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걸 조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74
존스턴 매컬리 지음, 김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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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런저런 영웅에 대해 자랑하면 엄마는 조로같은 거냐고 하셨다. 엄마 세대에게는 조로가 최고의 영웅 캐릭터였다고. 나는 초능력자나 공상과학 영역의 인물들을 좋아했으니,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클립으로 보여준 조로는 영 별로였다. 그냥 사람이 눈만 가리는 가면을 썼는데 왜 못 알아보는 건지 의문이었다. 액션 또한 칼싸움밖에 없어서 빔 쏘고 총 쏘고 대포 쏘는 현대 영웅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그 후로 이 영웅은 내 머릿속에서 싹 잊혀졌다.

 

다시 이런 기억이 떠오른 것은 최근 중고서점에서 구매해 읽었기 때문이다. 한 번 서점에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올 수 없어서 어떻게든 책을 고르는데,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모르는 쾌걸 조로가 눈에 들어왔다. 뒷면 소개글에는 친숙한 영웅들인 슈퍼맨, 베트맨, 스파이더맨 등 이중 정체성 영웅의 원형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 어릴적 우상의 원형이라니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비록 현대 영웅물보다 재미는 떨어질지언정 원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읽을 가치가 충분했다.

 

돈 디에고 베가는 서부 지역에서 세력이 강한 베가가문의 아들이다. 이 청년은 잘생긴 외모와 든든한 뒷배경을 가졌지만, 항상 무기력하고 지친 행색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가세가 무서워 앞에서는 아첨을 떨고 뒤에서는 비아냥댄다. 군인 곤잘레스 페드로 상사와 라몬 대위는 대놓고 무시하는 수준이다.

 

무기력한 청년 디에고는 몰락한 폴리도 가문의 딸 롤리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이유가 단순하다. 나이가 되었으니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으로서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고, 가문의 평판은 맞춰야 하기에 가장 적당한 집안이 폴리도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접근을 가주인 돈 카를로스 폴리도와 그의 부인은 재기의 기회로 생각하고 환영 하지만, 롤리타 폴리도는 전혀 아니다. 인생의 한 번뿐인 청혼을 열정과 사랑의 노래 없이 허락하는 것은 처녀의 특권을 내다 버리는 짓이었다. 롤리타는 수치심을 느끼며 디에고를 거절한다. 하지만 디에고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 자신의 부유함을 보여주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반면,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라 불리는 조로는 디에고와 다르게 온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 억울하게 매 맞은 이들을 대신해 복수하고, 부당한 권력 행위를 징벌한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치안 담장이자 현상금에 눈이 먼 페드로 상사는 발에 불이 나도록 조로를 추적한다. 역시 진급이 걸려 있는 라몬 대위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조로 추적에 더욱 열을 올리는 이유는 각각 수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허풍 떨던 페드로 상사는 부하들 앞에서 조로에게 장난감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매번 추격에 실패한다. 라몬 대위는 롤리타에게 반해 두 번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첫 번째 거절에서는 조로에게 부상당하고, 두 번째 거절에서는 강제로 키스하려다 등장한 조로에 의해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쫓겨난다. 이로 인해 라몬 대위는 조로에 대한 복수에 이를 갈고 폴리도 가문까지 엮는다.

 

롤리타는 다른 의미로 마음에 불이 붙었다. 돈 디에고 베가가 떠난 후 그가 더 열정적이기를 바라며 조는 사이,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옆에 조로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바라마지않던 열정적인 언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범죄자로 쫓기는 사내지만, 그의 행동에는 비겁함이 없고 당당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 게다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라몬 대위로부터 구해주기까지 했다. 라몬 대위와 지사의 합작으로 폴리도 일가가 일반 범죄자 감방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으나, 그마저도 조로가 구해낸다.

 

조로가 롤리타를 구해내기 전, 그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한다. 이번에는 자신을 쫓던 신사들의 마음에 열정을 지핀 것이다. 불의를 참지 않는 진정한 신사 정신을. 그들은 조로를 도와 폴리도 가문 구출에 일조한다. 최후의 장면에서 조로와 롤리타가 술집에 갇혀 차라리 함께 죽기를 바랄 때도 신사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해 지사와 군인들을 저지한다. 이들의 열정에 반한 디에고의 아버지, 돈 알레한드로 베가도 공식적으로 합류해 조로 지지를 선언한다. 덕분에 조로와 롤리타는 죽음 앞에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로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일대의 모든 이들에게 환호성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적이고 당당하며 칼 솜씨가 뛰어난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 바로 무기력하고 소심하며 항상 지쳐있던 돈 디에고 베가였던 것이다! 디에고는 열다섯 살 때, 자신과 친하던 인디언과 수도사가 핍박 당하는 것을 보고 조로가 되기로 결심했고, 모두를 속이기 위해 디에고일 때는 무기력한 모습을 꾸며냈다. 진실이 밝혀지자 아들의 의욕 없음을 걱정하던 돈 알레한드로 베가도, 외모와 가세만큼 열정적이기를 바랐던 롤리타도, 그를 무시했던 곤잘레스 페드로 상사도, 조로를 따르던 신사들도 모두 기뻐해 마지않았다.

 

지금은 클리셰로 치부되는 내용이다. 물론 여전히 인기는 있지만, 흥미롭지는 않다고나 할까. 디에고와 조로가 동일 인물인 점이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났어도 읽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 읽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에는 엄청난 반전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원형을 읽는 것에는 시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원형의 변주가 널리 퍼지고 퍼져서 클리셰가 되면 분명 읽은 적이 없음에도 이미 읽었던 느낌이다. 내가 가장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웅 캐릭터에 영감을 준 아버지 격의 서사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쾌걸 조로가 쓰이지 않았다면 베트맨도 슈퍼맨도 스파이더맨도 없었을지 모른다. 있었어도 이중 정체성이 가져다주는 스릴 없이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더욱 진부한 내용으로 전개되었을지도. 아니면 등장 시기가 매우 늦어졌을까. If의 세계는 뭐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쾌걸 조로가 등장했기에 나의 추억이 풍성해졌다는 점은 명확한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진부해도 좋게 평가되는 원형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영웅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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