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 선생 책 <한국의 종교 불교>에서는 일반인들이 한국 불교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매우 잘 담았다.

중론과 유식학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있는데 공부 삼아 옮겨 본다.

초록을 쓰면서 미처 페이지를 옮겨 적지 못했는데, 나중에 찾아서 적어놓아야 한다.

 

 

새롭게 발전한 대승 철학: 중론과 유식학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낸 철학 가운데 가장 어려운 철학이라고 해야 할 대승 철학, 그중에서도 중론을 볼 차례가 되었다. 이 사상은 너무 심오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상은 대승의 정통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살펴보되 극히 간단하게만 보기로 하자.

 

보통 중론(中論, doctrine of middle path)이라고 부르는 이 사상은 2세기 전후에 살았던 사람으로 인도 최고의 사상가이자 불교 승려였던 나가르주나[龍樹]가 창안한 것으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사상이다. 이 공사상은 간단하게 말해서, 사물의 본성은 한마디로 비어 있다는 것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사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본성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것은 초기 불교에서 무아론이나 연기론을 더 발전시킨 설로 보면 된다. 어떤 사물이든 실체가 없이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 따라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좀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공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려면 항상 공(空)의 시각에서 조망해야 한다. 사물의 근본적인 모습은 근원적 실재라 할 수 있는데 이 절대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금강경』에서 "어떤 시각도 갖지 말고 생각을 내야 한다"는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딜레마는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갖지 않으면 그 사물을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절대적 실재는 존재하는 것 전부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 실재를 묘사하면서 x라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전체였던 실재는 x에 한정되기 때문에 더 이상 절대 실재가 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학파에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견해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나가르주나도 자신의 책에서 어떤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견해를 모두 논파하는 방법을 취한다. 만일 그가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면 그것 역시 절대 실재를 한정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에 기존 견해를 계속해서 부정하면 올바를 견해가 스스로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을 파사현정(破邪顯正, '잘못된 것을 부수면 올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사물 자체도 비어 있다고 주장하는 게 이 학파이다. 이 학파의 핵심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것 중에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경전은 뭐니뭐니해도 『반야심경』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나가르주나가 『반야심경』을 저술한 것은 아니다!). 『반야심경』은 300자 미만으로 된 경전으로 대승 철학의 핵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전을 다시 네 글자로 줄이라고 한다면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도 가능하다-으로 축약할 수 있다(세 글자로 줄이면 색시공이라고 해도 된다!). 이 경전은 우리 주위에서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승려나 불교도들이 예불할 때에 반드시 이 경전을 읽기 때문이다. 승려들이 예불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맨 처음 불상을 마주 보고 여러 가지 경을 읽으면서 그에 맞추어서 불상을 향해 절을 한다. 그것이 주된 예불인데 이 순서가 끝나면 승려들은 법당 옆에 걸려 있는 불화를 향해 서서 목탁을 치면서 경전을 읽는다. 이때 읽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존재들은 불교를 수호하는 신령들인데 승려들은 그들에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불교의 최고 진리인 『반야심경』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혹은 공즉시색이란 요즘 말로 하면 '있는 게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 정도가 될 터인데 이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좋은 시도가 될는지 모르지만 현대 물리학에서 제시하는 이론을 가지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책상과 같은 사물을 보면 그것을 딱딱한 고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미시적인 차원으로 내려가 보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최소 단위를 원자라고 놓고 보았을 때 원자란 가운데 아주 작은 핵이 있을 뿐이고 그 주위는 텅 비어 있다. 이것을 거시 세계로 보면 큰 야구장 한가운데에 야구공을 하나 놓은 꼴이라 하겠다. 원자핵은 그 공의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은 거의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과연 불교의 현자들이 이 사물의 세세한 모습을 직접 관(觀)하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불교와 현대 물리학이 물질에 대해서 갖는 생각이 비슷해서 재미있다.

