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참 요상스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정말 내 기억에도 선명한 기괴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경문왕이 뱀떼와 더불어 잠을 잤다는 것과 (뱀)혀가 왕의 가슴을 덮었다는 서술이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내가 읽은 책에도 그렇게 나온 거 같다. 이 책에 인용된 해당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날이 머물면 무수한 뱀들이 몰려들었다. 궁인들이 놀라 떨며 몰아내려 했다. 왕이 말했다. "과인은 뱀 없이는 편히 잘 수가 없다. 금하지 말라." 매번 잘 때마다 혀를 내밀면 온 가슴을 덮었다. (361)

 

뱀이 옆에 떼로 기어다니고 뱀혀가 나와서 배를 덮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괴하기가 이를데 없다. 그런데 정민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밤마다 침전으로 몰려들어 궁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뱀들의 정체는 무얼까? 왕은 동요하는 궁인들에게 뱀 없이는 편한 잠을 잘 수 없으니 막지 말라고 했다. 요컨대 몰려든 뱀 떼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정변에서 경문왕을 지키려는 수호 세력이다. 즉위 초기 왕은 이들의 호위 속에서만 비로소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었으리만치 불안한 상태였다. 어렵사리 왕이 된 지 3년이 채 못 되어 궁궐에서 자살하고 말았던 할아버지 희강왕의 일도 두고두고 마음에 맺혔을 것이다. 자신도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사실 《삼국유사》 속에서 뱀이 왕권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가락국기〉에서는 도적들이 수로왕릉 사당 안에 있는 금과 옥을 훔치려고 하자 큰 구렁이가 나타나 번개 같은 눈빛으로 도적들을 물어 죽인 이야기가 나온다. 뱀은 능원을 지키는 신물이었다. ……

문제는 그 다음 기록이다. 원문은 "매번 잘 때마다 혀를 내밀면 온 가슴을 덮었다[每寢吐舌, 滿胸鋪之]"고 했다. 대부분의 번역은 침전으로 몰려든 뱀 떼가 왕이 잠들면 혀를 내밀어서 왕의 배를 덮었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뱀의 혀는 바늘처럼 뾰족하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들락거린다. 그러니 수많은 뱀이 제 몸으로 왕의 배를 덮었다면 몰라도, 혀로 배를 덮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문의 구문상 주어는 뱀이 아니라 왕이다.

요컨대 왕이 잠잘 때 혀를 내밀고 잤는데 그 혀가 온 가슴을 가득 덮었다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가슴을 덮을 만큼 길고 넓은 혀라면 대뜸 장광설長廣舌이 떠오른다. 석가모니에게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32가지 신체적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三十二相이 그것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길고 넓은 혀, 즉 장광설상이다. 부처님의 혀는 얇고도 부드러우며 혀를 길게 내밀면 얼굴을 감싸고, 혀끝은 귀털의 가장자리에 이른다고 불경에 적혀 있다. 장광설은 지혜의 상징이다. 말은 입속 혀를 움직여 소리가 된다. 혀는 곧 말과 같다. 혀가 길고 넓었다는 것은 결국 보통 사람과는 다른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라는 의미다. 오늘날 끝도 없이 늘어지는 饒舌의 의미로 쓰는 것과는 본뜻이 다르다. (361-363)

 

 

저자는  <삼국유사> 속의 막연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에 나름의 추정을 덧붙여 꼼꼼하게 해석했다. 다양한 문헌들의 교차 비교도 돋보인다. <삼국유사>의 서사들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많은 교양서들이 참고문헌 인용에 큰 비중을 두지 않지만 이 책에서는 전거들을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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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2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교수도 은근히 다작 작가인 것 같아요. 이 책도 언제 내셨는지.. 참... ㅎㅎㅎ

돌궐 2015-12-27 07:2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문헌을 많이 다루는 학자니까 그간 모아둔 원고들이 많을 거 같습니다. 또 대학원생들 주제별 세미나 진행하면서 다양한 실적물도 쌓일 거 같고요. 명칭은 기억이 안나는데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 나오는 지식 수집-융합의 방법을 잘 적용하는 게 아닐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