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4
아론 구레비치 지음, 이현주 옮김 / 새물결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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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聖畵라고 부르는 ICON은 매우 특이하게 그려진다. 이 그림에는 현대 미술에서 중시하는 원근법과 같은 기본적인 미술의 기초를 깡그리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콘을 보면 그림이라기 보다는 신앙에 관하여 그린 사람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콘을 볼 때면 의미보다는 신앙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를 찾는 것을 본다면 이콘은 현대적인 추상화와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콘에서는 매우 특이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주제가 아니라 등장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은자 시메온을 그린 그림이나 은수자 안토니오를 그린 이콘을 보더라도 제목상으로는 분명히 성 시메온과 성 안토니오가 주인공이지만 그림으로 볼 때 그들은 주인공의 위치에서 벗어나 조연의 위치에 머물기 때문이다. 언제나 중심에는 신과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같은 신앙의 핵심들이 자리잡고 있다. 즉 이콘은 우리에게 주제의 의미를 전달하는 보통의 그림이 아닌 것이다. 이콘은 절대적인 신앙의 견고함과 불변함 그리고 신비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다 신의 신앙을 전하는 도구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콘의 이런 특성을 통해 고대로부터 중세로 이어져 오는 중세 유럽의 개인관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렇게 유추해낸 중세의 개인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콘의 상징적 그림의 세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론 구레비치는 이런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회의를 표시한다. 과연 중세의 인간들은 종교적인 엄격주의에 함몰되어 있었을까? 아론 구레비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아니다라는 대답에 대한 긴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저자의 학설은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존의 중세적 인간관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것이다. 저자인 아론 구레비치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중세의 질서를 만든 그리스도교 이전에 유럽에 존재했던 원래 유럽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가 제일 늦게 전파된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사가에 주목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그리스도교화는 서유럽에 비해 100년에서 40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유럽이 800년경에 샤를마뉴에 의해 그리스도교화가 완성된 반면 스칸디나비아는 900년부터 12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그리스도교화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북유럽의 사가는 고대의 신화적 영웅전에서 보여지는 공동체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개인의 묘사 또한 분명히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신화적 영웅의 틀에 고정된 인간은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인 운명에 얽매어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개인의 모습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조금씩 변모하게 된다. 신앙의 특성상 개인적 요소가 많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신앙은 공동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리스도교화 과정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인 성찰을 통해 신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였다. 중세 시대의 수많은 성인들은 개인적 성찰을 통해 신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은 완벽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개인으로 머물러 있었다. 즉 그들은 개인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인간이었다. 반면 중세 후기에 아벨라르의 경우 공동체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개인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중세인이지만 근대적인 개인관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중세에 이렇게 공동체적이면서 개인적인 성찰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공동체적인 집단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죄의 구원에 있어서 개인의 참회와 회개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의 벌을 공동체가 책임진다는 고대적인 연대책임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통해서 아론 구레비치는 중세시대에 이미 개인주의의 싹이 발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이런 탐색 과정은 기사와 상인 계급을 다루면서 절정에 달한다. 기사계급과 상인계급의 가치관을 비교 분석하는 가운데 기사로 대표되는 중세성이 상인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에게 어떻게 밀려가는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이 현재 유럽인들의 개인성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된다(이 과정을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수량화 혁명을 참조할 것). 아론 구레비치는 이런 과정의 탐색을 공동체와 개인의 내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의 이런 연구를 따라가다보면 중세는 개인이 아닌 신앙의 시대였고, 개인성은 르네상스기를 통해 분출되었다는 선입견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선적인 과정을 따라 진행되지만 인간의 내면, 심리적인 측면은 선적인 역사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론 구레비치의 이런 결론은 좀더 실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로서 아론 구레비치는 또 하나의 중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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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 피귀르 미틱 총서 14
