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emuko > 올 상반기 나의 독서 경향 분석

5월 20일인 현재까지 겨우 46권 읽은 주제에 '경향 분석'이라니 가당치도 않다만 그래도 한번 마디를 지어주자는 의미에서...흠

1. 생물학 책에 빠지다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긴 하지만 그래도 산만한 독서를 하던 내가 처음으로 계획이란 걸 세워놓고 책을 읽었다.

 

 

2. 과학책이나 그 비슷한 것들도 꽤 읽었고

 

 

 

 

 

3. 추리소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도 여전했으나

 

 

 

 

  

 

 

 

(붉은 인형의 집은 호러물이나 따로 갈 곳이 없어서.....)

그러고보니 '내 이름은 빨강'도 좀 애매하긴 하다.

 

5. 과거 몇년간 내 독서량 중 절대치를 차지 했던 소설은 대폭 줄었다

 

 

 

 

 

6. 뒤늦게 불붙은 sf 소설

  뭐 겨우 2개 읽고서 그러냐 싶겠지만, 그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읽을 것들이 그득그득하다.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이다^^

 

 

 

이외에도 이것 저것 읽은 것들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도무지 어디에도 끼어 넣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향후 계획이라면

1. 이슬람에 대한 책들(딸기님 고맙습니다^^)

2. 아직도 잔뜩 남아 있는 과학책들

3. sf 소설들 

우선 이 정도만 생각해 두고 있는 책 부터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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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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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유쾌한 소설을 읽어본 적이 언제던가?
이 소설을 읽다가 한바탕씩 웃어대지 않는 사람은 정말 사람도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것은 파쇼독재의 원흉이고, 미국을 축출한 기술의 혁신-삼성에 대한 모독이다. (무슨 말인지는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앵벌이 출신 고아들이 취직을 해보겠다고 자기소개서 한편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본드속에 환상을 연기하는 배우의 이야기, 살아 움직이는 머리칼을 가진 소녀이야기, 바바리맨을 교화하여 천당을 가겠다는 한 열혈 처녀의 성령충만기, 깨진 재떨이 파편에 생긴 뒤통수의 상처로 인해 박대통령의 눈을 갖게 된 소년의 이야기... 이 소설집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이다.

이기호의 상상력은 기발하다면 둘째가기 서러울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한 수 앞선다.. 더우기 신기한 건, 베르나르의 상상이 조금 터무니 없고, 비약적인 것이라면, 이기호의 상상은 허무맹랑하면서도, 정말 혹시 있을 법하지 않을까라는 혹함(?)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한강공원이나 남산계단길에서 거닐다 우연히 백미러 사나이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지은이의 당부가 뒷머리를 곧추서게도 하는 것이다. 간혹, 마치 내가 본드를 한 상태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닌가 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 기괴함은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의 숭고함으로까지 인식된다. 그러면서 그는 언뜻언뜻 내비친다. 이나라의 밤거리를 교육제도를 군사정권을 마약문화를 거리의 부랑자를 종교를. 이 무겁고도 거창한 이야기들을 그만의 유쾌함으로 이렇듯 통렬히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의 산만하고 해괴한 문장들은 겉멋들지 않고, 훈계하지 않고, 이 도도한 문제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이기호! 나에게 여태까지 그토록 절절한 문학의 효용을 일깨워준 이는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그를 주목하기로 했다.

혹여 시작부터 끝까지 랩으로 읊어대는 버니의 이야기가 다소 어지럽더라도, 환각과 현실이 맹렬히 교차되는 햄릿의 이야기에 구토증상이 일더라도, 제발 계속해서 읽어나가기 바란다... 정말 새로운 세계를 당신은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을 혼돈과 몽롱한 삐딱함으로 구분짓는 것은 부질없다. 제정신이든, 혼미한 정신세계에서든 내가 왜 웃고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정말 웃겨서 웃는 건지, 웃을 수 밖에 없어서 웃는 건지, 아니면, 웃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웃는 건지... 그걸 말이다. 이기호의 상상은 그 모든 고행을 관통한 듯 싶다. 본드를 넘고, 보도방을 넘고, 박통을 넘어, 최루탄을 넘어, 간첩과 성경을 넘어, 끝내 말한다. 이 웃긴 세상이 그토록 신산하고, 재미없는 곳이란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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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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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계기를 잊었고, 사연을 잊었다.

