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땐 시리즈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김정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책이란 게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된다.

일단 쓰이는 단어들이 일상 생활과 거리가 있는 편이고, 문장들도 개념적이어서 짱돌을 마구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글 맥락에 익숙해지면 또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기는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만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철학(윤리학) 전반을 이 책을 통해 파악하면서 더 좋아졌다.

내가 살면서 생각해왔던 문제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삶의 질문들과 그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리처드 세넷 <장인>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논조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서 재미있었는데, 알고 보니 세넷의 스승인 한나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단다.

 

결국은 행동하라는 얘기다.

욕망과 쾌락을 위해 종사하는 행동을 하지말고, 행동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말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즐겁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게 사실 어려운 경지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라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143)"

지금 바로 움직이고, 좋은 습관을 들이고, 자신을 성찰하라,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말라는 가르침은 늘 마음 속에 새겨둘 만하다.

 

그래서 정말 사는 게 다 지겹고 '무력할 땐' 아주 괜찮은 책인 거 같다.

 

 

#

아래에 인용하는 구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 책, 그러니까 다미앵 클레르제 귀르노 책의 구절들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인용도 있다. 이 경우 글자색을 다르게 했다.

 

 

그러나 '최고로 좋은 것'을 이상적으로 좋은 것으로 변형시키는 일은 건강한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쉽다. 이렇게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모델만을 따라 맹렬하게 달려가면서 다른 것들은 그것의 창백한 모방일 뿐이라고 여기고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다가 진정 좋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다. 아아! 더 완벽하고 더 크고 더 위대한 다른 것을 향해 가야 한다고 믿은 나머지, 지나친 열의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불행을 위해 노력을 하고 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가? 노래하는 내일의 약속을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많은 행복한 시간을 단념했던가? 저 대단한 것들을 쫓으려는 갈망은 우리를 세상에 대한 혐오 속에 빠뜨리고, 그렇게 하여 좋은 것들 하나하나가 주변의 평범함과 시시함 속에 둘러싸인다. (50)

 

그러나 그 반대 또한 진실이다. 때로 행복의 추구는 만일 우리가 강박 때문에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결코 탐내지 않았을 것들을 욕망하게 만든다. 어떤 사이클 선수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자는 제안에 동의한다. 자신의 전 생애의 성과가 그 승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혁명가는 자신의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 그들은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날씬해지려고 하다가 병에 걸리는 소녀도 있다. 예뻐지는 것이 좋은 것 중에 최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 가운데 어떤 것도, 이런 욕망 가운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는 그저 자신에게 맞는 가장 좋은 것,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최고로 좋은 것'의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50-51)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 혹은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되 선택을 통해 추구하는 사람, 그것도 즐거움으로부터 나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무절제한 사람이다." (『윤리학』, Ⅶ, 1150a 19-21) (62)

 

가장 굳건한 우정은 그러니까 오랜 만남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갑작스레 실망을 한다거나 갑자기 싫증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같은 얼굴을 다시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그게 습관이 되면 즐거움이 고갈된다. 즐거움은 모자람을 먹고사는 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 모자람이 없는 사람을 오래 사랑하기가 힘든 것이다. (66)

 

만일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을 아주 어려워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몹시 필요로 한다면("엄마, 이것 좀 봐요!"), 이는 그가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완성의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삶이 아직 그에게 완성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아이에게 유효한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만스러운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고 느끼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만족은 언제나 끈질기게 찾아드는 이런 미완성의 인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살게 될 것이라고 믿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불쾌한 느낌이 더욱 오래도록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우리가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펼치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이 우리가 될 수 있는 모습과 아직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84-85)

 

"포부가 작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일들을 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이 할 만한 것들을 스스로 박탈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 좋은 일들을 할 만하지 않다고 평가함으로써 어떤 나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좋은 것이었으며, 자신이 할 만했던 그것들을 추구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위축된 사람으로 생각된다." (『윤리학』, Ⅳ, 1125a 20-24)

