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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 피귀르 미틱 총서 14
미레이유 도탱 오르시니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6월
평점 :
살로메Salome,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서에 잠시 스쳐지나가듯 등장했다 사라지는 여자. 그녀는 신약이라는 거대한 시나리오에서 지나가는 행인 1에 해당되는 인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단역이 이후 만들어낸 신화적 모습은 가공할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춤추는 모습으로 등장해 자신의 어머니의 하수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어떻게 해서 압도적인 모습으로 재창조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살로메의 이야기가 이미지 중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구조로 인해 의미 중심의 신화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살로메의 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세부적으로 들어갔을 때 그 상황의 전개되는 모습일 뿐이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들은 살로메가 아주 야한 춤을 추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춤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결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장황한 신학적 해석은 관심 밖의 일이다. 왜냐하면 살로메의 이야기에서 원래의 중심적인 구조인 洗禮者 요한의 참수와 그에 따른 옛 질서의 소멸과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질서의 개막이라는 구세사적 의미는 춤추는 무희로 대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로메의 이야기에는 요염한 무희의 춤과 세례자 요한의 참수가 병행되는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이 두 병행하는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이해된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시공간적인 역사의 흐름에 속해 있는 이야기라면 살로메의 이야기는 광고처럼 단발로 끝나는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건보다는 이미지의 잔상이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살로메의 이야기의 핵심을 우리들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살로메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사성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살로메라는 인물이 표현하는 시공간적 장악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이미지는 시대를 거치면서 그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두 가지의 병립된 이야기는 살로메의 이미지를 더욱 세속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들이 신약성서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살로메의 이야기를 역사적 의미의 발전과 진화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살로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스트립 댄스라는 점이다. 그 춤과 예언자의 죽음이 혼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살로메는 고대 중근동의 여신들이 비너스, 칼리, 마리아의 도식으로 발전하는 것과는 달리 모성과 생식력이 부재한 여성성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근동의 여신들이 마리아로 통합되면서 비너스적 요소와 칼리적 요소가 순화된 반면 살로메는 이미지로 고정되면서 우리들이 알고있는 여성성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비너스나 칼리가 사랑과 죽음을 통해 재생의 모티브로 정착되고, 이런 재생적인 의미가 마리아에게 이식되어 완성을 본 것과는 달리 살로메는 여성의 수태와 생명의 탄생이라는 등식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이미지로 만들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살로메는 생식성과 재탄생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창부의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살로메의 관능성에 대한 우리의 과잉적인 포화상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매운 맛에 중독이 되어 더 매운 것을 찾듯이 살로메의 관능성에 대하여 더 충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을 그린 그림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초기에는 살로메보다는 세례자 요한의 목이 강조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요한의 목보다는 살로메의 일곱겹 베일에 감싸인 육체가 강조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요한의 목이 화면에서 사라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살로메의 이야기가 아무런 지시 대상도 갖지 못한채 공허한 관능성에 함몰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숨은 의미는 가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외모 지상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이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살로메 공주는 오늘 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문장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살로메의 이런 모습을 문학과 음악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문학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음악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분석하고 있다. 뒷부분의 음악에 관한 부분은 솔직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부분은 오래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읽었지만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분량은 다른 희곡에 비해 엄청나게 짧다. 그럼에도 이런 심오한 분석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살로메의 이미지가 유럽의 지성계에 끼친 충격이 대단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는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살로메를 다룬 작품들 수천편 가운데 엄선하여 수록한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몇몇 화가와 몇몇 작가 그리고 음악가의 이름이 눈에 익을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