 사춘기 소년의 펄덕이는 심장으로 나는 그저 홀린 듯 빠져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박삼중 스님이란 분을 만났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며, 참 무던히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사형수라는 낙인을 달고, 제 생을 갈아먹으며 그들이 쏟아붓던 그 무수한 참회의 풍경들, 그리고 그들이 갖는 질곡의 하루하루보다 더 가슴 절절했던 그 어머님들의 이야기들이 내 심장을 쉴사이 없이 할퀴었고, 그 후에도 그 스님이 지어낸 책을 두어권 더 읽으며,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열일곱 그 언저리의 나는 비로서 생명이란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가져보았던 것 같다. 사람하나를 죽이고 살리는 일은 하늘의 일이라 사람들은 믿는다. 허나 그 하늘의 일도 때로 인간에 의해 자행되어야 한다고 또 한편의 사람들은 믿는다. 나는 후자였다. 아무 생각없이 후자였다. 그러나 열일곱 이후의 나는 사람을 죽이는 모든 행위는 결국 살인임을 믿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생이 자신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이들, 한번도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앞에 이미 만들어져 구체화된 고난의 틀을 허물기에 너무나 약했던 이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한번만 내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절규가 허무한 메아리로만 되돌아온 이들, 잘잘못의 주체가 어이없이 바뀌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고, 가장 믿었던 이들이 가장 무서운 가해자로 다가오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 했던 이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유정의 상처를 헤아리며 우리는, 인간의 외적인 그 어떤 상처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인간의 내적인 상처들에 대한 심각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고통에 대한 이 사회의 무지가 그들에게 짐지웠을 더 큰 상처들, 악몽후에도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고 안으로만 여미었을 그 큰 상처들을 그들은 체념과 분노속에 삭였을 것이다. 이 사회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 범죄자를 다루는 방식이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사회가 도처에서 가하는 모든 폭력들, 더욱더 억울한건 그 폭력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조차 결국은 다시 범죄가 된다. 폭력에 저항조차 않고 당하기만 하면 결국은 바보가 되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무엇을 선택하란 말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제 자신이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이 어처구니 없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 도처에 널렸지만 한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아니 그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했던 이야기들이 너무도 생경히 다가온다.

지독히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면서도 지독히도 닮아있던 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오늘을 평범하고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일격을 날린다. 그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게 안겼을 배신과 원망의 상처들을 나는 언뜻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몰랐다’는 말은 참 쉽다.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잘못의 변명이 되지만, 또한 이 세상 모든 잘못의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니 알려하지 않았던 사이, 제 심장에 열두번도 더 못을 박고 또 박았던 이들을 우리는 과연 어찌 어루만져야 할까?

 

용서. 그 큰 이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어쩔수 없는 그래도 자꾸만 화가 나는 현실의 모습속에서, 그 큰 용서를 하겠다는 이들은 또한 언제나 다친 이들이었다. 여기 용서를 하겠다는 한 할머니를 보라. 용서를 하겠다는 사람이, 정녕 제 스스로도 다친 사람이었으면서도, 제발 용서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던 그 모습을 보라. 그 할머니가 하려던 것은 어쩌면 용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살인마의 쓰레기 같은 삶속에서 분노만이 아닌 연민을 끌어내는 그 할머니의 눈물, 그것은 그대로 사랑이었다. 제 딸을 죽인 범인의 앞에서 떡 싸가지고 다시 오겠다는 할머니의 그 한마디가 쏟아져 나온 순간 이미 용서하는 자도 용서받는 자도 없고, 다만 인간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모두 덮어버릴 사랑으로 말이다.

용서보다 더 어려운 일은, 용서받는 것이라는 것을 소설은 윤수와 유정의 어머니를 통해 말하고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때의 받은 이의 가슴, 용서하는데 끝내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 아니 용서의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는 이의 가슴, 이 두 가슴사이의 그 허망한 괴리속에서 하늘 같은 사랑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허약함을 동시에 지닌 ‘인간’이란 존재의 크고작음을 통렬히 가늠해본다.

