 감만수는 엄청나게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한 명, 하나의 인격체,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소설은 김만수의 과거부터 시작된다. 김만수가 태어난 과정, 태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의 사연을 보여준다. 그를 둘러싼 환경,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유년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가족사까지 낱낱하게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그가 선택해야 했었던 일들. 자식 중에 가장 똑똑해서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형이 베트남 전쟁에서 죽자 가족들은 만수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것은 김만수의 어깨에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이 내려앉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김만수는 자신의 두뇌에 대한 한계를 느끼지만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김만수의 이제까지의 삶은 누가 만든 것일까? 소설 내에서도 김만수의 목소리는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서 한 사람, 김만수가 만들어지는 형식이다. 자기가 평가하는 나, 타인이 평가하는 나가 있다면, 김만수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매정했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그 목적이 타인이었기 때문에 착한 김만수의 삶은 허전한 공허만이 남게 된 것이다.

 

      김만수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김만수와 같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외모와 모습들은 달라도 이 세상에 독창적인 인간이 존재하냐는 물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엾고 착한 존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한 고민들이 소설을 읽은 뒤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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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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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단편 소설보다 더 짧은 분량 개념인 꽁트로 창작 역량을 체크당하곤 했던 것 같다. 콩트나 단편소설은 시처럼 한 문장도 낭비해서는 안 되면서도 읽고 난 뒤 독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겐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쓴 콩트는 대부분 주제가 모호했고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가끔씩 참고용으로 모파상의 짧은 소설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모파상의 짧은 소설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거창한 비밀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들, 간혹 예외적이고 낯선 사건 또한 인간 전형의 굴레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장의 끝인 마침표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다 읽고난 다음 한 번은 숨을 고르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석 언저리에 박아둔 삶의 파편일지도 몰랐다. 모파상은 우리가 언젠가 경험해본 감정을 기억의 수면 위로 호출한다. 독자가 어떤 위대한 작가의 폐부를 찌르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에 '나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어!'라면서 무릎을 치듯이 말이다. 그러나 쉽게 지나칠 만한 감정을 붙잡아 기록하는 것, 그 노력만으로 모파상 같은 작가의 자질이 완성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독심술은 오직 관찰과 의지로 가능하다"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문장처럼, 위대한 작가란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관찰자가 되어 인간의 한 가지 행동에 내포된 수 십 개, 수 백 개의 감정의 결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파상의 소설들은 분량이 짧고 진부하지 않아서 금방 속도가 붙었다. 아무리 단편이라고 해도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이토록 속도가 붙은 적은 처음이라서 신기했다. 유독 기억에 남은 단편들은 <의자 고치는 여자>와 <29호 침대>다.

        <의자 고치는 여자>는 한 남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본 의자고치는 직업을 가진 여자가 평생 그 남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내용인데, 마지막 부분이 강렬하다. 의자 고치는 여자가 돈을 주면서까지 사랑을 갈구하던 남자는 의자 고치는 여자의 사연을 제3자인 의사를 통해 듣게 된다. 자신을 향한 절절한 사랑의 사연을 들으면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자는 크게 분노하며 불쾌해한다. 그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의자 고치는 여자가 그의 앞으로 남긴 돈이 있다고하자 그와 아내는 반색하며 그 돈을 받아든다. 한술 더 떠서 그는 그녀의 유품 중 쓸만한 것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물건까지 찾으러 온다. 이처럼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권력화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이 사악해지기도, 한없이 미련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자 고치는 여자가 사랑한 그는 악인이고, 그녀는 단지 연민의 대상일 뿐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끝내 거부당했다는 것을 연민할 게 아니라 그녀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야 할 것이다.

        <29호 침대>는 잘생기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모든 여자가 한 번쯤 흑심을 품을 만한 만인의 연인인 에피방 대위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미르바와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들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전쟁이 발발해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에피방 대위는 훈장까지 수여받으며 명예롭게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미르바는 전쟁 와중에 프로이센 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독이 걸린 채로 병원에 입원한 신세가 되어있다. 그런 미르바를 본 에피방 대위가 처음 느낀 감정이 당혹스러움, 거부감이라는 게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피방 대위가 보이는 행동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프로이센 군에게 복수를 하고자 마음을 먹은 미르바가 병에 걸린 것을 숨긴 채로 여러 프로이센 군인을 상대하며 그들을 죽이는 내용을 전해들으면서 에피방 대위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녀에게 잘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미르바의 이야기가 자신의 연대까지 소문이 퍼져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자 미르바에 대한 격한 분노를 느낀다. 미르바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지만, 미르바에게 더한 말을 들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뒤 미르바는 결국 죽고, 소설은 끝이 난다.

 

        모파상은 사랑과 삶, 사람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 이면에 있는 사악함과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심도 있게 관찰한 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매력이 있다. 모파상의 작품은 옮긴이의 말처럼 특정한 유파로 구분하기가 힘든 것 같다. 모파상의 소설을 <자연주의>로 보기도 하고 <사실주의>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연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더욱 가까운 것 같지만) 이 구분이 유의미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에 실린 65개의 단편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모파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너무나도 소설창작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이야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 모파상의 이 책은 오래도록 보관하면서 두고두고 꺼내 보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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