그러므로 이런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제 가치로 평가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비하는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자신을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비와 호의를 불러일으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기를 소망한다. 친절은 결코 공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남에게 모든 좋은 것을 바쳤으니 남도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어떤 방식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속죄소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되찾아달라는, 자신에 대한 저평가를 그의 사랑으로 회복시켜달라는 무거운 부담을 그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96-97)

 

"포부가 큰 사람은 (……)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살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노예 같은 일이니까. 그런 까닭에 모든 아첨꾼은 고용된 일꾼이며 비천한 사람들은 아첨꾼인 것이다. 포부가 큰 사람은 쉽게 경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나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해서 불편해하는 것, 특히 나쁜 일들에 대해 그러는 것은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포부가 큰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칭찬을 받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에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칭찬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험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적이라 하더라도, 오만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다." (『윤리학』Ⅳ, 1125a 1-9) (98-99)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서 곰곰이 생각해보라. 당신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를 싫어하기는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미움은 뭔가 모숩된 사랑을 많이 닮았다. 싫어하는 것도 일종의 관심이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고 악착같이 뒤쫓는 것, 이것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몹시 심하게 대한다면, 이는 그가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104)

 

만일 탁월성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는 탁월성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가 시도한 일이 거둔 성공 속에서,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자유로이 펼쳐서 이루어낸 행동의 즐거움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기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한데 왜 쾌락을 위해서 행동을 해야 하겠는가? (107)

 

그러므로 실천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태도이다. 실천에는 행위 전체에 외적인 목적으로 부가될 즐거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실천은 우리의 타고난 무절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즐거움은 행위 자체에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것 이외의 다른 목표나 외적인 목적은 없다. 바로 이것이 실천이다. 춤추는 즐거움, 헤엄치는 즐거움, 글 쓰는 즐거움, 기도하는 즐거움, 그러니까 행동하는 즐거움.

"제작은 그것 자체와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천의 목적은 바로 잘 실천하는 것 자체이니까." (『윤리학』, 1140b 6-7) (110)

 

우리가 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집중력을 생기게 하고 주의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주기에 한층 더 일이 잘 진척되도록 해준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산만한 경향을 보인다. 날아다니는 파리만 봐도 눈이 돌아가고 틈만 있으면 일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는다. 그러고서는 뭔가 도락가 근성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구상 단계에만 즐거움을 주었던 많은 계획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행동을 시작하자마자 지겨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가 사실 아주 좋아했던 계획인데도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하려는 행동이 길어지자마자 갑자기 그 매력이 사라져버린다. 음악가가 되거나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이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연습은 금세 지겨워지고 매일 훈련하기도 지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맘먹고 산 기타는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교본은 책장 깊숙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기다렸던 즐거움이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이다.

만일 엉터리로 기타를 치거나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일에서 처음부터 즐거움을 느낀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를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은 몇 마디 말을 배우자마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을 겁내지 않고 배운 것을 써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즐겁게 들이대고, 구문이나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단계를 기다리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서툰 아마추어 음악가가 소품곡 연주를 기대하며 오랫동안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면서 좋아라 하듯이 그렇게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이미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주의가 흐트러질 일이 없으니 실력도 빠르게 향상된다. (113-114)

 

… 그리하여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강박적인 욕구로 일을 하는 공인公人은 명성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됐지 그 명성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의 눈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한심한 미사여구를 연발하며 허세를 부리는 즐거움이 교양 있고 성숙한 대중을 만나는 더 까다로운 즐거움과 동등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쁘게는 만일 재주가 모자라 더 어려운 형태의 인정을 바랄 수 없게 된다면, 그는 주목을 얻기 위해 기꺼이 사악한 명성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무명의 그늘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강경한 사람으로 통해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더 나은 일인 것이다. (116)

 

