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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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나의 몇 안 되는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친한 사이끼리는 으레 그렇듯이 우리도 만날 때마다 속에 담은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그러나 늘 친구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보지 못한 기간 동안 바뀐 친구의 생각이나 전혀 들려주지 않았던 과거사까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속에 담긴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한 예가 아닐까 한다.

 

사람 속을 모르는 것은 비단 타인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 듯하다. 나조차도 내 속마음을 모를 때가 참 많다. 마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난 뒤 곱씹지 않고서야 순간순간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특히 낯선 사람들을 이제 막 만나는 나이대라면 더 그럴 것이다. 작중 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인물조차도 어리숙했던 때에 다잡지 못한 마음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소설은 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생님(1)과 부모님(2)의 이야기와 선생님이 에게 보내는 유서(3)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생기는 의 마음, 그리고 숨겨두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편지로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순수함, 혹은 어리석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금에야 비로소 그걸 깨달았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이따금 내게 보여준 쌀쌀맞은 인사나 냉담해 보이는 행동은 나를 멀리하려는 불쾌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 - p.24~25

 

많은 나쁜 행동이 있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아무래도 의도성이 없는 나쁨이리라. 예를 들면, 5살짜리 동생이 내가 아끼는 책에 낙서하고 찢어 놓았다면 내 속은 끓겠지만 그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그 녀석에게는 나를 화나게 만들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는 선생님의 초연한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고 자주 왕래함에 따라 간혹 질문을 던졌다. 그중에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한 것은 그의 뒤를 쫓은 일이었다.

 

선생님은 매달 친구의 묘를 찾아갔다. ‘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행동은 선생님이 가진 죄의식을 건드는 행위였다. 그의 초연함은 과거사로부터 용서를 구하며 마주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에게는 의도성이 전혀 없었지만 선생님에게 극단적 결심의 단초를 제공했다. 선생님이 에게 털어놓으려 했을 때 는 아버지가 위독해 고향에 있었고, 그 사이 선생님은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선생님의 죄책감

 

나는 남한테 속았다네. 그것도 피를 나눈 친척한테 속았지. 나는 결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네.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착한 사람인 것 같았던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으로 변했거든. 난 그들한테서 받은 굴욕과 손해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네. 아마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겠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복수하지 않고 있네. 생각하면 나는 실제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증오하고 있거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 p.88

 

마지막 편지에는 선생님이 당한 두 번의 배신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배신은 숙부로부터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던 선생님은 자신의 재산관리를 숙부에게 맡겼다. 부모님 살아생전부터 돌아가신 후까지 선생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으므로, 선생님은 숙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 숙부가 자신의 딸을 선생님과 결혼시키려 하면서 선생님은 한 치의 의심이 생겨났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숙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던 게 새로 보였다. 전에는 정말 일하느라 바쁘게 생각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피하기 위해 바쁜 척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선생님은 숙부와 싸우고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의 일부만 되찾은 채 고향을 떠나왔다.

 

숙부에게 속았던 당시의 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느꼈지만,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했을 뿐이지 그래도 자신은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네. 세상 사람들이 어떻든 나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신념이 어딘가 있었던 거지. 그런데 K 때문에 그 신념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도 숙부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을 하자 갑자기 아찔한 느낌이 돌더군. 사람들에게 질린 나는 자신에게도 질려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네. - p.265

 

두 번째 배신은 도시에서 겪었다. 선생님은 지낼 곳을 찾다 어느 하숙 치는 집에 들어간다. 주인아주머니와 따님인 아가씨만 사는 집이었다. 그는 그들과 친해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아가씨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새로운 하숙인을 구하자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 K를 소개해 하숙을 들였다. 자신처럼 K도 마음의 안정을 얻기를 바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면서 선생님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K가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보이고, 아가씨와 K가 어울리는 것이 자신보다 더 친근해 보였다. 선생님은 아가씨를 얻기 위해 K를 비난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말해 K 몰래 따님을 주십사 요구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K는 스스로 경동맥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고, 그것이 선생님의 죄의식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배신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온 배신과 내부로부터 외부로 발현된 배신을 모두 겪은 선생님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멀리했다. 자신을 믿는 행위는 세상을 버티는 근간이다. 이것이 튼튼하지 못한 사람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다름없다. 언젠가 사사로운 충격만 들어와도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가 보기에 선생님은 지식인이며 세상을 통달한 듯한 초연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 마음은 항상 무너질 것을 염려해 충격을 피하는 성향이 겉으로는 그렇게 비추어진 것뿐이었다.

 

내가 그 감옥 안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또 그 감옥을 도저히 부술 수 없게 되었을 때 결국 내가 가장 손쉬운 노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고 생각했네. 자네는 왜냐며 눈을 동그랗게 뜰지도 모르겠지만 늘 내 마음을 죄어오는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그 힘은 내 활동을 모든 방면에서 막아내면서 나를 위해 죽음의 길만을 자유롭게 열어두고 있네.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한다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는 거지. - p.270

 

선생님이 편지를 보낸 이유

 

선생님은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지만, 헛된 지식인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드러내지 않은 고민 끝에 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정하면서도 가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다.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되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 p.151

 

그가 자신의 부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심정을 에게 밝힐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젊은 날과는 다르게 의 태도가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신의 약한 부분을 찔렀더라도 선생님은 가 자신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극단적 선택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짊어지지 못한 탓에 이뤄진 결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선생님은 지식인으로서 갖춰야 할 면모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솔직한 인정, 동정심을 요구하는 게 아닌 배울 점을 알려주는 자세, 그리고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물론 선생님의 자살은 부인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라 무책임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야기이다. 자살자가 겪은 무게는 누군가가 평가할 만큼 하찮지 않다.

 

이렇게 용기 내서 편지를 쓸 정도였다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선생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사람에 대한 믿음은 딱 에게 보낸 편지까지였다. 자신을 비롯한 타인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태도는 세상을 대하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이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기에. 선생님은 친구도 만나고 부인도 있고 까지 만났지만 정작 삶은 고립된 채였다.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변한다. 겉으로는 일관성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시시각각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오가고 때에 따라서는 평소 사소하게 여기던 일도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나 어떤 것보다도 삶을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것 또한 마음이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부에서는 의 아버지가 병세로 인해 몸져누워 있다. 육체에 병이 든 것이다. 이것은 선생님의 상황과 비교된다. 육체의 병은 눈에 보이기에 때에 맞춰 대응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미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편지를 받은 의 충격은 아버지의 병세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도시행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마음을 컨트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더 자주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상처를 마주하기란 굉장히 두렵고 무섭고 힘겨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놔두거나 회피하기만 한다면 더욱 곯으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아마도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일종의 마음 챙김이다.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 길 속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일면이라도 표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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