미레이유 도탱 오르시니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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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Salome,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서에 잠시 스쳐지나가듯 등장했다 사라지는 여자. 그녀는 신약이라는 거대한 시나리오에서 지나가는 행인 1에 해당되는 인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단역이 이후 만들어낸 신화적 모습은 가공할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춤추는 모습으로 등장해 자신의 어머니의 하수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어떻게 해서 압도적인 모습으로 재창조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살로메의 이야기가 이미지 중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구조로 인해 의미 중심의 신화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살로메의 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세부적으로 들어갔을 때 그 상황의 전개되는 모습일 뿐이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들은 살로메가 아주 야한 춤을 추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춤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결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장황한 신학적 해석은 관심 밖의 일이다. 왜냐하면 살로메의 이야기에서 원래의 중심적인 구조인 洗禮者 요한의 참수와 그에 따른 옛 질서의 소멸과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질서의 개막이라는 구세사적 의미는 춤추는 무희로 대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로메의 이야기에는 요염한 무희의 춤과 세례자 요한의 참수가 병행되는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이 두 병행하는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이해된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시공간적인 역사의 흐름에 속해 있는 이야기라면 살로메의 이야기는 광고처럼 단발로 끝나는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건보다는 이미지의 잔상이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살로메의 이야기의 핵심을 우리들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살로메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사성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살로메라는 인물이 표현하는 시공간적 장악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이미지는 시대를 거치면서 그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두 가지의 병립된 이야기는 살로메의 이미지를 더욱 세속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들이 신약성서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살로메의 이야기를 역사적 의미의 발전과 진화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살로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스트립 댄스라는 점이다. 그 춤과 예언자의 죽음이 혼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살로메는 고대 중근동의 여신들이 비너스, 칼리, 마리아의 도식으로 발전하는 것과는 달리 모성과 생식력이 부재한 여성성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근동의 여신들이 마리아로 통합되면서 비너스적 요소와 칼리적 요소가 순화된 반면 살로메는 이미지로 고정되면서 우리들이 알고있는 여성성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비너스나 칼리가 사랑과 죽음을 통해 재생의 모티브로 정착되고, 이런 재생적인 의미가 마리아에게 이식되어 완성을 본 것과는 달리 살로메는 여성의 수태와 생명의 탄생이라는 등식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이미지로 만들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살로메는 생식성과 재탄생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창부의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살로메의 관능성에 대한 우리의 과잉적인 포화상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매운 맛에 중독이 되어 더 매운 것을 찾듯이 살로메의 관능성에 대하여 더 충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을 그린 그림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초기에는 살로메보다는 세례자 요한의 목이 강조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요한의 목보다는 살로메의 일곱겹 베일에 감싸인 육체가 강조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요한의 목이 화면에서 사라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살로메의 이야기가 아무런 지시 대상도 갖지 못한채 공허한 관능성에 함몰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숨은 의미는 가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외모 지상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이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살로메 공주는 오늘 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문장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살로메의 이런 모습을 문학과 음악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문학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음악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분석하고 있다. 뒷부분의 음악에 관한 부분은 솔직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부분은 오래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읽었지만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분량은 다른 희곡에 비해 엄청나게 짧다. 그럼에도 이런 심오한 분석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살로메의 이미지가 유럽의 지성계에 끼친 충격이 대단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는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살로메를 다룬 작품들 수천편 가운데 엄선하여 수록한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몇몇 화가와 몇몇 작가 그리고 음악가의 이름이 눈에 익을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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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제의와 문학 - 신화상징총서
시몬느 비에른느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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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축일 가운데 파스카Pascha축제가 있다. 이 파스카는 영어로 번역할 때 Pass Over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하겠다. 이 파스카는 통과의 축제이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낼 때 이집트의 파라오가 반대하자 10가지 시련을 이집트에 내린다. 이때 마지막 재앙으로 이집트 전국에 있는 맏이는 사람이나 짐승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인들은 자신의 집 상인방에 양의 피를 발라 놓아 그 재앙을 피해간다. 이 통과의 의례를 통해 이집트의 이스라엘 인들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통과제의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의 세례의식 역시 물을 통과함으로서 과거의 나를 씻어버리고 미래의 새로운 나를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즉 통과는 기존의 방식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자신을 새로운 자신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인 메타노이아-회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통과제의를 의미하는 단어의 어근인 telos는 인도유럽어 queles에서 온 것으로, 이 어근의 의미는 밭갈이를 할 때 처음 반의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마치고 뒤로 돌아서는 바로 그 장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절이나 성당에 가면 입구에 洗心臺와 聖水盤을 볼 수 있다. 그 물로 마음을 씻고, 죄를 씻으면 속세의 장소에서 성의 장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통과는 성과 속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는 라비린토스에서 실타래를 가지고 그 어둠의 자궁을 통과한다. 그가 그 어둠의 미로를 통과함으로서 그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즉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영웅으로.

