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람들 히스토리아 문디 9
아일린 파워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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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럽 중세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인물은 평범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평범한 인간들의 삶을 통해 중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농부와 여행가와 수도자와 상인들이 등장한다. 마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중세에서 근세로 나온듯한 착각을 갖게한다. 의도적인(?) 이러한 구성은 어쩌면 저자가 이 책을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대한 존경을 담은 '미장센'으로 기획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그만큼 이 책의 주제는 초서의 글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를 크게 요동치게한 인물들은 아니다(이런 단정에서 항상 마르코 폴로는 빠져야만 한다). 오히려 역사의 격랑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교회와 시청의 문서고에 먼지를 쓴채 버려져있던 기록을 통해 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생동감있게 드러내어 재창조하고 있다. 저자는 각 인물들의 삶을 추적해 가면서 중세속에 드러나는 근대성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중세의 전근대적인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글쓴이의  탁월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이 책은 1924년에 출판되었다).

중세 시대는 인간의 개성을 신성이라는 거대한 체제속에 묻어 버린다는 도식으로 상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고정관념으로 변하여 중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새로운 시각을 방해하곤 한다. 이 책은 이러한 편향성을 극복하고 중세의 참모습을 바라보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인물은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잘 알려졌지만 당대에는 수많은 여행가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는 당시 유럽에 새로운 정보를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살아있는 동안이 아니라 죽은 뒤에 출판된 책에 의해 확대되었다. 그의 여행기는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의 정보였다. 그 정보의 불완전함은 새로움이란 단어에 의해 상쇄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여행기는 결국 콜럼버스의 대서양횡단과 아메리카 대륙의 재발견으로 까지 이어진다. 즉 한 평범한 개인이 촉발한 호기심이 거대한 폭발력으로 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서 감지할 수 있다.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파리의 메나지에라는 사람과 양모업자 토머스 벳슨, 직물업자 토머스 페이콕으로 이어지면서 중세에 싹튼 근대성을 우리들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즉 저자는 근대의 산업혁명이 발생하게 된 유럽의 역사를 이런 과정을 통한 필연성으로 보고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기에 이들 메나지에나 벳슨, 페이콕과 같은 사람들의 신앙과 사고방식의 재조명은 중세의 폐쇄성에 대한 저자의 단호한 거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특히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부분은 마담 에글렌타인의 장이었다. 이 장을 통해 잉글랜드 가톨릭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가톨릭은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섬에서는 거의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마담 에글렌타인의 장은 이런 몰락 이전의 잉글랜드 가톨릭-특히 수도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수많은 공적 문서와 개인적 서신과 문서에 주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중세는 소수의 영웅들이 독단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 한 시대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들의 힘이 근세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전진한 시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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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정 - 자율적 반란의 역사
이브 프레미옹 지음, 김종원.남기원 옮김 / 미토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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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인간들이 희구하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담과 이브의 세계와 같은 그런 세계, 혹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같은 세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아직껏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세계는 우리들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세계는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었고 분쇄되었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기존의 권력질서와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로마제국의 증오를 받아야만 했던 것은 그들의 구호가 아니라 감히 노예들이 지배자와 똑같은 흉내를 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지배자에게 있어 노예는 노예다워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명제를 벗어나는 행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스파르타쿠스 이후 모든 기성체제-좌파든 우파든-는 이런 로마제국의 기본명제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즉 기성 제도는 밑으로부터 자율적으로 형성된 도전 세력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가장 극명한 사례는 아마도 스페인 내전이 아니었을까? 인민전선 내부에서 벌어졌던 그 치열한 아수라장은 지배 세력이 자율적인 혁명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이것은 권력을 소유한 자나 그것을 휘두르는 자는 권력의 형태에 관계없이 서로 닮아있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 나타나는 수 많은 시험적인 시도는 그 혁신 혹은 과격함을 넘어서 권력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두려움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극도의 불신에 기인한다하겠다. 로마의 大 카토가 그랬던가... 노예가 생각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지배자는 모든 대중을 생각을 하지 않는 유기체로 만들려 한다. 일사불란함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호이다. 다양성 혹은 자율은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혁명 혹은 새로운 시도는 일사분란함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성취하고자하는 열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율성의 표출은 철저하게 억압을 받는다. 그 억압의 이유는 무질서에 대한 질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편견을 만나게 된다. 