…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 삶을 통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행위의 자리가 생겨난다. 아침에 빵집에 빵을 사러 가겠다는 결정이나 결혼을 하겠다는 결정, 세차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끄겠다는 결정, 이 모든 것 또한 행위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나타낼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행위라고 해서 뭔가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상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 일상이 수많은 행동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단순한 결정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활동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다른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서 활동을 하기로 결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해내는 일을 행동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제공된 기회로 여기자.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외적인 목표의 신임장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도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118-119)

 

인정하자. 행위는 어떤 위험,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가 착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위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위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위험인가? 그래 좋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우리가 지닌 열망의 묘비이다. 그러나 행위는 놀라운 계시자이기도 하다! 실패에는 많은 가르침이 들어 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서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가 행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위를 하면서 자신을 노출할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행위의 패는 언제나 승리한다. 서슴없이 감행한다면.

행동하는 수고를 감행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이 성향을 수정하는 일은 먼저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자신의 탁월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행동으로 시작해야 하지 탁월성을 지닐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행동해보겠다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행동의 기회는 모두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많은 활동은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해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순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살다 보면 눈에 띄는 대로 일을 맡게 되고 일이 요구하는 대로 응하게 된다. 직업도 그렇고 가정생활의 이런저런 요구에서도 그렇다. 비록 그것들이 꼭 자기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행동의 계기는 자신을 시험할 소중한 기회이다. 탁월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탁월성의 시험대다. 행동을 하는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에서 얼굴을 돌리게 만들고 지금 맡아서 하는 활동에 쉽게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도 차고 넘치게 마음을 쏟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이다. (142-144)

 

… 아마도 똑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습관은 마침내 그 모습을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보는 습관은 바라보는 일을 분명 그만두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보도록 도와주기도,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세부사항과 결함으로 보였던 것에서 갑자기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 즐거워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추해 보였는데 익숙해지면서 점점 진정한 깊이를 지닌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눈길을 사로잡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나 점점 그 사람의 존재에 깃들어 있는 매력을 바라보는 일에 빠져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150-151)

 

당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습관을 하나 생각해보고 활기찬 계획을 세워보라. 모호한 결심만 해두고서 만족하지 마라.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두면 당신이 열망하는 것에 그만큼 더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 습관을 들이고 싶다면, 먼저 일주일에 몇 차례 그것을 할 예정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자. 그런 뒤에 달력 위에 표시해두고 일정표를 조정하여 바꾸지 마라. 습관이 되지 않은 일은 강한 규칙 위에다 받쳐놓아야 한다. 어떤 행위가 습관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행위를 의식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 (157-158)

 

당신이 버리고 싶은 습관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또 다른 습관과 연결되어 있는가? 때로 나쁜 습관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습관과 슬그머니 연결되어 있는 다른 습관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속 군것질을 하는 습관은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후자를 먼저 떨쳐내지 않는다면 전자를 떨쳐내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략적으로 잘 고른 한 가지 습관을 끊으면 다른 많은 습관도 없앨 수 있다. (158)

 

그러므로 우리가 길러야 하는 감성은 요컨대 심미적인 감성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부단히 접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수양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윤곽, 선, 형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림 연습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보고, 정말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너무 바쁜 행인처럼 눈이 대상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지도 못할 많은 상황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오래도록 도움이 될 일련의 삶의 정경을 축적하고, 이는 인간관계의 한없는 복잡성을 성급한 판단으로 빈약하게 만들어버리는 유혹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문학은 경험을 주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미성숙의 치유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문학은 우리가 해보지 않은 어떠한 경험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미 해본 모든 경험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겪을 경험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역시 손을 써서 눈을 기르는 것이다. 그저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소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보는 법을 배운다. 어떤 형식의 예술에서든 작품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해봐서 아는 사람이다. 평가를 할 수 있으려면 만들어봐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균형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시도하는 글쓰기,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의 조화로 귀를 교육하기 위해 해보는 악기 연주, 무용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다르게 볼 수 있기 위해 추는 춤. (165-167)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정은 긴급히 내려야 하는 결정이다. 최선의 결정이라고 해서 언제나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결정은 아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아마도 더 잘 숙고했을 테고 최종적으로 결심했던 것과는 다른 쪽을 택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서 후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결정을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너무 꼼꼼하게 따지면서 망설이다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행동해야 한다면 확실해지기를 기다라는 것은 최선의 선택지가 아니다. 적절한 순간을 놓쳐버릴 위험이, 행동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다. 행동에는 제 때가 있다. 이는 언제나 완벽하게 무르익은 숙고에 알맞은 그런 때는 아니다. 이런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 실수를 저지를 위험을 무릅쓰는 것, 저 '행동하기'란 이런 것이기도 한다. (183)

