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을 소설의 첫 만남 31
정은숙 지음, 장보송 그림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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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사랑을 #도서협찬

#정은숙

안티 러브 칩을 이식하면 생활 환경 부담금 감면은 물론 입시, 취업, 승진, 대출, 주택 구입 등에서 혜택이 컸다. 지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선택한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지혜의 그런 확신이 부러웠다. 칩 이식은 엄청난 혜택을 안겨 주지만 몇 가지 조건 때문에 함부로 선택할 수도 없었다. 안티 러브 칩은 전기 자극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고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_22p.

칩 이식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라는 거였다. 개인의 애정사에 국가가 관여할 수 있냐는 문제 제기를 교묘히 파하기 위해 '선택'이란 단어를 썼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칩 이식으로 받는 많은 혜택은 정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27p.

붉은 노을을 등지고 앉은 준서의 옆모습이 보였다. 설마 준서 때문에? 준서는 장난스럽지만 다정하고 듬직한 구석도 많은 아이였다.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준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랑으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걸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지켜본 목격자였다. 사랑이 도대체 뭔지 어렵고 헷갈렸다. 그래서 준서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사랑을 믿니?" _43p.

"엄마의 사랑은 실패로 끝났어. 객관적으로 그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하면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니까.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고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어. 그 사람이 떠나고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고 결국 너를 지켰어. 그때 그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용기가 샘솟아.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다가올 사랑을 미리 포기하라고 말할 수 없어." _51p.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의첫만남 #장보송 그림 #창비 #book #소설추천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나'는 세금 감면 등 막대한 혜택을 주는 '안티 러브 칩' 이식 수술을 고민한다. 아빠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몰래 엄마방을 들어가기 시작한 '나'. 엄마가 자주 사용하는 메일이 아닌, 방치되었지만 휴면계정은 아닌 이메일에서 어떤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짧은 소설에 기후환경 위기, 미혼모 가정, 개개인의 애정사에 관여하는 국가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어쩐지 귀엽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유쾌한 소설이었다. 소설과 잘 어울렸던 일러스트도 너무나 좋았던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긴 소설이 부담스러운 친구들에게 입문용으로 추천!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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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야식
하라다 히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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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야식 #도서협찬

#하라다히카

"몰라? 안 읽었어? 이노우에 야스시의 『시로밤바』말이야. 그 책에 나오는 요리를 재현한 거지. 오누이 할머니가 만드는 카레라이스야." (중략) "기노시타 씨가 여기 스카우트될 때, 오너가 지시한 소설이나 에세이에 나오는 요리 몇 가지쯤 재현해 내는 것이 조건이었대. 요리도 잘 하니까." _48~49p.

_

오토하는 문득 도서관에 처음 왔을 때, 망가진 캐리어를 든 것을 보고 사사이가 "빨간 머리 앤?"이라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그땐 순간 놀라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사람과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될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안심했다. 그 이후, 이 도서관에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 즉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청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잔뜩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도서관 직원 중에도, 손님 중에도. _147~148p.

일하던 서점에서 '어떤 사건'에 휘말린 오토하는 그 일을 계기로 퇴직, 갑작스러운 제안, 이직, 이사... 등 한 달 사이 복잡한 시간을 거쳐 '밤의 도서관'으로 이직하게 된다. 오토하가 취직한 곳은 '밤의 도서관'으로 운영시간은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근무시간은 오후 4시부터 새벽 1시까지이며 직원 기숙사도 제공된다. 신간은 없으며 주로 소설가 중심으로 그들이 작고한 뒤에 그들의 장서를 인수해 보존하고 전시하는 도서관으로 열람은 할 수 있지만 대출은 되지 않는다. 도서관, 야식.. 이 둘의 조합 만으로도 이미 꿀 조합!! '밤의 도서관'은 5편의 야식과 함께 저마다의 사연으로 모여 자신들의 시간을 생각하고 다듬기도 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지낸다.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와 함께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하나씩 들려주며 인물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화자는 오토하지만 '밤의 도서관'에 모인 인물들은 열심히인 삶에 지쳤거나, 그저 책이 좋아 모여 이야기하고 싶은 공간으로 이끌리듯 향하지 않았을까? 10시, 도서관 카페에서의 야식은 기다려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미스터리한 오너가 지시한 소설이나 에세이에 나오는 요리를 재현해낸다니... 밤의 도서관과 딱 맞는 컨셉이 아닌가! (특히, 밤에 읽을 때 주의.. 괜히 먹을 거 찾게 됨..)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미스터리 오너의 정체는 글을 읽으며 살짝 예상했던 바였지만, 열린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아마도 다음 시리즈를 예상한 결말일까?라고 생각해 본다.

