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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 노동자란 말만 해도 빨갱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일용직 노동자, 봉제노동자, 농민, 청년노동자, 저소득층과 신용불량자 들이 처한 문제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고 사회구조에서 올 수도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1998년 <이자제한법> 폐지로 대부업체 이자율이 한때 66퍼센트까지 치솟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 법령 최고 이자율을 기록한 중국 당나라 때의 60퍼센트보다 높은 수치라고 하니 자본의 약탈을 방관하고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것은 민주정부의 뼈아픈 실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시민 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도록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 정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그간의 민주 정부들이 그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민주 정부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표-책임의 연계 고리로부터 상당 정도 벗어나 있다는 것이었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한다고 자임했음에도, 민주 정부의 정책적 책임성은 그런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IMF 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켜 온 부정적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 정부들은 우리 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 대안의 부재가 반영하듯, 민주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와는 다른 대안적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하여 민주 정부들이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데 앞장섰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방치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결과 사회 양극화가 급속하게 심화되었다. 한편에서는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의 승자들, 거대 기업들, 정치인들, 사회 엘리트와 지식인, 그리고 주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 경쟁의 열패자 내지 탈락자들, 사회계층 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면서 점차 생산과 소비의 중심 영역으로부터 주변화되고 배제되어 가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세계 사이의 격차와 분리는 심화될 대로 심화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 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 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고 약화되어 가는 영역, 즉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해서도 대표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 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141-143)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 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이 드러난다.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 영역을 적극적으로 대면해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면서 정치제도 개혁이나 '역사바로세우기'와 같은 상징적이고 정서적인 개혁 이슈를 흡수 통합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후자의 이슈에 골몰하면서 전자의 사회경제적 과제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간 외형적으로만 보면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 왔다. 그러나 별로 변한 것은 없다. 경제정책에 관한 한 더욱 그렇다. 어찌 보면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현실의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정치의 배면에서 '비결정'의 영역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의 결과인 면도 크다. 

좀 더 폭넓은 이념적·정책적 스펙트럼 위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이슈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거나 혹은 비갈등적 이슈로 다뤄질 때, 실제 정치 경쟁은 한정된 갈등 범위 안에서 추상적 가치와 명분의 동원에 의존하는 다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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