 

습관의 도움을 받으면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점점 더 수월해진다. 생각이 행동을 앞서는 대신에 생각이 마침내 행동에 합류하고, 생각의 선율이 행동에 깃든다. 처음에는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우리의 감정적 성향이 버릇을 들인다. 이성의 노력에 더욱 너그러워지고 이성에 반대하는 대신 이성을 보조한다……. 바로 이것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의 커다란 장점이다. (207-208)

 

굳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결점이 사실은 탁월성이 과하게 된 결과인가? 비겁함은 결점이지만 아무 싸움에나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모함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색함은 결점이지만 돈을 물 쓰듯 하는 낭비벽이 더 권할 만한 것도 아니다. 우둔함은 결점이지만 거드름을 피게 만드는 거만함은 그에 못지않은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하기를 너무 바라던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정했을 때 못지않게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얌전함이 보기에도 딱한 심한 수줍음이 되고 경건함이 광신으로 변하고, 문예에 대한 사랑이 속물 교양이 되고 지나친 친절이 천한 아첨을 닮아간다.

"함께 삶을 통해서, 또 말과 행위를 서로 나눔으로써 이루어지는 교제에서,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칭찬하고 반대는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누구를 만나든 괴로움을 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속없이 친해지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윤리학』Ⅳ, 1126b 12-14) (219)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멋지게 합격하려는 야심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보기에 딱한 일이다. 좀더 소박한 야심을 가졌다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확실히 합격했을 텐데 말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저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절도를 지키는 것,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더 잘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 열망만큼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27)

 

탁월성의 원동력은 우리가 준수해야 하는 이름 없는 법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 하는 영웅이다. '의무'도 '복종'도 전혀 없다. 공손함은 잊어라! 탁월성은 우리의 눈에 뛰어남과 아름다움의 모델로 나타나는 이에게 필적하려는 열망이다. 그것은 정복의 기백과 열정이 넘치는 신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영화나 소설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열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완성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연구실에 틀어박힌 현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우리가 선망한 영웅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규측을 부과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규칙이 되는 자이다. "만일 그가 나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부디 우리의 모델이 되는 사람에게 필적하고 싶게 만드는 이런 감탄의 능력을 우리가 온전히 간직하게 되기를. (236)

 

 

 

좀 많았지만 힘써 옮겨보았다.

덕분에 조금 무기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낀다.

이런 게 바로 '행동하는 미덕'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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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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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서 반 정도 읽다가 기간이 다 되어서 재대출하려니까 예약이 돼 있다며 안된단다.

그래서 반납하고는 나중에 사서나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다른 책 빌리러 가서 혹시나 해서 서가에 가 보니 2,3,4권은 없고 1권만 꽂혀 있더라. 하여 냉큼 뽑아 대출했다.

책 내용과 아무 관련도 없는 대출과 반납 얘기를 왜 시시콜콜 하느냐면,

대선 이후 때가 때이니만큼 이 책 읽기 열풍이 불었다던데 과연 그렇다는 걸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근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정도 책이라면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한테 물려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여러 단면들에 대해 아무 관점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태극기를 처음 고안한 이는 중국인이란 사실, 단일민족 신념의 허상,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자행된 학살 문제, 명분도 자존도 없는 수구꼴통들의 편가르기 수법, 반미 문제와 병역 문제 등에 대한 명쾌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 돋보인다.

 

 

평소에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사실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다.