통과제의는 종교뿐만 아니라 비밀종교의 결사단체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게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무수한 존재들이 벌이는 통과제의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이다.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나는 육체적으로는 동일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나인 것이다. 바로 그 구분점이 통과제의인 것이다.

전혀 다른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통과제의이다. 저자는 문학에서의 통과제의적 문학의 첫 주요 작품을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또는 태평양의 끝>이란 작품으로 보고 있다. 시몬느 비에른느에게 태평양 상의 섬이 바로 신화의 끝이 되는 것이다. 이 섬에서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금 당나귀>에서 루키우스가 인간에서 당나귀로 변하는 그 순간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데 바로 그 점이 현실과 신화의 접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통과제의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낡은 자신의 허물을 벗고 자신의 존재를 쇄신하려는 욕구가 바로 통과제의의 시발점이란 사실이다. 통과제의는 존재론적인 위치변화를 통해 인간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신비적이건 현실적이건 자신의 삶의 무게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타협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내는 존재론적인 방어기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 문학동네의 <신화상징총서>가 처음 4권이 나왔을 때 그것을 모두 구입하였다. 그리고 그 네 권 이외에 M. 마페졸리의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 E. 모랭의 <영화와 상상력>, M. 엘리아데의 <야금술과 연금술>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간>, C. G. 융의 <황금꽃의 비밀>, G. 귀스도르프의 <신화와 형이상학>, G. 뒤랑의 <신화적 형상들과 작품의 얼굴>, G. 바슐라르의 <대지와 휴식의 몽상>, Y. 본느프와/ A. 베갱의 <성배를 찾아서>가 뒤따라 나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1996년에 이 책이 나온 뒤에 엘리아데의 <야금술과 연금술>이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로 본느프와의 <성배를 찾아서>가 <성배의 탐색>으로 나왔을 뿐이다. 나머지는 언제나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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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6-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스도르프의 <신화와 형이상학>과 바슐라르의 <대지와 휴식의 몽상>은 출간이 됐으며, 엘리아데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간>은 곧 출간 예정입니다. 참고로, 문학동네 출판사 측에서는 "신화상징총서"라는 시리즈를 포기한 모양입니다. 이들 책들 모두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dohyosae 2005-06-30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凹凸님, 고맙습니다.
 
1215 마그나카르타의 해
존 길링엄.대니 댄지거 지음, 황정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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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憲章으로 불리우는 마그나 카르타에 잉글랜드의 존 왕이 러미니드 초원에서 서명한 것은 1215년 이었다. 우리들은 존 왕이 서명한 이 문서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많은 학생들이 대헌장을 '군주의 압제에 저항하기 위한 민중들의 典據'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이런 일반적인 견해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존 왕의 실정에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강제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 문서에 강제적으로 서명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이 당시 귀족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은 대헌장의 첫머리 10개조에 나와있는 상속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확인의 반복이 문서 전체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에 우리들이 대헌장의 원칙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신보호'에 관한 것은 대헌장의 39와 40에 나와있을 뿐이다. 그것도 전체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니다.  