 

대승학파 가운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학파가 있다. 중국의 현장법사가 7세기 중엽 인도에 갔을 때 그는 인도에서 불교가 이미 스러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인도에는 많은 종파들이 다 시들하고 방금 설명한 중론학파와 이제 설명하려고 하는 유식학(唯識學)을 내세웠던 유가학파(瑜伽學派, Yogacara)만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약 5세기경에 만들어진 유식학은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학파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할 때 Consciousness(혹은 Mind)-only School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학파의 주장은 사실 엄청나게 과격한 것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달이든 산이든, 책상이든 관계없이 모두 의식의 표상(representation 혹은 ideation)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외부의 사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학파에서는 절대적 실재, 즉 이 우주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이 학파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많은 신비가들은 우주의 실재를 대령(大靈, The Spirit) 혹은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으로 보았고 비슷한 맥락에서 불교의 다른 학파에서도 일심(一心, One Mind)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힌두교에서 개인의 가장 깊은 의식을 뜻하는 아트만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가장 깊은 의식이 우주에 실재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데에는 동양의 고등종교들이 모두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다. 우리의 의식만이 실재한다는 이 학파의 주장은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시키기가 어렵다.

 

이 학파와 연관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이 학파가 인간의 의식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을 매우 세세하게 분석했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는 감각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눈·귀·코·입·몸과 관계된 다섯 가지 의식이 있고 이것을 총괄하는 여섯 번째의 의식이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항용하는 의식이라는 용어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의식이라는 낱말은 불교에서 유래했고 불교 중에서도 이 유식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6식까지가 수면에 드러난 의식이고 그 다음부터는 잠재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6식 바로 밑에는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제7식인 마나식이 있다.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마나식 밑에 있으면서 가장 근본을 이루는 제8식이다.

 

이 식은 알라야식-한자 글자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표기함-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tore(-house) consciousness'라고 번역한다. 'store(창고)'라고 했으니 모든 것을 저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때문에 한자로 의역할 때는 장식(藏識)이라고 쓴다. 이 식은 사람의 의식 가운데 가장 기저에 있으면서 그 위의 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저장해 놓는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윤회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나 말·행동이 그대로 8식에 저장되고 그것들이 일종의 에너지가 되어 또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한 생각(혹은 욕망)을 내면 그것은 또 다른 생각(혹은 욕망)을 내게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굴러가기 때문에 그 힘으로 또 다음 생에 태어나야 할, 혹은 태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8식에는 우리가 말이나 행동은 고사하고 아주 가벼운 것이라도 어떤 생각을 하면 모두 저장된다고 한다. 이렇게 저장된 일정한 식(識)의 에너지는 나중에 그와 맞는 인연을 만나면 발현된다. 그러나 이때 또 어떤 생각을 하면 생각의 사슬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여기에는 나쁜 생각이나 말, 행동만 저장되는 것이다 니라 좋은 것들도 저장되고 그것도 역시 집착의 형태로 나중에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든 그 학파의 교리를 따르면 우리는 이 8식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의 종자(種字, seed)를 완전히 소탕했을 때에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됐을 때에만 윤회의 바퀴를 돌게 하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이론 역시 일반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깊은 명상을 해서 아주 깊은 의식까지 들어가야 이런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식의 잠재의식 이론은 서양 심리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서양에서 무의식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서양의 낭만주의 심리학자들이 유식학의 이론을 접한 이후라고 한다. 

 

 (2011. 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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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2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팬 할랍니다!
제가 처음 금강경을 접했을 때 `여여`를 남겨주었는데, 평생의 화두입니다. 아직도 못 배운 게 너무 많아요...

돌궐 2015-02-28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합니다.
알라딘 서재에는 이런 뜬금없는 걸 올려도 외면하지 않고 말씀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좋네요.ㅎ

AgalmA 2015-02-2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다뇨... 어디든 철학전반이 서양철학에 너무 치중된 감이 있는데(저도 부끄러운 점이기도)...돌궐님의 이런 글이 제게 연꽃향 같기도 합니다. 감사드려요

돌궐 2015-02-28 11:11   좋아요 0 | URL
아이고 연꽃향까지야... 근기가 워낙 높으셔서 금방 알아들으실 거 같은데요.ㅎ

AgalmA 2015-02-28 11:13   좋아요 0 | URL
으흑, 근기...가 제일 문제입니다. 관심사가 너무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