질서는 좋은 것, 무질서는 나쁜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의 세계는 다 나쁜 세계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중세 시대 천년왕국의 이단들이 지향하던 아담과 이브의 낙원은 당시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무질서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세의 확고한 질서-신이 내려준 법칙-아래 이들 인간자율성을 추종하던 무리들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이 책은 권력의 속성은 선한 권력이나 악한 권력-권력에도 선과 악이 존재한다면- 모두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 역시 인간 자율성의 폭발이라는 관점에서 너그럽게 보아준다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제목에서처럼 오르가즘을 느낄 여유가 없다. 오르가즘 대신 임포텐츠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권력 이라는 질서 아래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회복하려던 실험들이 실패하고 배반을 당했는가는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이다. 실패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다. 실패의 사례만을 모아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은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90년대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이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기념품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성의 고귀함을 추구하는 것마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간 자유에 이르는 길의 험난함과 그 소중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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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찾아서 - 중세학의 대가 자크 르 고프가 들려주는 중세의 참모습
자크 르 고프.장-모리스 드 몽트르미 지음, 최애리 옮김 / 해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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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학계는 20세기 초에 역사를 인물의 역사에서 민중의 삶으로 촛점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학에서 "교회 밖에서 구원은 없다"라는 명제를 폐기한 것과 유사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후 서구 사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거시적인 역사와 미시적인 역사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역사 연구의 발전에 힘입어 중세의 모습 또한 다르게 조명될 수 있었다. 과연 중세는 신만이 존재하는 세계였는가?라는 물음에 서구의 학자들은 '인간도 존재했었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도시와 성당에 널리 산재해 있는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유럽의 중세는 새롭게 기술될 수 있었다. 메노키오의 이야기나 마르땡 게르의 이야기, 몽타이유 마을의 이야기는 이런 방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중세의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재발견되었으며, 재평가 받았다. 이렇게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유럽의 중세는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중세는 말 그대로 고대와 근대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중세는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神國Civitas Dei"였다.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이 신적 질서 속에 모든 인간의 삶을 쾌맞추려던 시도는 절반의 성공을 수반한 절반의 실패였다. 신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데는 실패하였지만, 인간들을 하늘로 인도하는데서는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전반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지배하였다면, 후반부는 성 토마스의 신학이 지배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하였다. 그는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가지 색으로 분산되듯 신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파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성 토마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반대의 생각을 하였다. 그는 신의 다양함을 이해하여 하나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다. 즉 신의 다양한 빛의 세계가 프리즘을 통해 하나의 빛으로 환원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중세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는 신의 절대성을 성 토마스를 통해서는 인간 이성의 다양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는 근대로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절대적 신성에서 인간 이성의 다양함으로 접근하였다. 물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는 자신들의 신학이 이렇게 변질(?)될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 두 성인은 자신들의 신학이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를 고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의 진리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금의 역사보다 한단계 더 진보된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가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전 시대의 모순에 깊은 숙고를 하고 실천하였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순이 확실히 제거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진행형이란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세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매력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지나치게 이상화되거나 비하할 필요는 없다. 넘치는 것은 부족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세를 바라보는 세계는 중용의 눈길이 필요하다. 편협된 종교관과 인간관은 중세를 비하한다. 하지만 너무 관대하게 중세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무모한 낙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중세는 미묘하게 우리들에게 호기심과 인내를 강요한다. 그 호기심과 인내의 안내서로서 '중세를 찾는것'은 '중세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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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일본 - 닌자와 하이쿠 문화의 나라
