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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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르소설에 대한 편견이 있다. 중고딩 시절의 전부를 만화, 애니메이션, 판타지 소설로 가득 채웠으면서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단순히 취미와 쾌락을 채우는 장난감쯤으로 치부했다.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 요네스 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에서 내가 뭘 배우거나 깨달은 것 따윈 없었다. '그냥 심심함을 달래줘서 좋았고 재밌었다' 정도만 느꼈을 뿐이다. 사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집도 그런 이유에서 구매한 책이었다. 작년인가, 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기대평을 남기는 것을 보고 혹한 것도 있었다. 얼마나 재밌길래? 그러나 중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기에 남는 시간에 깔짝대며 읽기로 했다.

 

바빌론의 탑

 

첫 번째 소설인 바빌론의 탑까지만 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국이었던 바빌론에서 쌓았던 탑을 주제로,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닌 신에 대한 만남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하늘까지 닿은 탑은 천장 바닥을 뚫고 신의 세계로 도달하려 한다. 탑과 천장 사이의 공간을 뚫던 도중, 홍수와도 같은 물을 만나게 되고 탑이 문을 닫는 바람에 주인공 힐라룸은 탑과 천상 사이에 갇히고 만다. 캄캄한 어둠을 더듬거려 결국 그 공간을 탈출한 그의 눈에 밝은 빛이 비친다. 신의 세계인가. 아니, 돌아온 시각에는 그가 고대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상인에게 힐라룸은 여기가 어딘지 묻고, 바빌론으로 향하는 길임을 듣게 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반전 요소라 말해줄 순 없다.

 

아무튼, 발상이 새롭고 재밌긴 했지만 매력적이진 않았다. 이미 편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봤기 때문이다. 심심풀이로 읽기 부담 없겠다 싶어 다른 책 읽으면서 휴식용 책으로 빼놓았다. 시간이 남으면 읽기로. 예상했겠지만, 이 생각은 어김없이 박살 났다.

 

이해

 

적어도 책의 두 번째 소설인 이해는 읽고 판단했어야 했다. 나는 지적 욕심이 많고, 뇌과학도 좋아한다. 가끔 완전한 이성을 가지고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해는 그런 나의 관심사를 한 번에 휘어잡았을뿐더러 최고의 몰입감까지 선사했다.

 

''는 뇌를 다쳐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였지만, 특수 호르몬제로 인해 손상된 뇌가 회복되면서 깨어난다. 어느 날, 통화와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뇌가 비상식적으로 발달했음을 안 것이다. 그 원인은 호르몬제에 있었다. ''는 병원의 실험에 응하는 척하면서 호르몬제를 추가로 맞는다. 뇌가 더 고효율을 보이자 ''는 병원을 따돌려 단독 행동에 돌입한다. FBI가 그를 추적하지만, 그는 그들을 훨씬 상회하는 지적 능력으로 떼어내는데 성공한다. 이제 오로지 자신의 지적 능력 강화에 힘을 쏟는다. 그러던 중 자신의 증권 계좌가 인위적으로 공격받는다. 자신처럼 뇌가 강화된 존재가 하나 더 있음을 인지하고, 차차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처지임을 알게 되어 ''는 그 녀석을 없애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는 ''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였다. 도리어 그에게 공격받고 ''의 정신이 붕괴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나의 글쓰기 능력이 한참 모자라 줄거리로는 내가 겪은 몰입감을 전달할 수 없다. 양해 바란다. 내가 이 책을 잘못 판단했음은 한밤중에 읽으며 깨달았다. 졸렸음에도 책을 덮기 싫어 조금만 더 참자, 되뇌며 읽었다. 다음 소설의 제목에 도착해서야 홀가분하게 책을 덮었다. 다음 날부터 이 책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다. 한 번 펼치면 쉽게 덮을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

 

네 인생의 이야기

 

헵타포드라 명명한 외계인으로부터 언어학자인 ''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딸을 위한 문장을 헵타포드 식으로 서술하는 이야기다. 언어를 배우는 현실과 딸을 위한 문장이 교차로 나오다, 마지막에는 현실 속에서 사고하는 과정으로 합쳐지며 헵타포드 식 문장이 현실과 별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현실 속에 묻어있는 미래임을 암시한다.

 

네 번째 소설이자 표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표제도 ''로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의 대접받고 싶은 심리를 반영해서 인지 '당신'으로 존칭해줬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닌데, '당신'을 보고 들어와 ''로 지칭되니 어색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니까 넘어가자.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문화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다. 같은 사진을 영어권과 한자권의 사람에게 보여줬을 때, 전자는 부분에 집중하고, 후자는 전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실험이 생각났다. ''가 딸을 위한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헵타포드 식 언어를 익히면서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물리학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역시 모든 학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SF 소설

 

이 외에도 5편의 소설이 있다. 전부 재밌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은 두 편을 가져왔다. (첫 번째는 나를 까기 위해서였다.)

 

SF라고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뿌슝빠슝하는 종류의 액션 영화와 소설들이다. 간혹 인터스텔라마션같은 것도 있지만, 주로 액션 쪽이 자주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SF라는 장르에 편견이 있었는지도. 공상 과학(Science Fiction)은 말 그대로 과학적 상상력을 풀어낸 작품을 말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테드 창이 아닐까 한다. SF 끈이 짧아서 확신은 못하지만.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모든 장르소설을 받아들일 만큼 나의 그릇은 크지 않다. 아니, SF마저도 팍팍 읽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넘쳐나지 않고. 여전히 휴식의 용도로 읽을 테지. 다만, 무작정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할 것 같다. 적어도 테드 창 소설은 가리지 않고 볼 예정이다. 조만간 도 사서 읽어야겠다. 올여름이 오기 전에 먼저 시원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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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 2020-03-30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편 제목은 네(딸) 인생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지만, 책 제목은 Stories of your life로 단편 제목과는 달라서, 딸이 아니라 ‘당신(독자)의 이야기들‘이라네요. 작품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다름아닌 당신의 이야기라는 깊은 뜻...

찐새 2020-03-30 21:1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영어를 잘 몰라서 오해했네요, 제가 ㅎㅎ;;
올바른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