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시는 사상[意]이 기본이다. 때문에 구상이 어렵고 언어 묘사는 둘째로 된다. 구상은 또한 그 사람 기백이 높고 낮은 데 따라 깊고 얕은 것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기백이란 바탕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백이 낮은 자는 시구를 다듬어 맞추는 데만 힘쓰고 시상을 앞세우지 못한다. 이렇게 지은 작품은 조각한 듯한 문장과 그려 낸 듯한 시구가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깊고 함축된 시상이 없으면 처음 보기에는 잘된 듯하나 다시 음미하면 아무런 맛도 없어지고 만다. (28)

 

시에는 아홉 가지 좋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하여 깨달은 것이다.

시 한 편에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인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히 실은 체[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구상을 훔쳐쓰는데 도적질을 능숙하게 했다 해도 옳지 않거니와 그 도적질조차 서투르게 한 것은 서투른 도적이 쉽게 잡히는 체[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요,

어려운 운을 근거 없이 억지로 단 것은 큰 활을 잘 당기지도 못하는 체[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운을 달아 운이 고르지 못한 것은 술을 지나치게 취하도록 마신 체[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어려운 말을 즐겨 써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 놓고 소경을 인도하는 체[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남의 글을 인용하여 말이 순하지 못한데도 애써 인용하는 것은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체[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세련되지 못한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촌 늙은이들의 이야기 체[촌부회담체村父會談體]요,

꺼려야 할 문구를 함부로 쓰는 것은 존경할 사람을 업신여기는 체[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시구를 다듬지 않는 것은 밭에 가라지가 가득히 우거진 체[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런 좋지 않은 체들을 극복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누가 자기 시의 결함을 지적하거든 받아들일 만한가를 살펴야 한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내 주장대로 할 것이니, 구태여 듣기부터 싫어하여 마치 임금이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제 허물을 고치지 못하듯이 하겠는가.
시를 쓴 뒤에는 보고 다시 보되 자기가 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아야 하며, 남의 것처럼 보되 평생 매우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생각하고 결점을 찾기에 노력하여 결점을 찾을 수 없이 된 뒤에 발표해야 한다. 이것은 다만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산문도 그러하다. 古詩처럼 유려한 문장으로 구절을 조직하고 운을 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우선 시상이 넉넉하면 시어도 자유로워 거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거나 산문이거나 그 법은 한 가지인가 한다.
(29-30)
- ‘시상의 미묘함을 논한다[論詩中微旨略言]’에서, 《동국이상국집》

 

가만히 보니 내가 쓰는 글은 대체로 (잡문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만노불승체, 음주과량체, 촌부회담체, 낭유만전체가 많은 것 같다.

'수레에 귀신이 가득찬' 재귀영거체는 내 견문과 학식이 부족하여 쓰고 싶어도 못 쓰는 문체이고, 졸도이금체와 설갱도맹체, 강인종기체는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쓰고 싶지 않은 문체이다.

아무튼 이규보 다른 글들을 읽어보니 비평 정신이 탁월했던 사람이더라. 기회가 되면 몇 권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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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6-1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해당되지만 특히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 두 가지가 가장 찔리네요 ^^

돌궐 2015-06-17 06:54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 님 글을 많이 봤지만 강인종기체나 음주과량체에 해당되는 글을 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명문과 졸문은 한끗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 문체에 해당되더라도 읽는 사람이 좋게 여기면 다 용서가 되거든요.ㅎㅎ

cyrus 2015-06-1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도이금체. 신 모 작가에게 이 한자성어를 전하고 싶습니다. ^^

2015-06-17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