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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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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 블룸은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필립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토마스 핀천을 꼽았다는데, 나는 한 번도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니 여기저기서 그의 작품과 마주칠 일은 많았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기가 꺼려지는 묘한 상태에 놓여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두께만 보아도 겁부터 나는 토마스 핀천의 역작인 <중력의 무지개>를 보면서,'다음에, 다음에'를 외쳤던 것이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발간 소식을 듣고 유독 기뻤던 이유는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어떤 글을 쓰는지 알 수 있겠단 기대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내 의도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산산조각까진 아니더라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탈모 환자의 머리카락이 빠지듯 '그의 소설집을 읽으면 토마스 핀천의 스타일을 알 수 있겠지!' 라는 기대도 뭉텅 뭉텅 빠지고 말았다. 스타일 파악은커녕 텍스트를 쉬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핀천의 단편 소설을 읽은 후 첫 느낌을 '쉽지 않다'라는 단순한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그 원인 중 하나인 핀천의 문체에 대해서 얘기해보면, (해설 부분에도 <핀천의 문체와 번역>이라는 주제로 나와 있다.) 우선 핀천의 문체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말장난 같은 동음이의어나 처음 보는 약어를 자주 사용하고, 문장이 길고 복잡하다. 또 소설을 읽다 보면 작품 속에 끌어들인 지식의 범위의 방대함, 그 정보들에 압도돼 사건의 흐름을 놓칠 수가 있으므로 책 읽는 내내 초집중 상태를 요한다. (핀천 문학의 특징을 <방대함, 난해함, 복잡함>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도 내게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핀천스러움'은, 익숙하지 않은 전문적 지식들의 나열과 시대적 배경, 즉 배경 지식의 문제였으며,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쫓아가는 일이었다. (한 인물에 이입할라치면, 다른 인물이 가늠하지 않았던 행위를 했기 때문) 그래도 '난해'라는 수식어를 달 게 된 많은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이런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재차 읽어보면 그 의도와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점은 표현력이 탁월한 문장들을 보며 즐겁게 밑줄을 쳤다는 것, 읽으면 읽을수록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그의 세상에 대한 탐구정신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는 소설집 안에는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는 단편이 없다. 보통 소설집은 단편들 중 대표작을 표제작으로 선정하는데, 핀천은 제목을 수록된 단편을 아우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1958년부터 1964년 사이에 씌어진 <이슬비>, <로우랜드>,<엔트로피>, <언더더로즈>, <은밀한 통합>은 6년이라는 세월동안 핀천의 성장 기록인 셈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로우랜드>와 <엔드로피>다. <로우랜드>의 주인공 데니스 플랜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데니스 플랜은 가장이 주는 책임감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한다. 데니스 플랜의 환상은 존재가 불분명한 여인인 '네레사'로 형상화된 듯 보인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혁명을 꿈꾸었던 테러리스트들이 파놓은 지하세계를 집시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는데, 그곳에서 데니스 플랜은 네레사를 만나고 소설은 끝이 난다. 두 사람의 만남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네레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네레사'는 데니스 플랜의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이러한 모호함과 환상성이 주는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엔트로피>는 아파트에서 사흘째 광란의 파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담고 있다. 아파트 사층에는 학자로 보이는 칼리스토가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고 분투중이고, 삼층에는 멀리건이 재즈 사중주단 친구들과 함께 광란의 파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삼층과 사층을 번갈아가면서 상황이 제시되고, 층수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해설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의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 또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 작품뿐만 아니라 핀천의 모든 단편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배경을 알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핀천의 소설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나 정서를 반영하는 것 외에 시대적 , 환경적인 요소들이 강렬하게 소설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향 안에서 지배 받는 것이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예컨대 서문에서 핀천은 <엔트로피>를 쓰면서 "1950년대가 사람들에게 어떠했는가를 조명하는 방식에 눈길을 두었다"고 밝혔다. 토마스 핀천이 강조하는 ‘비트 정신’ 그것을 간접적인 과학의 방식으로 복잡하게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핀천은 짧지 않은 서문에서 이미 집필 시기가 한참을 지난 소설들을 내놓은 이유와 바람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은 “유의어 사전을 구석구석 뒤져서 근사하고 유식하게 들리거나 대체로 나를 멋져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 같은 단어들을 그게 무슨 뜻인지 사전에서 공들여 찾아보지도 않고 적어두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엄청나게 지루하"고, "유치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결함이 여전히 쓸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치기도 한다. 젊은 시절 쓴 자신의 소설들이 "초보적 수준의 소설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점과 젊은 작가들이 피했으면 하는 사례들에 대한 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핀천은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습작생들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의 결함을 가감 없이 내비치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면 조금 쉽게 거쳐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소설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핀천의 문학적 명성과 권위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거나 어쩌면 재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온전히 꾸준한 '배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정한 눈빛으로 애둘러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글을 쓰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느리게 배우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토머스 핀천의 조언이 담긴 편지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조언'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거창함에 핀천은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래는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조언'들이다.

 

      디온(Dion)이 늘 노래하듯이, 내가 얻은 교훈은 슬프지만 사실인데, 지나치게 개념적이거나 지나치게 멋지면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등장인물은 종이 위에서 죽는 법이다. p24

 

     많은 경우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생의 초년기에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좀더 그럴싸하게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무지의 범위와 구조에 대해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지는 그저 개인의 정신적 지도 위에 존재하는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에는 등고선과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작동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쓴 결과로서,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해 좋은 이야기를 망칠 수 있는 가능성에 익숙해져야 한다.

 

      추상적인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나서야 플롯과 등장인물을 진전시키려고 하는 그런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쪽 분야의 말로 하면, 그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인간의 실제 삶에 근거하지 않는 한, 연습생의 또다른 습작에 머물기 쉽다.

 

     포털 사이트에 '토마스 핀천'이라는 다섯 글자를 써 넣으면 고등학교 때로 추정되는 사진이 프로필 사진으로 나온다. 공식적인 활동을 포함해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 채 작품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는 '은둔형' 핀천의 모습을 보면 새삼 '작가'란 무엇일까? 라는 커다란 질문과도 맞닿게 된다. "작가의 사적인 삶과 작품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며 오직 작품 자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핀천의 생각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일까? 답은 오직 핀천만이 알 것이다. 내가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소설에 몰입하여 그 세계가 전부인듯 유영하며 떠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핀천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샌가 핀천의 내면의 힘이 안개처럼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지 않을까?  핀천의 작품을 빠른 시일내에 도전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핀처네스크(Pynchonesque)를 즐기고 싶으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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