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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수놓다 - 제9회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 수상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평점 :
#물을수놓다 #도서협찬
#데라치하루나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것이 '아이가 태어나면'으로 바뀌고,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으로 바뀌고, '둘째가 태어나면'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중략) 아이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남편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출산 후에 자식에게 푹 빠지는 경우'를 지금까지 몇 번 보았다. 나도 자연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여성 호르몬이나 모성이 샘물처럼 펑펑 솟아날 거라고. 살아 있는 사랑의 샘물이 될 거라고. 내 자식이라면 조건 없이 무상의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가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조건 없이', '무상의' 사랑은 도저히 쏟을 수 없다. _111~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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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여자는 예쁘고 현명하다"고 했다. 남편은 "귀엽다"고 했다. 칭찬을 가장해 억압해 왔다. 그것은 억압이라고 규탄하기 위한 표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알려 한 적도 없었을지 모른다. 집어삼킬 필요 없는 감정을 계속 집어삼키면서 그렇게, 오늘까지, 나는. _184p.
자수를 좋아하는 남고생 기요스미의 가족의 이야기인 <물을 수놓다>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 이야기가 더 순식간에 진행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누나의 결혼 소식에 자신이 웨딩드레스를 만들겠다고 의욕을 불태우는 기요스미,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엄마 사스코는 아들이 아빠를 닮아 그런 건 아닌지 불만이다. 할머니는 자수를 즐겨 하는 손주에게 기꺼이 자수를 알려주고 손녀의 웨딩드레스를 함께 만들고자 하지만 누나인 미오는 '귀여운 건 절대 안 되고, 리본도 안된다, 민소매도 안되고, 목선이 너무 파여도 안된다'고 못 박는다.
'왜 저럴까?'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은 뒤로 넘어갈수록 그 질문이 다양해지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퍼즐이 맞춰가듯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며 각자의 빛깔을 가지고 있지만 모여서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듯한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해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이야기도, 캐릭터도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더 좋았다. 남자답게, 여자답게, 부모니까 등등 세상이 규정한 '보통'의 틀 앞에서 망설여 본 적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과 응원을 건네주는 소설이 될 것이다.
한 땀, 한 땀, 꿰매는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따금 내 마음이 누군가 엉망으로 휘젓고 구둣발로 돌아다닌 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천천히 바느질을 하다 보면 조금씩 방이 정돈되어 간다. 억지로 끌려 나온 분노나 슬픔은 서랍이나 선반과 같이 있어야 할 정소로 돌아가고, 지저분한 바닥은 깨끗하게 닦인다. _25~26p.
채소를 씻으며 "여자 같은 남자"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여자답다거나 남자답다는 표현 자체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귀찮은 구분이 필요한가? 그런 생각만 든다. 요리나 재봉에 능숙한 건 성별 상관없이 생활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기계에 강하다거나, 수학을 잘한다거나, 그런 것도 전부 생활력이다. _29p.
사실은 알고 있다. 귀여운 옷이 나쁜 게 아니다. 그 남자가 스커트를 찢은 건 디자인 때문이 아니다.
"하늘하늘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화를 냈어야 했다. 화를 내도 되었다.
네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남이 그런 말을 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귀여움'을 줄곧 피해 왔다. 오로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중략) 앞으로도 내가 귀여운 옷을 선택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일을 '귀여움' 탓으로 돌리는 짓은 그만두자. 흘려보내자. 이 비와 함께. 그리고 다시, 새롭게 선택하자. 나를 '기운 나게 해주는 것'을. _98~99p.
계속 혼자면 여차할 때 불안하잖아요. 아이는 귀여워요. 가족은 좋은 거예요. 그런 말은 지겹도록 들었다. 가족은 좋은 것이다. 아이도 귀엽다. 그런 건 나도 알지만 남의 일 같기만 하니 어쩔 수 없다.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그런 이미지의 중심에 나를 넣어보려 하면 아무래도 초점이 어긋난다. 그것은 아마도 '가정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_210p.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항상 움직인다. 그렇기에 청정하고 맑다. 한 번도 더럽혀진 적 없는 것은 '청정함'이 아니다. 계속 나아가는 것, 정체하지 않는 것을 청정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많이 울고 상처 입을 테고, 억울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움직이길 소망한다. 흐르는 물처럼 살아다오. 아버지가 할 말은 이상입니다." _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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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