모로 미야 지음, 김택규 옮김 / 일빛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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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모든 사물과의 관계는 道와 연결된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道라는 단어로 치환시킨다. 이 과정에서 일본적인 문화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들의 道는 도덕경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와 같은 현묘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道는 철저한 신분질서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이런 심성을 옹恩이란 개념으로 철저하게 해부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에게 주고받음의 관계가 바로 질서이며 道인 것이다. 차를 마시는 茶道의 경우도 그렇다. 그 복잡한 의식 속에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주인은 베풀고 손님은 그 과정의 수혜자로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 어떤 불필요한 개입이 필요없다. 茶道의 도식적인 관계 속에서는 인간적인 모습보다는 질서의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 그 관계와 질서의 이야기는 道이면서 모노가타리物語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인들에게 모노가타리는 또 다른 질서의 기술이며 또 다른 道의 창조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결코 중단될 수 없는 道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질서에 대한 확고함이며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서구인들에게 70년대 중국은 '푸른 개미들의 나라'였다. 일본은 이런점에서 질서의 나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중요한 道는 무엇일까? 노벨상 수상자 川端康成는 와카和歌, 하이쿠, 다도, 선학을 일본의 미로 열거하였다. 물론 川端의 이러한 언급은 자국 문화에 대한 일종의 장식이며 배려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본의 문화보다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일본의 문화, 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우리들의 상식에 부합하는 약간은 통속적인 일본의 미, 혹은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향락적이거나 현학적인 모습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의 일본적인 미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제일 앞에 나오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경우도 그렇다. 많은 일본 문학작품 속에 기술되어 있는 지극히 일본적인 인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왜 일본인들은 미야모도 무사시의 세계로 침잠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일본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낸다. 목욕문화와 닌자의 세계, 세시 풍속을 통해 일본인들이 몰입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보여준다. 온나노세쿠를 통해 '축소지향적인 일본'을, 마네키네코를 통해 하나의 상품을 브랜드화하는 일본의 상술을 대조적인 옛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분석하는 일본인들의 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 섬뜻한 것은 유태인의 구세주라고 불리우는 일본의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衫原千畝의 이야기가 제일 나중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인의 심성 가운데 가장 낮은 순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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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2009-04-0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코앞에서 본 중세 - 책, 안경, 단추, 그 밖의 중세 발명품들, 역사도서관 003 역사도서관 3
키아라 푸르고니 지음, 곽차섭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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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는 필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대방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상대를 아주 하찮게 기록하는 필법이다. 이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상대를 강하게 표현함은 그만큼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강한 상대방을 이긴 자의 더 강함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반면에 두번째 방법은 역사의 필연성에 중점을 둔다. 자신과 싸운 상대방이 이러 이러 해서 결국은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이론에 대한 단점은 의구심이다. 즉, 상대가 약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결국은 붕괴되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중세를 바라보는 우리들 역시 이런 장단점에 봉착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중세를 기술할 때면 그 시기는 암흑이다. 그래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을 무리없이 설명 할 수 있다. 반면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는 태양이다. 하지만 이 태양의 밝음은 종교재판과 체제의 경직성이라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에 가톨릭이 매끄럽게 승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세가 암흑이었다는 이론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서구 학계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학계의 주장과 대중의 사고 사이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런 융화될 수 없는 간극을 매우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중세의 현실을 대중들에게 보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부분적으로 효과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를 종교적 사회로 규정하는 한 그 노력은 한계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를 지배한 가톨릭은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수구보수의 논리로 후스를 화형시키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침묵하게 했으며 사보나롤라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사적인 혹은 사상사적인 면으로 볼 때 중세는 정지되어 있던 시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이던 시대였다. 성직자, 귀족, 농민으로 구성된 무너질 수 없는 신적 위계질서의 사회였지만 과학의 발전은 이런 구조를 뛰어 넘었다. 수평으로 설치된 물레방아가 수직으로 개량되고 인력이나 축력 대신 자연의 힘을 이용한 풍차나 가축의 마구 개량과 같은 것은 중세가 우리들의 판단처럼 간단하게 고정적이고 불변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나벤투라,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를 통해 재해석하여 철학이 신학에 큰 충격을 주게 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정신적인 모습은 간단하게 암흑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책은 중세의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중세의 발전과 기술적 혁명에 대한 기록이란 것이다. 저자는 이런 기록을 통해 중세의 모습이 고여있는 연못의 썩은 물이 아니라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물꼴이 개방된 신선하고 살아있는 연못, 즉 개방된 중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개방된 모습은 우리에게 희귀한  중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사실 중세 유럽의 모습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중심에 도이칠란트가 가세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고정적인 중세의 모습에 이탈리아의 중세 모습이 보여진다는 것은 무척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게한다. 이탈리아라는 희소성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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