39. 자유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와 같은 신분의 동료에 의한 합법적 재판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는 한 체포, 감금, 점유침탈, 범익박탈, 추방 또는 그 외의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자유가 침해되지 아니하며, 또 짐 스스로가 자유민에게 개입되거나 또는 관헌을 파견하지 아니한다.

40. 짐은 누구를 위하여서라도 정의와 재판을 팔지 아니하며, 또 누구에 대하여도 이를 거부 또는 지연시키지 아니한다.

이 두 조항은 후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대에는 이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존 왕은 물론 귀족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조항은 단지 귀족들이 자신들의 불법을 자신들이 재판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이 재판을 돈을 받고 유리하게 만들거나 지연시켜 재판 당사자를 파산에 몰아 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즉 이 두 조항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기 보다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들 역시 왕이 이 문서에 서명은 하지만 잘 이행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귀족들은 이 문서를 통해 아무리 변덕스런 왕일지라도 행위의 예측이 가능한 정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대헌장은 수정되어 재발행되어 전국의 주법원 회의에서 돌려 읽었고(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대헌장은 1215년판이 아니라 1225년 발행본이다), 시몽 드 몽포르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법령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대헌장은 교회의 정문에 복사본을 못으로 박아 걸어두었다.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통치가 정도를 벗어날 때마다 인민들은 대헌장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시정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대헌장을 통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저항권'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들은 대헌장을 잘못한 군주가 있다면 이에 대해 인민이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대헌장에는 이런 내용을 언급한 조항은 없다. 저자의 말대로 한다면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는 대신 '오직 완벽한 저항을 나타내는 사려깊은 분별력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 사려깊은 분별력, 바로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이 8백여년이 다되가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이 책의 말미에는 대헌장 63조항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이 번역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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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속의 악마
장 디디에 뱅상 지음, 유복렬 옮김 / 푸른숲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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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장-디디에 뱅상은 생물학자이며 의사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바라보는 시각은 의학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작가인 장-디디에 뱅상은 악과 인간의 관계를 생물학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육체를 끊임없이 해부하고 관찰한다. 이런 그의 방법은 신학자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라 하겠다. 신학자에게 악이란 윤리적인 문제지만 과학자에게는 생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즉 신학자들은 악에 대한 끊임없는 참회와 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의 존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반면 과학자들에게 있어 악은 뇌의 구조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뇌의 신비가 완전하게 해석되지 못한 현재에 있어서 악은 과학자들에게는 명료한 것이라기 보다는 불명확한 것이다. 반면에 신학자들에게 있어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분명한 명제로 나타난다. 여기서 선이란 무엇인가는 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한다. 즉 자신들이 모범으로 삼는 사람의 길을 따르는 것이 종교의 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악이되는 셈이다. 하지만 뱅상의 논의에 따르면 과학에서는 선과 악의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에서처럼 명료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뱅상은 인간의 악에 대해서 죽음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은 악과 타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그 타협의 다야한 유형은 문학의 다양한 장르에서 찾아 볼 수 있기도 하다. 이것은 종교에서 언급하는 영원한 삶의 시작인 죽음과는 대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뱅상은 악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로서 인간을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성서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과 맥이 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뱅상은 서구 사회가 기독교적 사고관으로 인해 신의 존재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악마 역시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인간은 영장류로서 투쟁을 통한 진화의 과정에서 승리한 개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의 은총이 있었다면 악마의 훼방 역시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학이 신의 존재증명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듯이 자신의 생물학은 '악마와 관계하는 인간학'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신과 악마는 형이상학 존재가 아니라 형이하학적으로 우리에게 와있다는 입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을 찾기 위해 인간이 노력하는 것처럼 악마와 타협하기 위해 일탈행위를 하는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뱅상은 그것을 이 책의 제목처럼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과학적 접근을 통해 종교적으로 회귀한 것일까?

* 쿨리지 효과란 미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 서부의 한 농장을 방문한 쿨리지 대통령은 부인이 갑작스레 달려와 황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40마리의 암소와 교배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야 당연하지, 여보. 파트너만 바뀐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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