작가의 이전적인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인상 깊게 읽었고 <76세 기리코의 범죄 일기>는 읽는 중인 작가의 신작이라, 더구나 도서관에 관련한 이야기라 호감이 갔던 책으로 역시나 작가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글이라 멈추지 못하고 읽었던 글이다. 책을 애정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꿈꾸었을 공간, 우리의 현실에도 이런 심야 도서관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지친 하루의 끝,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오랜 세월 도서관 직원으로 일했다. 도서관에 책이 산더미처럼 많다지만, 그렇다고 제 돈 주고 책을 안 사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많이 샀다. 수중에 두고 싶은 책이 많았고, 새로운 책도 많이 읽었다. 마음에 든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자, 집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만 갔다. 서점에 가거나 남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텔레비전에서 봐서 읽고 싶으면 금방 산다. 그러나 몇 페이지만 읽고 대충 던져두게 되고, 그게 방에 쌓여갔다. 그냥 지쳤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바쁘니까,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이 걸려 간신히 인정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뭔가 예전과는 다른 일이 생겼다. 언젠가 한가해지면, 언젠가 넉넉한 시간이 생기면 읽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책을 읽지 못한다. _158~159p.

책을 다루는 직업으로 흔히 서점 직원, 사서, 헌책방 직원,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데, 이해관계가 대립하므로 그다지 연결고리는 없다. 때로는 반목하기도 하고······. 그러나 이렇게 함께 일하다 보면 그런 장벽이 점점 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_238p.

이곳이 과연 계속될 수 있을까. 오너는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줄까.

오토하는 눈을 감았다. 모두의 목소리가 멀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은 취했기 때문이겠지.

여기가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영원하지 않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고 오토하는 생각했다. _367p.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rhk #소설 #일본소설 #소설추천 #추천소설 #힐링소설 #rhk북클럽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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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끔찍한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7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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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끔찍한남자 #도서협찬

#마이셰발 #페르발뢰

남자는 몸이 두 동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광경은 살육의 현장과 피투성이 범죄를 살펴보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도 끔찍한 장면이었다. _56p.

_

만약 당신이 정말로 경찰에 붙잡히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찰관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하는 진실이고, 스웨덴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스웨덴 범죄 역사에는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이 무수히 많지만 경찰관이 살해된 사건 중에는 미해결 사건이 한 건도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 중 하나가 그런 불운을 맞으면 경찰은 평소보다 몇 배 더 정력적으로 움직인다. 인력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싹 들어가고 여느 때라면 기껏해야 세네 명이 배정될 수사에 몇백 명을 거뜬히 동원할 수 있다.

경찰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잡힌다._88p.

전직 경찰서장이 입원한 병실에서 총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목격자도 없으며 범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든 상황. 스티그 뉘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경찰관에서 다시 군인이 되었고 정체 모를 특수임무를 많이 수행했다. 경찰 경력 내내 제복 경찰관이었음에도 고위층의 총애를 받았던 뉘만은 알 수 없는 극심한 통증으로 입원해서 검사 중이었는데... 병을 치료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것. 그의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투입된 마르틴 베크는 뉘만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 조직의 추악한 민낯과 뉘만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는 좀 더 일찍 이렇게 죽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악한 사람이었지만 가족에게만은 다정한 남편이며 아빠였고,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상사, 또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사디스트 악질 상사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집요하게 특정인에게 가혹할 정도로 몰아붙일 수 있는 권한을 왜 그에게 주었을까? 왜 그렇게까지 악랄하고 극악하게 굴었어야 했는지, 왜 타인의 삶을 극한으로까지 몰아갔는지.. 단지 그가 경찰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게 정당화되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인물의 사연이 안타깝고 공권력을 이용해 그들이 누리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늘 그렇듯 사건이 벌어지고 수사하는 과정, 범인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페이지를 멈추기 힘들 정도로 긴박하게 이어지고 마지막 장까지 총에 맞은 마르틴 베크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다음권이 시급해지는 시리즈이기도 했다.