예를 들면 병역 기피는 과거 양반층에서 거의 관습적으로 반복되었던 구태였지만, 나는 막연히 그러진 않았으리라 짐작만 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양반은 물론이요, 평민들까지도 향교에 입교하거나 승려가 되어 병역을 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국가가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사실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 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292-293)

 

 

다행이 요즘 들어 군대 안 가거나 못 간 인간들이 정치판에서 어깨 제대로 못 펴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 같긴 하다.

신의 아들은 더 이상 신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아래는 서슬 퍼렇던 칠팔십 년대 운동 좀 하다가 공안기관에서 고문 받던 이들이 없는 사실까지 뱉어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마흔이 넘고 이런저런 세상일을 겪다 보니 무척 공감이 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공안기관원들이야 상부의 지시가 있어 움직이고, 또 그런 일을 하면 돈이 나오고 진급도 하고 상도 받는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내야 했고, 광주 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과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였다. 양심이라는 것을,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 희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251)

 

 

 

누가 한홍구 교수를 빨갱이라 했던가? 내가 보니 기껏해야 중도진보가 될까말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책에서는 이건창, 황현 등 구한말의 건강하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존경에 가까운 찬사들이 이어진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와중에 철저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좌우의 두 날개가 모두 꺾인 것이다. 그리고 이남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러일전쟁 때 너무 큰 희생으로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자칭 우리의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똑같은 콩으로 똥을 만들 수도 있고 된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질도 색깔도 비슷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수구로 매도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보수적 지식인이라면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장엄한 최후를 맞은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럽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먼저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152-153)

 

 

 

시간이 되는 대로 나머지 3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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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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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의 2009년 특강을 정리한 책이다.

1980년 5·18 민주화항쟁 이후 현대사를 파악하는데 아주 좋은 텍스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광주항쟁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고 있는데, 그 때 도청에 끝까지 남아 계엄군에 희생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하지 못했던 죄책감이 80년대 운동권의 성장과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는 거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자세하게 나온다.

노무현보단 김대중을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참여정부는 너무 기대를 저버린 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 나는 참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창피하다.

마지막에 나온 보수야당과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과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야당이 보수여당 따라서 부자 만들기 당 하지 말고 기층 민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충고,

진보정당은 자기들만의 경직된 언어에서 벗어나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충고.

 

 

 

진보진영이 대중성도 부족하고 말이 어렵고 재미없어요. 촛불 때 다 들통이 났잖아요. 운동권이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가 싸해졌잖아요. 왜? 세 마디만 들어보면 알거든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위기" 이렇게 나오면 딱 운동권입니다. 제가 운동하면서 민망해본 적이 없는데 현장에서 그분들이 마이크 잡았을 때는 낯이 뜨거울 만큼 민망했어요.

정파나 대중성 부족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 진보가 갖고 있는 이미지예요. 진보 하면 칙칙하잖아요. 운동권인지 아닌지 보면 대충 압니다. 사실 저도 이런 옷 입고 다니면 안 되는데…… 진보도 옷 잘 입고 모양도 잘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동구가 왜 무너졌다고 생각하세요? 뭐 때문에 무너졌습니까? '블루진' 때문에 무너진 것 아닙니까? 마이클 잭슨이 들어가서 공연한 지역부터 차례차례 무너졌어요. 팝과 코카콜라, 블루진. 젊은이들이 따라 하고 싶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못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우리 편이 되라고 하겠어요? 나는 진보도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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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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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한 지는 좀 됐는데, 다른 거 읽다가 이제서야 다 읽었다. 이제 책을 여러 권 돌려가며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한 마디로 자유시장경제는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하고, 국가의 규제나 복지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복지를 해야 계층이동도 활발하고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희망을 품는다는 거다.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게으르게 만드는 게 아니고, 부자에게 증세를 하고 기업을 규제하는 게 결코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돈 놓고 돈 먹기 이제 그만하고 제조업과 같은 실물 경제를 되돌아 보자는 얘기고.

하기사 아이슬란드 망하는 거 보고도 금융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간 큰일 나겠지.