 

책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삶의 격언들을 얻는다. 사람은 70%를 신이 만들고, 30%를 부모가 만든다는 말,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나쁘다는 말,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라는 말, 돌이 빵이 되고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건 마술이고 사람이 변하는 건 기적이라는 말,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는 일생이 걸리고,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 데 또 일생이 걸린다는 말. 나에게 이 말들은 모두 하나로 들린다. 그것이 연민이든, 위선이든, 부모의 심정이든, 그 무엇으로라도 사랑하라는 말.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일생이라는 긴 시간의 가르침으로라도 결국은 사랑으로 감싸안으라는 말로 들린다.

 

우리는 이책을 통해 정체가 불분명한 그 어떤 대상에 대한 무한한 분노와 스스로 눈감았던 이 땅 한켠의 이야기들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얻는다. 분노를 폭발시키고 눈물을 쏟아보지만 해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어줍잖은 위로와 훈계보다 이 소설은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한다. 책장을 한장한장 넘기며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한바탕 눈물의 씻김굿. 어둡다고만 생각했던 그 곳에 어떤 빛이 있을지,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그 말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뒤늦은 각성은 그후에야 비로서 찾아온다. 이제 ‘몰랐다’는 말은 안될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알기’위해 살아갈 내일이 비로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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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성일권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루쉰의 동생인 저우쭤린은 그의 글 『도쿄를 추억한다』에서 ‘동양의 비애’라는 말을 쓴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일삼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양국의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통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전의 관계에서 벗어나 영구적인 성질을 논한다면 양쪽 모두 선척적으로 서양과는 운명이나 환경이 전혀 다른 동양인이라며 동양을 일종의 운명공동체로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양국 예술가들이 가슴 깊은 곳에 공유하고 있는 그 ‘동양의 비애’를 말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과연 서양과 동양의 구분은 무엇인가? 서양에게 동양은, 동양에게 서양은 과연 어떤 의미란 말인가? 과연 양쪽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단 말인가?

  이러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기에 이책은 다소 미흡한 면이 있다. 이 책은 에드워드사이드가 몇몇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어서 엮어낸 책으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실한 개론서와는 거리가 멀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체계적이고, 명확한 이해를 바라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이 문제들을 오늘의 쟁점에 되살려 그 해결을 모색해 가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무척이나 긍적적인 것으로 보인다.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화를 부르짖는 서구와 이를 동조하는 지식인 집단에 대한 비판과 이에 맞서는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 두번째 부분에서는 1948년 이스라엘의 도발로 촉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세력간의 다툼의 역사와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 마지막으로 세번째 부분에서는 한 프로듀서와의 인터뷰문과 저자 개인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끊임없이 책동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그 올가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비서구지역의 서글픔..  에드워드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실체에 대해 다양하게 밝혀내고 있다. 서구에서 말하는 '동양' 또는 '동양적인 것'이란 동양의 실체에 가깝기보다는 서구인들의 입맛에 의한 편견과 왜곡으로 빚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분히 흥미위주이며, 상업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 차원에서 비롯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여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는 것. 하여 수백년에 걸쳐 동양의 역사와 성격 및 운명에 줄거리를 부여했다는 것도 그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모습이다.  발전을 위해서 언제나 ‘적’이 필요했던 서구의 역사에서, 그것은 동양에 대한 동료애적 관심이나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와는 거리가 먼, 그저 침략하고 약탈하기 위한 명분아닌 명분일 뿐이었다. 거기에 자꾸만 살을 붙여 오리엔탈리즘은 거대한 편견의 집합체가 되어버렸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헌팅턴이나 네이폴, 프리드먼과 같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라는 무의식의 공감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집단폭력의 광기다. 서구라는 이기(利器)화된 문명의 틀이 이미 그들에게 태어날때부터 씌워둔 ‘자본과 자유주의’라는 허울좋은 온상이다.