<로재나>,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발코니에 선 남자> <웃는 경관> <사라진 소방차>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에 이어 일곱 번째 시리즈인 <어느 끔찍한 남자>. 마르틴 베크는 (드디어?) 이혼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일생일대의 위기에 놓이게 되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 '경찰 소설의 모범'이라 불려온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최근 추리, 범죄소설들이 잔인하고 잔혹한 묘사들에 피로함과 불편함을 느꼈던 이들에게 아날로그 한, 지적 유희를 느껴볼 수 있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오랜만에 읽는 맛을 알게 해준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다음에 읽게 될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책이다.

"자네들, 이 질문은 던져봤나? 뉘만은 과연 누구였는가?"

"뉘만이 누구였느냐고?"

뢴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대꾸했고. 마르틴 베크는 말이 없었다.

"그래. 뉘만은 누구였는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뉘만은 뭘하는 사람이었는가?"

(중략) "나쁜 경찰이었지."

"틀렸어. 잘 들어. 뉘만은 천하의 막돼먹은 경찰이었어. 최악의 개자식이었어." _115~116p.

벌써 세 명이 죽었다. 뉘만, 크반트, 악셀손. 그리고 헬리콥터가 추락함으로써 부상자가 일곱 명으로 늘었다.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_316p.

#마르틴베크 #마르틴베크시리즈 #엘릭시르 #문학동네 #김명남 옮김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추천 #도서추천 #book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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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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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여름에게 #도서협찬

#창비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 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물방울이 되어버린 할머니나 오이지라면 목구멍이 아리도록 가슴이 막혀오는 나나 그냥 우리는, 다 사랑이었어요. 할머니와 나의 사랑이 이렇게 뜨겁고 애달프다고. 그 지독한 사랑을 받은 아이가 나라는 사실, 더없이 귀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라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 이야기에 온통 상처만 남아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_18p.

하나의 단어는 그보다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고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언어를 익히고, 단어의 뜻과 쓰임을 알고, 그것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온갖 경험에서 건져 올린 나의 기억을 세계 속에 채워 넣으며 다채롭고 풍요롭게 나를 꾸려가는 것이겠죠. _24p.

누구나 오직 자신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몸으로, 나의 언어로, 나의 세계로, 나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그럴 때면 ‘없음’의 자리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없음에서 주워 올린 마음.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었던 마음. 없어서 구할 수 있었던 마음. 이런 건 무어라 이름 붙여주어야 할까요. 하필 나와 비슷한 돌멩이를 쥐고, 봄이 가까운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나를 닮은 사람을 떠올릴 때면 나는 더 솔직해지고 싶어지는 거예요. 더 용기 내고 싶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나의 단어를 찾아가면서요. _29~30p.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든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 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_63p.

망가질까 봐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가뜨리고, 무엇을 수선하고, 무엇을 다시 세우고, 무엇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알 것 같기 때문이다. _75p.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한 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서로의 눈을 맞추고 살갗을 스치지 않고 소리 없이 서로를 만지는 일. 내가 잊고 있었던 이야기마저 나보다 먼저 와 들어주는 일. 나는 그런 식으로 몇몇의 작가를 깊이 사랑했다. 내가 가장 어두울 때 나를 만지는 눈. 나만 준비되었다면 언제든 나를 안아주는 눈. _104~105p.

나는 혼자가 두렵다. 언젠가는 곁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너무 많은 비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같이 맞을 수도 없고 같이 피할 수도 없는 비를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모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이다. _136p.

지금은 없지만 '있었던' 순간만으로도 젖은 것은 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젖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두 발에 차오르던 빗물의 감각을 꿈에서도 잊을 수 없지만, 신기한 일이에요. 나를 붙들어 매는 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서 숨 쉬고 있으니까요. _179p.

