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시인의 말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2004년 여름
나희덕
비가 많이 내리는 아침이었다. 지난 밤 나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몇 번을 깨어, 창밖의 여명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빗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시인을 만나러 가는 아침을 맞았다.
강연회는 그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는데도 많은 청중이 자리를 차지했고, 나도 어느새 그들 사이에 앉아 시인의 시를 읽고 있었다. 진작부터 좋아하던 시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치 처음 읽는듯한 시들이 가슴에 박히던 아침이었다. 이상하게 계속 가슴이 뛰었다.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에서 뱀이 울고 있었다. 방울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한 울음소리. 아닐 거야. 뱀이 어떻게 울겠어. 뒤돌아서면 등 뒤에서 뱀이 울었다. 내가 덤불 속에 있는 것인가. 뱀이 내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에 가려 뱀은 보이지 않았다. 덤불은 말라가며 질겨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자고 내게 말을 거는 것일까. 산길을 내려오는데 울음소리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뱀은 여전히 덤불 속에 있었다. 가을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다음날에도 산에 올랐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을 들여다보면 그쳤다 뒤돌아서면 다시 들리는 울음소리. 덤불이 앙상해질 무렵 뱀을 사라졌다. 낯선 산 아래서 지낸 첫 가을이었다.
ㅡ 나희덕, '가을이었다', <문학과지성사>, 2004
시인은 말했다.
ㅡ 詩을 한 편 쓰고나면 고아가 된다고. 그 다음 詩를 쓰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어쩐지 그 말을 할 때의 시인의 목소리는 떨렸던 것 같다.
시인의 창작 노트 맨 앞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ㅡ 수사는 다른 것들과의 싸움에서 나온다. 詩는 나와의 싸움에서 나온다.
그 당연한 문장 앞에서 왜 내 마음이 벌렁였는지 모를 일이다.
질문에 시인은 답변했다.
ㅡ 스물셋에 등단하고, 스물넷에 결혼, 스물다섯에 아이를 낳았다고.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자신은 옆의 앉은뱅이 책상에서 시를 썼다고. 가난하고 절박했기 때문에 이겨냈던 시간이라고. 오로지 '평범에 바치기' 위한 시간을 보냈을 뿐이라고.
어쩌면 유난할 것도 없는 작가의 과거사가, 문득 나에게도 절박하게 다가온 건, 비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나긋했으나 직업적 시인과 존재론적 시인의 설명은 감동적이었다.
시인을 만나고 오는 길,
비는 그 사이 잦아들었고, 나는 조금 더 가벼운 걸음이 되었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렸다.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다시 시집을 펼쳤다.
내 부른 배를 본 시인이 나에게만 한 줄 더 적는다.
예쁜 아기 낳으세요.
다른 이들과 달리,
먼저 웃으며 메모를 남겨준 시인의 푸근한 미소와
시인의 축원.
다시 시집을 폈쳤다.
그러자 시가 달리 읽혔다.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러자 조금 슬퍼졌다.
빛은 얼마나 멀리서
저 석류나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주홍빛 뾰족한 꽃이
그대로 아, 벌린 입이 되어
햇빛을 알알이 끌어모으고 있다
불꽃을 얹은 것 같은 고통이
붉은 잇몸 위에 뒤늦게 얹혀지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잔뼈들이
멀리서 햇살이 되어 박히는 가을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아, 하고 누군가 불러본다
ㅡ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상수리나무 아래
누군가 맵찬 손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으면 싶은
잘 마른 싸릿대를 꺾어
어깨를 내리쳐주었으면 싶은
가을날 오후
언덕의 상수리나무 아래
하염없이 서 있었다
저물녘 바람이 한바탕 지나며
잘 여문 상수리들을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발등에 퍼부어주었다
무슨 회초리처럼, 무슨 위로처럼
ㅡ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