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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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 심판은 사후 영혼의 행방을 결정하는 재판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총 네 명으로, 피고인인 아나톨 피숑, 변호인 카롤린, 검사 베르트랑, 재판장 가브리엘이다.

 

아나톨 피숑은 폐암 말기 수술을 받다가 사망해 천국에서 깨어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수술 전보다 몸이 가볍다고 좋아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카롤린은 측은한 마음에 사실을 알리는 것을 미룬다. 베르트랑, 가브리엘과 함께 재판을 받을 때가 돼서야 아나톨은 자신이 죽었음을 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으나 천국의 기술(?)로 죽는 상황부터 장례 절차까지의 영상을 본 후 체념하며 재판에 임한다. 검사인 베르트랑은 아나톨 피숑의 부정적인 현생의 결과를 언급하고, 반대로 변호인인 카롤린은 그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모든 과정이 끝나자 가브리엘은 아나톨에게 환생하여 다시 한번 삶을 사는 삶의 형을 내린다. 그러나 예정과는 다르게 아나톨은 천국에 남아 현생에 이어 재판장이 되기를 원하고, 그가 겪어야 했던 환생은 가브리엘이 대신 하면서 막이 내린다.

 

사후세계나 종교를 믿지 않지만, 상상의 영역에서는 자주 떠올리곤 하는 까닭에 읽는 내내 재밌었다. 곳곳에 있는 유머도 한몫했다. 이승에서는 재판하던 판사가 저승에서는 피고가 되는 아이러니, 2000년 전 로마 사람인 가브리엘이 현대화한 천국의 최신 기술을 어려워하는 일, 아나톨 피숑의 죽음이 알고 보니 천국의 실수였던 것, 환생 후의 삶을 계획하는 시나리오 작성 등등.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환생 장면이다. 분명 가브리엘은 아나톨에게 삶의 형을 내렸다. 보통 환생을 축복으로 여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형벌이다. 그럼에도 아나톨이 환생을 주저하며 가브리엘에게 대신 가기를 요청하자 그녀는 받아들인다. 자신에게는 육와(肉化)의 그리움이 있어서 다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형벌이었던 환생의 개념이 다시 축복으로 바뀐 셈이다. 지금의 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삶을 다시 사는 계기는 형벌이 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을 지겹게 살아냈던 아나톨에게는 다시금 사는 게 형벌이었고, 2000년 동안 밤낮없이 사자를 재판했던 가브리엘에게는 축복이자 기회였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그러니 나에게 환생이란 축복이 되기 위해 현생을 열심히 살자따위의 각오는 들지 않았다. 하도 거짓 갬성으로 자신을 속여온 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박하게 지금 넘치는 의욕에 부채질 정도 되었다 정도. 뭐 책을 재밌게 읽었으면 그것으로 된 거 아니겠는가. 순조롭게 독서를 계속하고 있고, 간간이 기록도 하는 중이니, 유지만 한다면 각오 없이도 환생은 축복이 되리라. 물론 천국이든 환생이든 믿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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