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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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쓸 생각이 없던 책이었다. 읽은 지도 꽤 돼서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간만에 쓰는 글로 안도 유스케의 『책의 엔딩 크레딧』을 고른 이유는 얼마 전 파주 출판단지를 다녀온 까닭이었다. 노을 지는 저녁 즈음, 친구와 산책하다 인쇄소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하나 보다, 용지 묶음인가 보다 등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이 책이 떠올랐다.


보통 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작가의 고뇌, 출판사 혹은 편집자와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그런 이야기에서 전자는 세상에 대한 을, 후자는 작가에 대한 을로 표현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훨씬 더 이면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앞의 두 존재 모두에게 을인 ‘인쇄 회사’이다.


‘도요즈미인쇄 주식회사’를 주 무대로, 영업맨 ‘우라모토 마나부’의 포부 실현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라는 마인드를 가졌다. 모노즈쿠리는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가 합성된 용어로,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낭만 가득한 각오는 유능한 영업 2부의 ‘나카이도 고지’의 꿈과 배치된다. 나카이도의 꿈은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라모토는 그의 무미건조함에 반박하지만, 나카이도 역시 순수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라모토는 결과로 증명할 것을 다짐하며 대결 아닌 대결이 펼쳐진다.


총 5장에 걸쳐 책에 대한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우라모토와 동기이면서 ‘후지미노 공장 인쇄제조부’의 총괄자 ‘노지에 마사요시’는 책 인쇄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작업쯤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의 낭만을 증명하려 무리한 일감을 물어오는 우라모토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픈 처남의 병원비까지 그가 책임져야했다. 이런 스트레스가 쌓여 결국 그는 옳지 못한 방법으로 화풀이하게 된다. 아빠가 만들었다며 두 아들이 좋아하는 책을 눈앞에서 찢어버린 것이다. 죄책감까지 얹힌 그의 일상은 지속적으로 꼬인다.


반면, 함께 일하는 별색 제작 기술자 ‘요시자키 지로’는 일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의 작업은 감각이 뛰어난 장인만 할 수 있는 일이며, 그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노지에의 멘토가 되어준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후쿠하라 에미’는 원고를 인쇄 레이아웃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한다. 워낙 독서를 좋아해서, 타자로 옮기며 사전에 글을 미리 읽을 수 있음을 최고의 직업 가치로 삼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나카이도는 지향하는 바대로 안전을 중시한다. 을의 입장에서 출판사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지만, 무리인 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우라모토를 자제하는 컨트롤러로 작용한다.


무리하게 일감을 물어오든, 안정적으로 대비하든 인쇄소의 하락세를 막기란 버거웠다. 바로 ‘전자책’ 때문이었다. 인쇄 회사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쟁 상대인 셈이다. 유명 작가가 전자책을 옹호하면서 인쇄소에 비상이 걸렸다. 종이책과 전자책 중 무엇이 득인가라는 갑론을박이 펼쳐질 때, 우라모토의 건의로 두 종 동시 발행을 기획한다. 무엇이 나은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공공의 적과 공동의 목표가 생긴 덕분에 서로의 입장만 대변하던 인물들이 하나로 뭉쳐 갈등 해소의 계기를 얻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의 선택은 인쇄기를 한 대 줄이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하락세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책 제작에 열과 성을 다했다. 노지에는 직업의 자부심을 얻었고, 나카이도는 현실적인 꿈(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친다)과 이상적인 꿈(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이다)이 결국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라모토의 증명은 반쯤만 완성되었지만, 개개인에게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줬다.


줄거리를 엄청 축약한 부분은 내용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감동만 남았달까. 책을 좋아하지만, 내 기준은 작과와 출판사에만 머물러 있었다. 인쇄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밥 먹을 때 익명의 농부에게 감사한 적은 있지만, 독서할 때 익명의 인쇄소 직원에게 감사한 적은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이면에서 노고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물론 값을 치르고 구매하는 입장이니 감사의 마음이 의무는 아니다.) 간과했던 부분을 깨닫게 해준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책 내용에 대한 느낌을 전하자면, 장을 구성한 소제목 흐름은 탁월했다. 각각의 소제목은 해당 에피소드에서 진행되는 책의 제목이다. 동시에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라는 이상을 향한 흐름과 함께한다. 감안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늘 그렇듯이 순탄하게 풀리는 사건은 지루함을 유발했다. 내적 갈등에 중점을 두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외적 갈등에 집중하면 읽는 속도가 더뎌졌다. 모노즈쿠리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아닌,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이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지정해두고 끼워 맞추는 식의 진행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인쇄 회사에서 책 제작에 진심인 사람만이 모노즈쿠리이다’로 귀결되면서 방향을 잃은 느낌이었다. ‘인쇄 회사’가 아닌 ‘인쇄 작업’이었다면 그 변화가 자연스러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책을 좋아한다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인쇄를 다룬 이야기는 많이 없으니까. 책을 쓰는 저자만큼, 그 책을 세상에 내보이는 출판사만큼 실체로 만드는 인쇄소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이 책을 관통하는 우라모토의 말로 마무리한다.


“도요즈미인쇄라는 글자 너머에는 전체 직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야. 판권은 책의 엔딩 크레딧이니까.” - p.350, 우라모토 마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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