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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50문 50답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지음, 김현숙 옮김 / 혜안 / 2001년 10월
평점 :
천황이란 용어는 참으로 오묘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도교에서 언급되는 천.지.인의 3황 가운데 하나로 세상을 주제하는 천황. 인황. 지황 가운데 하나의 명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천황이란 단어는 왕이나 대왕처럼 어떤 권력적인 요소보다는 천자와 같이 불가촉적인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王-기미-이 大王-오오기미-으로 바뀌고 다시 이것이 天皇-텐노-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천황이란 칭호가 성립되는 시기는 40대인 天武 大海人-텐무 오아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신라.백제.고구려의 정립시대가 끝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때부터 왜국은 자신들의 국호를 일본이라 하고 왕의 명칭을 천황으로 바꾸면서 독립적인 국가로 나간다는 사실은 의미심상하다고 하겠다.
천무 이후 일본 역사를 보면 천황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으로 등장할 뿐이다. 이때부터 역사의 주인공은 무력을 앞세운 소가-蘇我-씨,후지하라-藤原-씨, 다이라-平-씨,호조-北條-씨, 아시카가-足利-씨등이 권력을 장악한다. 이렇게 되면서 천황은 정치적 실권자에서 밀려나 일본이란 나라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초기 일본을 방문한 신숙주가 기록한 해동제국기에도 당시의 무가 지도자인 아시카가씨를 일본의 왕으로 기록하고 외교문서의 수령인으로도 천황이 아니라 무가정권의 지도자를 기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의 존재는 양국에서 공히 무시해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천황의 존재가 급부상한 것은 명치-메이지-유신 이후 존왕파에 의해 급조된 천황관 때문이다. 당시 존왕파들은 蘭學-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학문-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서유럽 국가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토,국기,국가,국왕이란 상징체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이 서구적 체제에 맞추어 존황파들은 이제 천황은 일본이란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의 상징으로서 거기에 걸맞는 의식체계가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즉 천황의 성역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정치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한 일본에게 커다란 불행으로 다가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제국의 실패는 일본의 존왕파들이 영국의 왕실을 대영제국과 인도를 지배하는 지도자로만 인식을 했지 어떻게해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명치유신 이전의 천황의 모습-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이 가장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자국에 걸맞는 모습인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근거가 없던 일본의 지도자들-영국의 지도층이 귀족인 반면 이들은 하급 무사출신이었다- 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천황제를 옹호하면서 획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허울뿐인 제도였다. 이 제도의 취약함은 후에 2.26사건이나 5.15사건에서 보듯 군부가 의회를 무력화시켰을 때 이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천황의 말 한마디였다. 이는 의회 자체가 천황제의 장식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말 그대로 무력하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다시 이전의 정치 질서로 돌아가게되었다. 즉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천황을 정치에서 분리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천황을 정치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려는 일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일본의 장래에 어떤 모습을 제공하게 될까? 일본이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켜 패배한다면 그때는 일본이란 나라와 함께 천황제도 영원히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일본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집필을 했다고 하지만 행간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일본적인 시각은 불현하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소감의 결론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