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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을 읽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최장집의 제자이자 에피고넨을 자처하는 소장 정치학자다. 최장집의 정당론, 민주주의론, 한국정치에 대한 생각 등이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이 얇은 책에서 스승의 그림자는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책은 박상훈이 진보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했던 강의를 정리한 것이자, “진보에게 말걸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회의 진보적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진보 ‘안쪽에’ 있지만, 막스 베버와 같이 전통적으로 보수적으로 분류되었던 이론가들을 끌어들여 진보 ‘밖의’ 시각을 도입해 진보정치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을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한겨레 지면에서 벌어진 진중권(2.28)과 김규항(2.9)의 논쟁을 보게 되었다. B급 좌파임을 자처하는 김규항은 조국이나 오연호와 같은 “중산층 엘리트”들이 진보를 전유하는 것을 못 마땅해 한다. 스스로를 진짜 진보라고 생각하는 그는 대단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진보를 전유하고, 그가 설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담론과 사람들은 개량주의로 치부하는 듯하다. 진중권은 예의 그 신랄한 태도로 김규항을 비판하는데, 그의 레떼르 붙이기는 “철인 좌파의 딱지치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이다. 말하자면, 진중권은 척박한 진보정치의 토양위에서 연합정치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반면, 김규항은 매우 엄격한 잣대로 그것은 진보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보여주는 시각은 김규항이 아니라 진중권의 시각이다. 박상훈의 주장은 “과도한 확신과 비타협적 이상주의는 비정치적 사고의 산물일 때가 많으며, 결국 현실의 복잡함과 갈등 속에서 성과를 일궈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비난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운동과 이념의 논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고 역사발전에 대해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하고 공격적이다”라는 것이다. 박상훈의 이 책은 진보가 ‘정치’를 외면해 왔음을, 진보가 해온 것은 스스로 진리의 담지자임을 자임한 채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노력들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정치 ‘이전’의 행태라고 비판한다. 나는 박상훈의 논리에, 따라서 진중권의 논리에도 수긍하고 찬성하는 편이다.
박상훈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적인 부작용의 가능성 내지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는 도덕적 선의 세계는 아닐 지라도, 그날그날의 일상적 실천을 통하여 선의 세계로 나아가는 행위일 것이다. 정치가 도덕적이지 않다하여 정치 그 자체를 부정하고 反정치로 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 외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베버)
마르크스주의는 한국사회에서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고, 현실로서 작동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이데올로기’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는 규준이거나 이념형을 제공할 뿐이지 현실의 질서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상당수 좌파들은 근본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힌 채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구조’로 돌려버리는 허무주의적인 환원론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노동해방’이니 ‘인간해방’이니 하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담론들이고, 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내 눈앞의 ‘사장님’과 싸워야 하는 것인지,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담론 속에는 “정치가 없다.”
김규항은 B급 좌파로서 “좀 더 왼쪽에서” 서 있으며, 비판적 지지론이나 연합정치론과 같은 개혁주의적 시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형적 비판에 치중하고 있는데, ‘담론상’으로 그를 지지할 수 있다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를 지지하긴 어렵다. 그도 어린이 교양잡지인 <고래가 그랬어>를 팔아먹어야 하는 출판자본의 일원이고, 과거에도 <영화언어>와 같은 책을 만들어 팔았던 전력이 있으니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란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 시각과 차이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접하는 장이기에 불가피하게 그것은 “정치적 경쟁”의 과정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신학적 세계에서는 불가침의 신적 영역이 존재하겠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독점되는 세계는 없다. 이 책에서 줄곧 박상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런 정치의 속성이다.
다시한번 역사를 따져봐야 할 문제겠으나, 레닌이 그토록 조롱했던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의 ‘수정주의 노선’이 과연 “배신자”로 비판받아야할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혁명의 시대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의 시대/정치의 세계에서는 불가피한 수정이 존재하며, 수정 그 자체가 아니라, 수정의 내용이 문제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맹신하는 사람들, 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민중의 힘을 운운하는 사람들(어쩌면 최장집의 ‘차가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밀양의 고등학교 선생 이계삼 같은 사람까지도), 추상적 담론의 포로이자 스스로가 만든 ‘게토’속에 함몰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매체인 레디앙이나 진보신당 게시판 같은 데에는 이런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정당을 필요로 하고, 그 좋은 정당은 한 사회내의 이익갈등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대표할 때 가능하다는 최/박 두 사람의 주장을 나는 신뢰한다. 촛불로 표현되는 ‘거리의 정치’는 열망과 실망의 주기적 반복을 통해 정치적 패배주의만을 양산할 뿐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 ‘국가란 부르주아의 정치위원회’라는 식의 규정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북한 지도부만큼이나 한국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근거없는 과도한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이라니. 국가는 공공성의 최후 보루로서 개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타도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이 책에서 또하나 새겨 들어야할 대목은 진보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가진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다. 진보진영에서 작은 정치적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들은 많은 경우 험악한 비난으로 끝이 난다. (내가 레디앙의 댓글들을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인 것처럼 비난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이니, 거기서 연대의 정치니, 연합정치니 하는 것은 애시당초 기대할 게 못된다. 윤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거 구 주사파에서 제기된 ‘품성론’이라는 도덕적 환원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없지 않겠으나, 세련되고 품위있는 진보정치인이 잘 눈에 띄이지 않는다는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거론하는 오바마의 연설이나 미국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와 관련된 대목은 두고두고 읽어볼 만하다.
“정치적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무지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 진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의 존중,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 등을 내용으로 한다. 그 기초 위에서 진보가 진보다워야 할 것이다. 진보적인 것을 위해 정치를 부정하면 안된다. 진보는 지금보다 더 그리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할 것이다.”(174쪽)
그런데, 박상훈에게 이 책의 후속작으로 ‘보수에게 말걸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진보는 말귀라도 통하지만, 보수는(특히 가스통 보수는) 말귀도 안 통하니,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만, 제발 누구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불확실하며, 무지의 가능성도 있고, 이념과 가치가 다원적이며,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초보적 상식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을까. 기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비판하고 있는 “반정치”의 태도는 진보가 만들었다기보다, 해방이후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보수정치”가 만들어낸 유산이 아니던가.
또하나, 진보적 사회학자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어떤 분은 어느 정권을 비판하면서 정치가로서의 덕목은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은 박상훈의 논지와 통하는 데가 있다. 선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과 손잡고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설파했던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의 향방이 궁금하다. '선의'는 빠져 있고, '마키아벨리즘'만 남은 것은 아닌지? 아니 그 마키아벨리즘 조차도 최악의 것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조차도 아니라면, 선의도 사라지고, 마키아벨리즘의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퇴행만을 반복한 것은 아닌지, '국가몰락'이라는 '신화'를 비판하며, 유능한 국가를 세우리라 다짐했던 그의 요즘 생각은, 과연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다.
PS. 여기 인용된 군주론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라 남겨둔다. “운명은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 아무런 힘도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할 수 있는 제방이나 둑이 없는 곳을 덮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녀를 얻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하다. 운명은 여신이므로 그녀는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린다. 젊은 사람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