 

 

시장의 자유는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 (21)

이기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본성도 아니고, 많은 경우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도 아니다. 사실 세상이 경제학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이기심 가득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중략)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이유는 인간이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믿듯이 전적으로 이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0)

사람들이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면 기업들, 더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76)

더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개인만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라는 장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9)

일본과 독일의 문화는 경제 발전과 함께 크게 변했다. 더 규범을 잘 따르고, 계산이 더 치밀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 잘 협력하지 않으면 고도로 조직적인 산업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문화라는 것은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아프리카가 되었든 유럽이 되었든 문화를 경제 저성장의 원인으로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168-169)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224)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238)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250)

많은 수의 규제들이 기업 모두가 사용하는 공유 자원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 산업 부문 전체의 집단적 생산력을 향상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을 장려하는 기능을 한다. (262)

우리가 시장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소금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소금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275)

차를 빨리 몰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심각한 사고를 낼까 두려워 시속 40~50킬로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300)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재빨리 옮겨갈 수 있는 바로 이 효율성 때문에 금융이 경제의 다른 부문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314)

단기적인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전체 시스템을 파괴하게 될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332)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334)

 

 

이런 글들을 보면 이 책은 단순히 경제 실용서라기보다는 경제 철학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학까지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업이나 무역에 대한 규제의 긍정과 그 순기능을 말하는 부분은 자유시장경제에 망조가 든 요즘 매우 적절한 주장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도 새겨들을 만하다. 특히 심각한 고용불안으로 인해 청년들이 직업적 안정이 보장된 의사나 법률가 같은 직업을 크게 선호한다는 분석은 아주 날카로웠다.

심심하고 조금 지루해지는 듯할 때마다 적절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비유들이 나와서 생소한 분야의 책이지만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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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경제의 역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3
니콜라우스 피퍼 지음, 알요샤 블라우 그림,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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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글.

결국 돈은 버는 이들은 투기를 조장한 이들 뿐.

 

 

 

튤립은 1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꽃잎이 터번처럼 생겼다고 해서 터키에서는 이 꽃을 터번이라는 뜻의 '툴리반드'라고 불렀다. 유럽 인들은 튤립을 이국적이고 비싼 꽃이라고 생각해서 앞다투어 정원에 튤립을 심었다. 튤립은 점점 부의 상징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해서라도 튤립을 사고 싶어 했다. 그즈음 주식으로 사람들의 살림이 넉넉해지자 튤립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지금 튤립 뿌리를 사 두었다가 나중에 튤립 값이 올랐을 때 되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려는 사람이 많아지자 튤립 뿌리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주식과 달리 튤립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어서 귀족이나 상인뿐만 아니라 수공업자, 농부, 하인 들까지 모두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증권 거래소에서는 튤립 증권이 거래되었고, 온 국민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가격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는 튤립 뿌리 하나가 2,500굴덴이나 했다. 그 돈이면 호밀 두 수레, 살진 황소 네 마리, 큰 돼지 네 마리, 양 열두 마리, 맥주 네 통, 포도주 두 통, 치즈 1,000파운드, 침대, 은으로 만든 잔과 양복을 살 수 있었다.

이런 튤립 열풍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637년 어느 날, 몇몇 사람들이 생각처럼 높은 값에 튤립 뿌리를 팔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기겁을 한 사람들은 가장 유리한 가격에 자기가 가진 튤립 뿌리를 모두 팔아 치웠다. 그제야 사람들은 튤립 뿌리가 정원에 심는 용도 말고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져 들었다. 팔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려는 사람은 없어 튤립 뿌리의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특히 나중에 돈을 벌면 이자를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빚을 얻어 튤립 뿌리를 산 사람들의 피해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고 파산했다.

역사 속에서 투기 열풍은 늘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진행된다. 처음에 누군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하고 뒤이어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끼어든다. 그러나 비누 거품이 사라지듯 열기가 식으면 시장은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파산하고 만다. (1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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