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하염없이 읽고 또 읽는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알 수 없어지기만 할 때, 이런 생각을 하며 기운없어하는 건,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탓이라는 걸 이 무서운 할머니가 작품마다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에서 보았던 스웨덴 사람들의 혹독한 가난, 고된 이주노동의 현장을 기억한다. <그리운 순난앵>에 등장하는 아이와 어른들은 모두 그런 무시무시한 가난 속에 산다. 표제작 <그리운 순난앵>의 어린 남매는 심지어 부모조차 죽고 없다. 농부의 헛간에서 우유를 짜고 청소를 하며, 청어를 절였던 소금물에 감자를 찍어 먹는 것 외에는 먹는 것도 없다. 

남매는 겨울 동안 잠깐 열리는 학교에 다니는 순간만큼은 행복할 줄 알았지만, 거기서도 가난뱅이의 잿빛 티를 벗어 버리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식어 버린 감자 몇 개를 구석에서 먹는 남매에게 팬케이크를 싸온 부잣집 아들은 “이런 음식 구경도 못해 봤을걸?” 하고 놀리고, 농부는 우유를 짜는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댄다. “앞으로 우리한테 재미있는 일이 단 한순간도 없을 것 같아” 울먹이다가 “이럴 거면 봄까지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남쪽의 초원의 순난앵>에서는 더 세게 “차라리 봄이 오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고 여동생이 말했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닐곱 살밖에 안 되었을 여자아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직설을 이 또래 아이들은 오히려 후련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린드그렌의 답이 바로 순난앵,이다. 학교를 마치고 나서 빨간 새를 따라 돌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간 곳, 남매가 어릴 적 살던 마을과 같은 이름이지만 보드라운 모래와 푹신푹신한 잔디가 있고 나무배를 깎아서 띄우며 놀 수 있는 곳, 팬케이크에 크림을 얹어주는 어머니가 있는 곳. 하지만 오빠는 우유 짜는 시간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순난앵을 나오곤 한다. 팬케이크를 잔뜩 먹었지만, 밖으로 나오면 허기가 몰려온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잿빛이 된다. 하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순난앵에 다시는 갈 수 없게 되는 일이다. 겨울이 다 지나고 학교가 더 이상 열리지 않으면, 남매는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다. 학교가 열리는 마지막 날 그들은 결심한다. 순난앵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로. 
 
순난앵으로 들어가는 문을 조용히 닫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 아름답고 슬퍼서, 나는 읽고 또 읽곤 한다. 어른이 된 나는 이 장면을 아이들의 죽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 운다. (게다가 동생은 바로 앞 장면에서 “오늘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 하는 말까지 하니까.) 천국으로 가는 아이들의 여정을 이렇게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그려낸 린드그렌 할머니는 참 독하시다, 어떻게 툭하면 이렇게 애들을 죽이면서 끝내냐...(이 작품집의 <에카의 융케르 닐슨>이란 동화도 그렇고, 아예 죽으면서 시작하는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은 스물몇 살의 나는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렸음), 얘들아 이 세상이 다가 아니란다, 이런 얘기를 어쩜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게다가 아름답게 하시는 거냐고요, 이 지독한 비관주의자 할머니 같으니라고!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작품 속에서의 삶/죽음이 (어른들이 느끼는 만큼) 돌이킬 수 없이 분리되어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저, 어린 남매는 다른 곳으로 간 것일 뿐. 린드그렌 할머니는 이렇게 얘기한 것이다. 지금 발디디고 있는 곳에서 행복하지 않더라도, 너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있으니, 얘들아 살아라, 순난앵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잘 견뎌라, 너희만의 순난앵을 꼭 찾아내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권정생의 동화, 그리고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히는 것이 무슨 힘이 되기는 할까요 하는 질문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힘든 날, 나보다 몇백 배, 몇천 배는 더 비관주의자였을 이 (득도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남기신 지혜의 말들을 읽고 꺼내 보곤 한다. (<모노노케 히메>의 일본 포스터에는 "살아라" 라는 글귀가 강렬하게 씌어 있다. 갑자기 이 말이 어찌나 사무치던지... 이 말을 화두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다, 요즘엔.) 그래도 네가 뭔가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결국 고맙게 받아든다. 나도 지혜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어린이날, 또치 씨의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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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5-0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추천!

또치 2011-05-05 15:42   좋아요 0 | URL
해피 어린이날, 치니님! ^^

마노아 2011-05-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어린이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또치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 서늘한 감동과 섬뜩한 현실감이라니, 목구멍이 불로 지진듯 화끈화끈해요.

또치 2011-05-05 15:43   좋아요 0 | URL
우앙... 저를 다 생각해주시고!!
놀러가기 좋은 어린이날이네요. 오늘 하루는 행복하게 꽃구경했음 좋겠어요!

웽스북스 2011-05-0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치님. 멋져요 멋져!!!

읽는데 나도 같이 짠허네 그냥 ㅜㅜ

또치 2011-05-05 15:44   좋아요 0 | URL
웬디님 만나 아이스크림 얻어먹고 매실액 줘야 하는데!
예쁜 새옷 입고 나가는 날 연락할게요 흐흐흐.

2011-05-06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바이 2011-05-0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글이 참....또치님 글 읽고 자꾸 커피만 축냅니다 ㅜ.ㅜ

레와 2011-05-0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엉엉...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