시오니즘을 과연 민족주의적 이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책략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이 애매한 갈등의 바탕에는 사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서구의 아랍세력에 대한 견제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슬람을 계속해서 논쟁의 불씨로 남겨놓아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시오니즘은 더없는 훌륭한 명분일 수 밖에 없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슬람은 여전히 위험하고, 잔인하고, 무지한 집단이어야 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태풍의 눈’ 때문에 정작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주위의 이슬람 국가들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적 앞에, 스스로 갈라지고, 상처입어 더욱더 커다란 수렁속으로 빠져든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그렇게 화해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 따지고 보면 어느쪽의 잘못도 아니다. 빼앗는 자들은 빼앗을 이유가 있고, 뺏기는 자들은 뺏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놓은 그들이, 이 모순된 상황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모순을 만들어 가려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분명한 건, 그들은 어떠한 해결책조차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언제나 해결은 당사자들의 몫인 것이다. 비행기가 폭탄으로 둔갑하여 제심장을 겨누는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슬람의 도발이 아니고, 이슬람의 고요인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그의 독백은 가장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현대세계의 가장 큰 담론으로 굳어져버린 그 논란의 지역 한복판에서 태어나 혼란한 생을 이끌어온 그의 성장사는 그대로 오늘날의 비극이다. 그가 그 어린시절 이유도 모른채 원망스러워 했을 양극의 세계는 지금도 유효할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서로를 할퀴며 싸워야 하는지, 그것은 피부색으로도 종교로서도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유란 것은 적당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으니까. 중립이 오히려 더 큰 죄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택한 외로운 싸움은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9.11 사태를 통해 이슬람에 대한 관심히 높아지며 그동안 암암리에 묵과되어 왔던 이슬람세력에 대한 이미지(서구의 관점과 입장에 의한)가 얼마나 큰 허구였는지가 많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도 역시 이슬람은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호감을 주는 지역이 아니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병폐는 스스로 동양이라 일컫는 우리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구가 만들어 서구가 증폭시켜온 오리엔탈리즘, 그 편견의 광기에 어느새 휩쓸려 버린 동양속의 오리엔탈리즘, 제민족과 제종교를 배반하고 서구의 앞장이가 되어버린 일부 이슬람 지도부속의 오리엔탈리즘, 이 성대한 잔치에 돌을 던지며 또 새롭게 펼쳐지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편견의 틀. 언제까지 세계는 이 허황된 망령들속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지적처럼 동양, 서양이라는 양비론적 구분을 넘어서 ‘다른 문화’라는 개념은 과연 유익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결국 그것은 도리어 자기찬미이거나, 타자모독이 아닌가? 과연 문화의 공존과 공생은 불가능한가? 서로의 차이가 서로를 적대하는 구실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의 계기로 작용하고, 서로의 차이가 서로에 대한 우열의 구분이 아니라, 합리적인 교류의 필요성으로 귀결되는 그런 세계는 올 수 없는 것인가?  모두가 염원하는 ‘세계시민’의 꿈 말이다. 그것이 과연 이상일지, 허상일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많은 이들이 허울뿐인 세계화를 부르짖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 말은 참으로 요원한 말로 들린다. 

구분은 헌팅턴의 주장처럼 어떤 문명간의 그 문화의 이질성에서 경계지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들이 왼손으로 밥을 먹어도 ‘적’인 것이고, 그들이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도 ‘적’인 것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배워야 할 일인데도, 친구를 적이라 계속 우겨대고 제손에 움켜쥔 것이 아직도 작다고 투정하는 그 철없는 이들에게 왜 우리가 친구인지를 가르쳐주는 것. 손을 한번 내밀기만 하면 금방 알수 있는 그 쉬운 일을, ‘자본’의 홀림에 빠져 언제나 총을 내밀며 다가왔던 그들에게, 그들이 철없이 저지른 그 무수한 만행들을 일깨워주는 것. 서양이 동양을 자신들의 잣대로 제멋대로 제단하여 ‘오리엔탈리즘’을 상정한 것이라면 그 허황된 망령의 틀을 깨부수는 것이 우리가 천착해야 할 ‘오리엔탈리즘’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2의 십자군’이 되어버린 어리석은 서구에 보내야 할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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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 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 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직 역* 
簫蓼月夜思何事 ㅡ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오신지
寢宵轉轉夢似樣 ㅡ뒤척이는 잠자리는 꿈인듯 생시인듯 
問君有時錄妾言 ㅡ님이시여 때로는 제가 드린 말도 적어보시는지
此世緣分果信良 ㅡ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悠悠憶君疑未盡 ㅡ멀리 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日日念我幾許量 ㅡ하루 하루 이 몸을 그리워는 
忙中要顧煩惑喜 ㅡ바쁜 중 돌이켜 생각함이라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
喧喧如雀情如常 ㅡ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하온지요 
 
**가끔 꿈속에서 황진이를 만난다는 국어선생님,이 문득 생각난다.요즘도 만나시는지..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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