#최지은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에세이 #문장발췌 #도서추천 #에세이추천 #추천도서 #book

▶ 덤덤하지만 애틋하고, 뭉근하게 차오르는 슬픔이 있지만 들여다보면 사랑이 가득하다. 올 여름, 이 한 권의 에세이만 끼고 있어도 뜨거운 여름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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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수놓다 - 제9회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 수상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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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수놓다 #도서협찬

#데라치하루나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것이 '아이가 태어나면'으로 바뀌고,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으로 바뀌고, '둘째가 태어나면'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중략) 아이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남편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출산 후에 자식에게 푹 빠지는 경우'를 지금까지 몇 번 보았다. 나도 자연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여성 호르몬이나 모성이 샘물처럼 펑펑 솟아날 거라고. 살아 있는 사랑의 샘물이 될 거라고. 내 자식이라면 조건 없이 무상의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가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조건 없이', '무상의' 사랑은 도저히 쏟을 수 없다. _111~112p.

_

아버지는 "여자는 예쁘고 현명하다"고 했다. 남편은 "귀엽다"고 했다. 칭찬을 가장해 억압해 왔다. 그것은 억압이라고 규탄하기 위한 표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알려 한 적도 없었을지 모른다. 집어삼킬 필요 없는 감정을 계속 집어삼키면서 그렇게, 오늘까지, 나는. _184p.

자수를 좋아하는 남고생 기요스미의 가족의 이야기인 <물을 수놓다>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 이야기가 더 순식간에 진행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누나의 결혼 소식에 자신이 웨딩드레스를 만들겠다고 의욕을 불태우는 기요스미,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엄마 사스코는 아들이 아빠를 닮아 그런 건 아닌지 불만이다. 할머니는 자수를 즐겨 하는 손주에게 기꺼이 자수를 알려주고 손녀의 웨딩드레스를 함께 만들고자 하지만 누나인 미오는 '귀여운 건 절대 안 되고, 리본도 안된다, 민소매도 안되고, 목선이 너무 파여도 안된다'고 못 박는다.

'왜 저럴까?'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은 뒤로 넘어갈수록 그 질문이 다양해지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퍼즐이 맞춰가듯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며 각자의 빛깔을 가지고 있지만 모여서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듯한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해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이야기도, 캐릭터도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더 좋았다. 남자답게, 여자답게, 부모니까 등등 세상이 규정한 '보통'의 틀 앞에서 망설여 본 적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과 응원을 건네주는 소설이 될 것이다.

한 땀, 한 땀, 꿰매는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따금 내 마음이 누군가 엉망으로 휘젓고 구둣발로 돌아다닌 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천천히 바느질을 하다 보면 조금씩 방이 정돈되어 간다. 억지로 끌려 나온 분노나 슬픔은 서랍이나 선반과 같이 있어야 할 정소로 돌아가고, 지저분한 바닥은 깨끗하게 닦인다. _25~26p.

채소를 씻으며 "여자 같은 남자"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여자답다거나 남자답다는 표현 자체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귀찮은 구분이 필요한가? 그런 생각만 든다. 요리나 재봉에 능숙한 건 성별 상관없이 생활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기계에 강하다거나, 수학을 잘한다거나, 그런 것도 전부 생활력이다. _29p.

사실은 알고 있다. 귀여운 옷이 나쁜 게 아니다. 그 남자가 스커트를 찢은 건 디자인 때문이 아니다.

"하늘하늘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화를 냈어야 했다. 화를 내도 되었다.

네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남이 그런 말을 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귀여움'을 줄곧 피해 왔다. 오로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중략) 앞으로도 내가 귀여운 옷을 선택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일을 '귀여움' 탓으로 돌리는 짓은 그만두자. 흘려보내자. 이 비와 함께. 그리고 다시, 새롭게 선택하자. 나를 '기운 나게 해주는 것'을. _98~99p.

계속 혼자면 여차할 때 불안하잖아요. 아이는 귀여워요. 가족은 좋은 거예요. 그런 말은 지겹도록 들었다. 가족은 좋은 것이다. 아이도 귀엽다. 그런 건 나도 알지만 남의 일 같기만 하니 어쩔 수 없다.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그런 이미지의 중심에 나를 넣어보려 하면 아무래도 초점이 어긋난다. 그것은 아마도 '가정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_210p.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항상 움직인다. 그렇기에 청정하고 맑다. 한 번도 더럽혀진 적 없는 것은 '청정함'이 아니다. 계속 나아가는 것, 정체하지 않는 것을 청정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많이 울고 상처 입을 테고, 억울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움직이길 소망한다. 흐르는 물처럼 살아다오. 아버지가 할 말은 이상입니다." _285p.

#김선영옮김 #북다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 #소설추천 #일본소설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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