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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
앙리 샤리에르 지음, 문신원 옮김 / 황소자리 / 2017년 4월
평점 :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권은 나온다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책을 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시간, 의지, 기술적 문제는 물론, 무엇보다 막상 풀어보면 재미가 없을 게 분명하다. 평범한 사건이라면 극적 요소와 갈등을 집어넣어야 하고, 특별한 사건이라면 적당한 긴장감과 완급 조절이 필요한데, 웬만한 이야기꾼이 아니고서야 일대기를 그렇게 조성하기란 쉽지 않다. 말로 하기도 어려운데 글로 쓰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저자 앙리 샤리에르는 해냈다. 31년 프랑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받아 들어간 도형지에서 탈출해 자유인 신분이 되기까지 장장 13년, 길고 지난한 과정을 한시도 지루할 틈 없이 풀어낸 소설이 『빠삐용』이다. 앙리 샤리에르는 웬만한 이야기꾼을 넘어 대단한 달변가였다. 게다가 책머리에 있는 초고 편집자의 글을 보면 구두점과 오탈자 빼곤 손댄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천부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을 담은 소설은 다양한 탈출 시도를 담고 있다. 첫 번째 탈출은 생로랑 도형지의 병원에서, 두 번째는 리오 아샤,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는 콜롬비아 감옥, 일곱 번째는 루아얄 섬에서, 여덟 번째는 생 조제프,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 디아블 섬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영국령 기아나의 조지타운을 걸쳐 베네수엘라로 이동한 빠삐용은 얼마간의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 베네수엘라 시민증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자유인이 된 것이다.
자유인의 신분을 얻는 과정에서 빠삐용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첫 번째 탈출에서 미리 매수한 브로커 지저스라는 인물은 받은 돈에 비해 너무 낡은 배를 주어 빠삐용 일행을 곤경에 빠뜨릴 뻔했지만, 브르통과 나병 환자들 덕분에 멀쩡한 배를 구해 지장 없는 항해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탈출 후에 만난 과지라 부족은 빠삐용에게 두 번 다시 없을 행복한 시간을 선사했다. 그들과 동화되어 지낸 몇 개월의 기억은 빠삐용이 독방에서 격리 수감 생활을 할 때 버팀목이 되었다. 특히 과지라 부족 아내인 랄리와 조라이마는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드가의 형인 조제프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신의 생계(그는 포주였다.)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조제프는 빠삐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루아얄에서는 마튜 카르보니에리, 부르세, 나릭, 케니에의 도움을 받아 탈출용 땟목을 거의 완성할 뻔했다. 베베르 셀리에가 밀고하지만 않았다면. 빠삐용은 그를 죽일까 고민했지만, 스스로 그를 죽일 권리가 없다고 결론 내려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생 조제프로 이송되기 전에 빠삐용은 셀리에를 죽였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인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생 조제프에서는 미친 사람인 척하여 요양원에 들어가 탈출을 꾀했다. 의무병으로 지원한 실뱅과 함께 기름통과 물통으로 만든 뗏을 이용했으나 파도를 계산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뗏목은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빠삐용은 푹 젖은 채 간신히 살아남았다. 실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박살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빠삐용은 무기력에 빠져 미친 척을 관두고 다시 정상인 수용소로 돌아갔다. 그는 군의관에게 말해 디아블로 수용소를 옮겼다. 끝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디아블은 상대적으로 육지가 가까운 작은 섬이어서 탈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에서 창이라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실뱅과 함께 코코넛 부대로 만든 뗏목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 바다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육지에 도착하지만, 실뱅은 유사를 조심하지 않아 빠져 죽고 말았다. 빠삐용은 그런 친구를 둔 채 살고자 떠나는 자신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아얄의 육지에서는 흑인 장의 도움을 받아 창의 동생이 있는 이니니 수용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창의 동생인 치치와 다른 중국인 반 위와 함께 배를 구해 조지타운으로 완전히 탈출했다. 평화롭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탈주자여서 빠삐용은 다른 프랑스인 탈주자와 함께 조지타운을 벗어났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영원한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
벽 앞면은 문명사회가 허울 좋게 그려져 있고, 뒷면은 거칠거칠한 콘크리트의 질감 그대로다. 자유는 벽 너머에 있고, 그 벽을 넘기 위해서는 예쁘게 그려진 문명사회를 밟고 올라가 더렵혀야 한다. 그렇기에 제도는 넘어오지 못하게 막을 따름이다. 빠삐용의 탈출은 제도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게다가 프랑스가 아닌 베네수엘라에 정착함으로써 열강이 곧 발전된 문명사회라는 허울을 벗겨버렸다.
‘빠삐용’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나비 외에 ‘경박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또 그의 가슴팍에는 나비 문신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하게 보면 앙리의 별명일 따름이다. 하지만 나비가 자유로움의 상징임을 생각해보면 탈출하는 과정에서 애벌레에서 번데기까지의 위험을 느낄 수 있다. 번데기가 갈라지고 화려한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과 드디어 자유인이 된 앙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빠삐용』이 단순한 소설이었다면 감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앙리 샤리에르의 실제 탈출 경험담이 바탕이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감동도 커다랬다. 코로나와 취업 준비로 나는 나름대로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할 입장은 아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1:1로 비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근성과 집념은 시대를 막론하는 역량이기에 나의 나비를 날리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빠삐용은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 나에게 당면한 과제다.
"그놈의 우리 아름다운 조국에는 아름다운 정의감은 없는 것 같아요, 드가. 우리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더 인간적으로 다루는 나라는 많을걸요." - P77
과지라 부족은 백인들이나 다른 부족들이 몹시 두려워하는 부족이지만 내게만큼은 잠시 숨을 돌릴 정박항이었고, 문명세계 인간들의 사악함에 비교도 할 수 없는 피신처였다. - P260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만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의 유일한 종교이다. -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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