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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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후, 조금씩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접하려는 시도 중이다. 지난 언젠가 중고서점을 들렀을 때 구매해 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1권을 얼마 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너무 감명 깊게 본 탓일까? 내가 기대한 느낌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야!’라는 감탄이었다. 그러나 유작 소설집인 빛이 있는 동안은 약간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9편의 단편 소설 중 추리 장르는 3편밖에 되질 않았다. 그마저도 추리 냄새가 물씬 풍겼던 작품은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하나였다.

 

물론 개인적인 감상일 따름이다. 내가 워낙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이고 기대를 너무 부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모순적이지만 원래 책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을 강렬하게 끈 문장 하나만 얻어도 인생 책이 되기 마련일진대,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소설이 있었다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한 번 더 모순적이게도 내가 선택한 소설은 기대와 다르게 추리 장르가 아니었다. 로맨스라고 해야 하나? 9편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외로운 신이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외로움과 우연한 만남과 순애보

 

동양의 작은 신상(神像)은 오랜 시간 다른 중요한 신상에 떠밀려 외롭게 지냈다. ‘잿빛 돌로 거칠게 깎인 이목구비가 세월과 비바람에 거의 마모된 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얼굴을 두 손 안에 묻은 채 외롭게 앉아 있었다(p.116P.’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숭배하지 않았다.

 

어느 날, 40대가 된 프랭크 올리버라는 남자가 강한 외로움을 느끼며 박물관을 찾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고국을 오래 떠나있던 탓에 시대에 적응을 못 했다. 친구의 아내가 멋진 여자들을 소개해 줬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로 소심하고 지질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외로운 신상을 봤으니 동질감이 드는 것도 이해된다. 그는 매일 박물관을 들르면서 독점하듯 신상을 숭배했다.

 

그러다 우연한 만남이 일어났다. 신상에게 두 번째 숭배자가 생긴 것이다. 20대 즈음의 앳된 여자로, 외모는 아름다웠지만 행색이 초라했다. 그는 그녀 역시 외로운 존재라고 단정 지었다. 한 동안 그녀를 관찰하던 프랭크는 외로운 신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느낌에 힘입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새 손수건을 하나 구해서 떨어뜨린 뒤 우연을 가장해 그녀의 것인지 물으면서 말꼬를 틔었다. 여자는 즉각 아니라며 떠날 궁리를 했으나 프랭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로운 신을 주제로 말을 이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침묵이 둘 사이에 자리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여자였다. 예의상 인사를 하고 그녀는 박물관을 떠났다.

 

한동안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랭크는 꾸준히 박물관에 들러 그녀를 기다렸다. 전시실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 정도로 말이다. 고된 인내 끝에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는 용기를 내어 친구가 되어달라고 고백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만나 작은 외로운 신상에 대한 주제로 시작해 점점 서로를 알아갔다. 여자는 어느 집안의 보모 겸 가정교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아라고, 이 세상에서 혼자뿐이라고 그에게 말했다(p.125).’ 그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삶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림 그리는 게 취미지만,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만 언젠가 근사한 뭔가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둘은 서로를 알아가면서 이내 사랑이 싹텄다. 여자는 손수건 사건에 대해 프랭크에게 고마워하고, 그는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했다. “언제나처럼 열 시에 만납시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과 지나온 얘기를 나눕시다. 아주 실제적이고 산문적이 되는 거요(p.131)” 그러나 둘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여자는 어린 소년을 시켜 편지 한 장만 전한 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날이 지났다. 프랭크는 취미가 아닌 업으로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성공적으로 명성을 가져다줬고 예술원에 전시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잡지에서 어느 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영감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그려냈다. 모두가 공주를 위하지만 그녀는 지독히도 외로운 자태였다. 그 그림은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그는 완전히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친구의 아내가 아가씨를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프랭크는 거절했다. 그에게는 오직 외로운 숙녀뿐이었다.

 

경마 대회 날, 박물관에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이 외로운 신상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신상에게 프랭크가 나타나길 빌었다. 그 순간 프랭크가 등장했고 그녀를 얼싸안았다. 알고 보니 공주 이야기는 그녀가 쓴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부유했지만 외로운 여자였다.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며 애처로운 여자 연기를 했다. 프랭크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녀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것이 도망친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자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는 남자가 바로 프랭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진실한 사랑을 얻고 손을 잡은 뒤 박물관을 나섰다.

 

그로써 외로운 작은 신은 두 숭배자를 잃었지만, 그 역시 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프랭크와 숙녀의 소망을 이뤄주었으니 말이다. 외로운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낯선 땅에 표류한 외롭디외로운 작은 신이 아니겠는가?(p.137)’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언뜻 보면 우연과 운명으로 점철된 단순한 러브 스토리 같지만, 내게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소설로 보였다. 외로운 신으로 시작해 외로운 신으로 끝나는 수미쌍관 형식은 작은 신이 외로움의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번개의 신에게 번개가 없다면 번개의 신이 아니듯이, 작은 신에게 외로움이 없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없다. 반면, 인간은 인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외로움의 신에게 외로움을 달래려는 숭배자가 생긴다면, 인간이 외로운 신에 의지해 영원토록 외롭다면 서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숭배자를 그들만의 천국으로 인도했다. 각자의 존재가 온전해진 것이다.

 

여운이 길게 남아 나의 사족을 덧붙였다. 9편의 작품 중 하나만 다뤄 수준 낮은 감상문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내 마음을 울린 소설은 이것 하나뿐인 것을. 이 작품 하나만 봐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시길. 대가의 작품집인 만큼 다른 소설도 훌륭하다. 아마 어느 독자에겐 이 소설이 별로고 다른 소설이 취향에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책은 본인이 읽고 판단하는 게 옳다. 별로 두껍지도 않으니까 누구든 금방 읽을 것이다.

 

기대에 크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쓰면서 복기하니 딱히 실망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감상문을 쓰느라 다시 읽었는데 역시 울림이 상당했다. 그렇더라도 유작 소설집은 여기까지만 감탄하고, 다음에는 정말 추리 소설을 읽어야겠다. 함께 사 온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나를 기다리는 중이다. 대작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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