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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정 - 자율적 반란의 역사
이브 프레미옹 지음, 김종원.남기원 옮김 / 미토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이 세상의 인간들이 희구하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담과 이브의 세계와 같은 그런 세계, 혹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같은 세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아직껏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세계는 우리들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세계는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었고 분쇄되었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기존의 권력질서와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로마제국의 증오를 받아야만 했던 것은 그들의 구호가 아니라 감히 노예들이 지배자와 똑같은 흉내를 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지배자에게 있어 노예는 노예다워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명제를 벗어나는 행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스파르타쿠스 이후 모든 기성체제-좌파든 우파든-는 이런 로마제국의 기본명제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즉 기성 제도는 밑으로부터 자율적으로 형성된 도전 세력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가장 극명한 사례는 아마도 스페인 내전이 아니었을까? 인민전선 내부에서 벌어졌던 그 치열한 아수라장은 지배 세력이 자율적인 혁명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이것은 권력을 소유한 자나 그것을 휘두르는 자는 권력의 형태에 관계없이 서로 닮아있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 나타나는 수 많은 시험적인 시도는 그 혁신 혹은 과격함을 넘어서 권력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두려움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극도의 불신에 기인한다하겠다. 로마의 大 카토가 그랬던가... 노예가 생각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지배자는 모든 대중을 생각을 하지 않는 유기체로 만들려 한다. 일사불란함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호이다. 다양성 혹은 자율은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혁명 혹은 새로운 시도는 일사분란함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성취하고자하는 열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율성의 표출은 철저하게 억압을 받는다. 그 억압의 이유는 무질서에 대한 질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편견을 만나게 된다. 질서는 좋은 것, 무질서는 나쁜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의 세계는 다 나쁜 세계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중세 시대 천년왕국의 이단들이 지향하던 아담과 이브의 낙원은 당시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무질서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세의 확고한 질서-신이 내려준 법칙-아래 이들 인간자율성을 추종하던 무리들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이 책은 권력의 속성은 선한 권력이나 악한 권력-권력에도 선과 악이 존재한다면- 모두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 역시 인간 자율성의 폭발이라는 관점에서 너그럽게 보아준다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제목에서처럼 오르가즘을 느낄 여유가 없다. 오르가즘 대신 임포텐츠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권력 이라는 질서 아래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회복하려던 실험들이 실패하고 배반을 당했는가는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이다. 실패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다. 실패의 사례만을 모아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은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90년대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이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기념품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성의 고귀함을 추구하는 것마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간 자유에 이르는 길의 험난함과 그 소중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